* 히지오키 프로젝트 늪 배포본에 실렸던 글입니다.
푸른
푸른 자욱이 되리라. 되뇌인 이름이 망울져 가슴 위로 푸르게 멍질 것이다. 끝내 나 또한 죽어 거꾸러져, 진물이 흘러도 멍진 가슴께만 오롯이 남아 네 이름을 울 것이다. 오키타.
오키타.....
들려?
네게 해주고 싶던 말이 있어.....
[히지오키] 우는 무사도
Side Hijikata
W. 플루핑
bgm. 발밤발밤 - 홍광호
새벽이 덮쳐온다. 귀 울리던 총검 소리조차 멎은 한밤. 시체 껴안은 대지의 숨소리만 면면했다. 전쟁의 종말.
전쟁 발발 후 단 한번의 승리조차 쥐지 못한 채 숱한 패배에 떠밀려왔다. 이백오십여의 장정들이 한 줌으로 줄었다. 도바 후시미에서 이미 반토막이 된 신선조는 이제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곤도 씨는 형장으로. 너는 오사카로. 나는 하코다테로 각자 제 갈길 쫓아 떠났다. 곤도 씨가 제 목숨으로 구하려던 신선조 이름 단 이는 내가 마지막일 것이다. 오키타. 오키타. 더는 일어설 수 없는 몸뚱이에 남은 말은 그뿐이다.
오키타. 나는 우리가 무사이고 싶었다.
그 누구도 우리를 무사로 인정한 이 없다. 무사로 나지 않아 검을 다루고 주인을 모셔도 무사는 될 수가 없었다. 예를 지켜 충의로 삶을 다해도 우리는 무사가 아니었다. 곤도 씨가 할복의 예조차 받지 못하고 저잣거리 무뢰배처럼 목이 잘려 효수당할 때, 신념을 도둑맞은 신선조가 한낱 반동 칼잡이 나부랭이로 하나하나 죽어갈 때. 나는 무사로 죽으리라 다짐했다. 이들의 죽음을 무사의 명예로 지키리라. 내 죽음이 무사의 죽음이 될 수 있다면, 그들의 죽음 또한 무사의 죽음일 것이었다. 하코다테까지 죽으러 왔다 수군대는 사람들의 말 틀리지 않았다. 나는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사로 죽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다. 삶이 그 값을 잃은 것은 오래 전부터였으니까.
오키타. 너는 아마 모를 게다. 내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곤도 씨가 너를 요양소로 보내던 날, 나는 무엇도 묻지 않았다. 이유도 병의 경중도 앞으로의 일조차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곤도 씨와 대원들이 몇 번이고 너를 찾아가도 나는 널 찾지 않았지. 널 찾아가버리고 나면 다신 돌아오지 못할 걸 알았으니까. 네가 잠들기를 기다려 너를 떼어 두고 떠나온 것도 내가 안심하기 위해서였다. 하루하루 쇠약해져갈 너를 적어도 내 눈앞에서는 보지 않아도 될 테니까. 끝끝내 오사카 요양소에 두고 온 네가 도바 후시미까지 쫓아와 출전을 요구하며 무릎을 꿇었을 때는 주저앉을 것 같았지. 두려워하는 기색을 네게 들키고 싶지 않아 애써 매정한 남자인 척 눈을 감았다. 손이 후들후들 떨리면서도 냉정한 척 도움이 되지 않으니 꺼지라 뱉었었다. 내가 택 없는 고집을 피우던 그 밤 내내 밖에 꿇어앉은 모양 그대로 있을 너를 알면서도, 빤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귀를 막았다. 밤새 내리는 빗소리에 가슴이 뜨끔하면서도 미련하게 버텼다. 다음 날 못 이겨 뛰쳐나간 새벽녘에 네가 그랬지.
- 히지카타. 나는 싸울 수 있습니다.
- 아니 넌 싸울 수 없다.
- 나는 무인입니다. 무인의 명예를 지켜주십시오.
- 틀렸다. 죽음에는 명예가 없다.
- 아니오. 살아있는 오키타 소고에게는 명예가 있습니다. 히지카타. 오키타 소고의 명예를 지켜주십시오.
너를 죽일 수는 없다. 차게 식은 네 몸을 놀라 감싸 안은 내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네가 웃으며 속삭였었다.
- 히지카타. 나는 죽지 않아요.
내 손으로 보내놓고도 못내 걱정되어 가슴이 탔다. 네가 싸우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바짝바짝 목이 말라붙었다. 전투에도 통 집중하지 못해서 야마자키들이 기겁을 했었지. 네가 피를 토하며 돌아왔을 때는 굳이 나가겠다 고집했던 너보다 그런 너를 꺾지 못한 내 자신에게 화가 났었다. 나 자신에게 분노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너는 또다시 네 업으로 잃을 것이다 저주스러운 언어들이 마음을 헤집을 때, 나를 세우는 것은 늘 너였다. 그 순간조차. 널 껴안은 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내게 힘겹게 말을 잇던 너.
