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표는 키잡이었으나.. ._.)
* 번민하는 선배가 보고싶었던 글
* 마레니 님 생일선물로 드린 글입니다.
One in a Million
립 X 황
w. 플루핑
01.
나는 항상 꽤 운이 좋은 편이지만,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어요. 선배를 거기서 딱 마주칠 줄은 몰랐거든. 솔직히 흥신소에 돈 좀 쓰면 선배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야 어렵지도 않게 알 수 있는데, 나는 그랬어요. 선배랑 다시 우연히 마주치지도 않는다면 인연이 아닌 거니까 더는 미련 두지 말자. 그 정도 인연도 없는 사이면 다시 이어 붙이려고 삽질하지 말자....
....선배. 저번에 내 인터뷰 봤어요?
그거 선배한테 하는 말이에요.
상처 받은 사람은 상대를 잊어도 상처를 준 사람은 상대를 평생 잊을 수가 없다는데. 사람이 사람에게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상처일까, 미안함일까. 아니면 죄책감이나 원망 같은 종류의 감정일까.
푸르스름한 새벽녘, 싸늘한 방 안에서 카사마츠는 눈을 떴다. 어째 머리가 심하게 아프다 했더니 창문도 닫지 않은 채 잠든 탓이다. 비척비척 일어나 보일러를 켜고 창문을 닫았다. 싸늘하게 밀려드는 새벽바람에 잠이 밀려날 것만 같다. 애매한 시간이라 다시 잠드는 게 썩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두통약은 그저께 쯤 다 먹은 것 같은데 하고 찬장을 뒤지다가 오래 전 약 봉투를 발견했다. 그대로 멈춰서고 만다.
‘참지 말고 그냥 먹어요. 미련하게 그걸 참고 있어’
영화다 뭐다 해서 요즘 가장 핫한 신인이라는 모양이지만, 그의 기억 속의 녀석은 언제나 어린 아이다. 녀석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벌써 십 년 가까이 되었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 때도 키만 저만큼이나 커서는 맹한 눈을 하고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양이 참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잔뜩 장난치며 그가 염색해 주곤 하던 노란 색, 반짝이는 머리카락과 가느다랗게 휘어지는 예쁜 눈매 같은 것들이 지금도 그렇지만 참 예쁜 애였다. 겨울에 약해서 춥고 바람만 불면 두통으로 고생하던 카사마츠에게 약을 챙겨 주곤 하던.
카사마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그동안 녹화해 둔 녀석의 영상들을 틀었다. 그때처럼 예쁜 얼굴을 한 그 녀석이, 훨씬 그럴듯한 얼굴을 하고 나긋하게 웃으며 질문에 답하거나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때도 알았지만 정말이지 꿈 같이 먼 세계의 녀석 아닌가.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모습이며 해외 유명 디자이너 누군가의 쇼에 선 녀석은 결핍이라고는 모르고 산 것처럼 근사하다. - 키세 씨 필모그래피가 아주 화려하던데. 쉴 틈 없이 일하시네요? 연애 같은 건 아직 생각이 없나 봐요? - 연애요? 글쎄 지금은 생각이 없네요. - 잊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있는 모양이에요. - 음 조금 미묘한데. 말짱하게 잘 살아서 그 사람한테 보여주고 싶었어요.
아직도 카사마츠는 때때로 녀석의 꿈을 꾼다.
녀석과 함께 살던 때의 그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파삭파삭하게 성마른 놈이었고, 산다는 행위 자체에 질려 있었다. 사는 게 버겁고 힘들고 무서워서 잔뜩 겁을 집어먹은 주제에 녀석에게는 항상 어른인 척 정도를 읊었다. 그때 그는 자신이 다 자란 줄 알았다. 성인이고 어른인 자신이 녀석에게 더 좋은 길을 찾아주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많이 울렸고 많이 상처를 냈다. 선배가 좋을 뿐이라고, 그것뿐이라고 자신에게 매달려 오는 녀석을 매정하게 내치곤 했다.
그때는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카사마츠는, 자신으로 인해 녀석이 비참해지는 것이 싫었다. 녀석이 계속해서 그 반짝이는 세계에서 반짝이며 살기를 바랐다.
지금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결국 그는 같은 선택을 하겠지만. 이렇게 머리가 아프고 예전의 기억이 떠오르는 날이면 그런 생각을 해 버리곤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남은 키세의 흔적이 미안함이나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사랑이었으면 좋겠다고.
*
- 윳 쨩. 있지....
- 아빠한테 여자가 있었어.
어릴 적에 어머니는 그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의존적이고 신경질적이고 다른 남자를 만나고 쇼핑이 아니면 어디에도 관심이 없는. 매일을 자랑하는 낙밖엔 없는 사람 같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건 미움과 상통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마음을 열 수 없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어린 시절에는 마냥 어머니를 떠나고 싶었다.
그에 비하면 어린 시절 그의 눈에 아버지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불쌍한 가장이었고 안쓰러운 사회인이었으며 고달픈 노동자였다. 매일 새벽같이 나가 밤늦도록 야근을 하고 자신에게는 옷 한 벌 사기 아까워하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단다. 그게 벌써 일곱 해 전의 일이다. 아버지의 시신은 내연녀와 함께 다 부서진 차체에서 발견되었다. 뺑소니였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외도를 알게 된 것은 그 때였다.
카사마츠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당장이라도 눕고 싶어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아득함이다. 걷는 걸음마다 골이 흔들리는 것만 같다. 얼어버릴 것 같은 귀를 발갛게 튼 손으로 감쌌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진종일 펴지 못한 허리가 뻐근하게 저려왔다.
겨울에 약한 편이다. 현역 농구선수 주제에 몸이 약하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오늘처럼 기온이 뚝 떨어지고 찬바람이 심한 날이면 어김없이 온 몸을 축축 늘어지게 만드는 두통이 찾아온다. 이유는 모른다. 병원엘 가도 원인을 찾을 수 없다고 할 뿐이다. 체질이란다. 무리하지 마시고 푹 쉬세요, 해 봐야 가난한 고학생이 지킬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장 오늘 알바를 나가지 않으면 내일 식비부터 빠듯한 생활.
- 너희 아빠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한테 어떻게, 어떻게 그래.
솔직히 말하면 지긋지긋했다. 아무것도 할 의욕을 잃은 어머니는 매일 원망만 했다. 아버질 탓했고 본인을 탓했고 상대 여자를 탓했고 뺑소니범을 탓했고 이런 세상을 탓했다. 어두침침한 방 안에 미동도 없이 누워선 하루 종일 밥 먹는 일도 잊었다. 자책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저주하기를 수만 번이었다.
엄마, 조금이라도 먹어야지. 그래야 살지. - 생각 없어. 살아 뭐 하니.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안쓰럽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다만 원망과 자괴감으로 망가져 가는 어머니는 카사마츠를 지치게 했다. 몇 해가 가도록 부정적인 감정들만 되씹으면서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책임감에 목이 매인 나날이었다. 바싹 지쳐 성마른 눈으로 집엘 돌아오면 다시 그 어두운 방을 마주하는 일상.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독립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이를테면 어머니에게서 질리지 않으려는 어떤 시도 같은 거였다. 간격이 필요했다. 어머니를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는 간격. 사랑만 할 수 있는 간격. 어머니에게 질리지 않을 만큼의 거리.
아무도 탓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살고 싶었다. 누군갈 미워하고 저주하는 일이 지긋지긋했다.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무작정 집을 떴다. 어디든 집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인적 드문 늦은 밤의 거리는 마치 얼어붙은 것 같다. 혼자 앙상한 나무 늘어선 길거리를 걷고 있자면 여러 가지 걱정들만 떠오른다. 오래 전부터 할 줄 아는 거라곤 농구밖에 없었다. 그러니 농구로 대학을 올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다. 대학농구 선수 생활로 학비 마련까지는 가능했지만 생활비는 필요하다. 월세며 식비, 교통비 따위를 계산 해 보면 훈련이 끝나고 곧장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속 편하게 훈련만 하면 되는 녀석들과는 차이가 생긴다. 시간과 여유, 체력에서 격차가 벌어진다. 악순환이다.