- 히지카타. 나는 오키타 소고이기 이전에 무사입니다.
아니. 너는 무사이기 이전에 오키타 소고였다. 늘 그랬어. 속엣말 꺼내놓지도 못하고 더듬거리기만 했었다. 네가 손을 뻗어 가만가만 내 볼을 만지며 웃었지.
- 히지카타.
- 히지카타..... 나는 살아있어요.....
그 말에 울컥이던 울음을 참느라 얼마나 혼을 뺐는지.
네 상태가 급작스레 나빠져 오사카로 호송되던 날, 나는 너와 함께 가고 싶었다. 팔에 총상을 입어 다시는 무사일 수 없을 곤도 씨와, 구심점이 흔들려 뿔뿔이 흩어지는 신선조는 안중에도 없었다. 너를 데리고 세상에서 도망쳐, 네 죽음조차 세상에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 네 혼의 마지막 조각조차 머물 곳은 나뿐이기를 바랐다. 모르느냐. 명예를 잃고 곤도를 잃고 신선조조차 잃는다 해도 너는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늘 너였다. 내 신념이 꺾일 때 항상 그 자리에 네가 있었다.
너를 보내고, 나는 그 무엇에도 이유를 세울 수가 없었다. 무기력은 서서히 나를 갉아먹었다. 나는 내 생조차 의미가 없었다. 무사라는 건 생에 가치가 있을 때 의미를 갖는 언어다. 무사는 무슨. 나는 망가져 있었다. 국중법도를 엄격히 지켰다면 나는 서른 번도 더 배를 갈라야 했을 것이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오직 울분이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이 억울했다.
그 부당한 거래가 우리에게 내려졌던 것은 그때였다. 대역죄인 곤도의 목으로 신선조의 죄를 대신하리라. 나는 코웃음 쳤다. 일고의 가치도 없다 내쳤지. 그 날 밤 반듯하게 차려입은 곤도가 나를 술자리로 불렀다. 둘 다 조용히 술만 마셨지. 한참을 그러고 나서야 곤도가 말했다.
- 토시, 나는 조건에 응할 생각이다.
- 웃기지마 곤도 씨. 신선조는 결국 미부로야. 무사 흉내 따위....
세간에서는 나를 두고 무사도의 광신자니 뭐니 떠드는 모양이지만, 나는 곤도야말로 무사의 표본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까지 우직한 사내였지. 곤도가 그러더군.
- 토시. 내가 신선조의 몸을 지키마. 너는 신선조의 이름을 지켜라.
오키타. 나는 늑대여도 족했다. 개든 늑대든 돼지든 그 어떤 하등한 무언가래도 상관없었어. 그런 내가 그토록 고역스런 생을 입때껏 이어온 이유는 그것이다. 걸음걸음이 너를 향한 것이었다. 나는 무사로 죽어 무사인 네게 가고 싶었다.
하코다테로 올라오면서는 죽음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죽음의 발소리 황망해 다른 무언가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기억은 하루하루 스러져갔다. 네 이름만이 수천 번쯤 혀끝에서 구르다가는 흩어졌다. 선명한 것은 종내 아무것도 없어질 것이었다. 오키타. 오키타. 끝내 그 이름마저 잃을까. 그러고도 살아 버틸 수 있을까. 매 순간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공포에 숨이 막혔다. 아직 죽어서는 안 되는데. 나는 너를 온전히 잃고도 살아남을 나날들이 두려웠다. 네가 피를 토하고 오사카로 돌아가던 날보담도, 곤도 씨의 머리가 누대 위에서 썩어 문드러지던 날보담도 더욱 두려운 것은 그것이었다. 하코다테의 땅을 밟았을 때, 나는 비로소 안도했다. 드디어 죽을 수 있겠구나. 네 이름을 잃기 전에.
그런 나날들을 기억한다. 연습을 빼먹고 놀러 나간 너를 데리러 가던 날들. 미츠바를 버리던 나를 숨어 지켜보던 너와 유난히 서럽던 그 달밤. 미츠바를 아낀다 말하며 네게 키스하던 날들. 마음 한 자락조차 새나갈까 조바심을 부리던 나와 아마도 그 모든 것을 훤히 알고 있었을 너. 너는 그런 내가 미웠을 것이다. 항상 밉다 밉다 투정부리며 내게 화를 내곤 했지. 그러나 오키타, 나는 네가 화를 내는 그 공간이 천국이었다. 내 곁에서 웃고 짜증을 내고 원망하는 그 순간들이 살아온 시간의 전부였다. 오키타. 나는 언제 어디서 쓰러져 눈 감아도 가슴에 품을 단어가 너 하나이면 족했다. 심장이 멎은 뒤에도 네 이름자만은 내 가슴 위에 선명하게 남을 것이다.
홀로 그 전장을 헤쳐 오며 말을 잃었다. 오키타. 이제 내게 남은 말은 이것뿐이다.
오키타.
오키타.....
사랑한다......
* [프로젝트 늪 히지오키 배포본]에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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