낮에 모리야마는 말했다. 너, 농구 계속 할 거 아니면 지금이라도 다른 길 찾아보는 게 좋을 걸. 그래도 평생 해 온 게 농구밖에 없는데, 할 줄 아는 건 농구뿐인데 대체 농구 말고 무얼 하라는 걸까. 방법이 없어 잠을 줄이고 여유를 줄였다. 그러고도 따라가는 것만으로 벅차다.
조금 더 노력하는 것, 조금 더 나를 혹사시키는 것. 언제까지 이런 생활이 가능할 수 있을까.
“...선배, 왔어요?”
“집 안에 있으랬지, 왜 말을 안 들어.”
“선배 보고 싶어서요. 마중 나가는 거 선배 싫어하잖아요.”
최소한 따뜻하게라도 입던가. 반지하 단칸방 계단에 걸터앉아 있는 키세 녀석의 꼬라지를 보고 카사마츠는 또, 짜증이 난다. 추운데 고생할까봐, 마중 나오지 말라고 했더니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이 꼴이다. 힘없이 웅크려 앉아선 바보처럼 헤헤거리는 얼굴에 정말이지 화라도 내고 싶었다. 카사마츠는 녀석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 세운다. 한참 있었는지 손이 아주 찼다.
“..너 언제부터 나와 있었어”
“그냥. 선배 너무 보고 싶어서 나와 있었어요.”
“바보야? 생각 없어? 추운 줄 몰라? 뭣 하러 밖에 나와선, 뭣 하러 이 꼴을 하고 사람 속을 뒤집어!”
내가 잘못 했어요. 미안해요. 다음부턴 안 그럴게. 제 또래 녀석들처럼 혼나면 적반하장으로 대들어도 좋을 텐데, 녀석은 늘 자신이 화를 내면 사과만 했다. 도리어 속이 더 꼬이는 기분이다. 카사마츠는 거칠게 녀석의 손을 붙잡고 계단을 내려와 문을 열었다. 집안이 싸늘한 걸 보면 또 보일러도 안 켜고 있었던 모양이다.
“따뜻하게 하고 있으랬지.”
“우리 집도 아니고 기름 값도 비싸잖아요”
“니가 언제부터 그렇게 예의가 깍듯했다고.”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다. 어느 날 무작정 그를 찾아와선 그대로 눌러앉았다. 제 이야기는 일절 안 하고 왜 그를 찾아왔는지에 대해서도 일언반구가 없었다.
당장 보일러를 켜고 집에 있는 덮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꺼냈다. 한 채 뿐인 이불이며 여름 이불까지 꺼내다 녀석을 감쌌다. 차갑게 언 녀석의 손을 붙잡아 녹이며 물었다.
“밥은 먹었어?”
“.....아직”
“집에 반찬 다 있다고 했잖아.”
“혼자 먹기 싫어요”
“애처럼 굴지 말랬지”
“애 맞잖아요”
“말대꾸는.”
우스운 관계다. 뺑소니 가해자의 아들과 죽은 피해자의 아들. 어떤 인과로도 어떤 관계로도 우리를 함께 엮을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녀석의 아버지는 돈을 주고 그의 아버지의 죽음을 덮었다. 사람 목숨도 얼마든지 돈으로 치환할 수 있는 것이다. 얼마가 오갔는지는 모른다. 어머니는 돈을 받았고 두개골과 어깨뼈가 산산조각 나고 갈비뼈가 폐를 찌르고도 두 시간을 더 살아 있었다는 아버지의 사건은 그대로 종결되었다. 사람 목숨이란 게 그렇게 허무했다.
녀석에게 핫팩을 찾아 쥐어 주곤 늦은 저녁을 하러 일어섰다. 걸음을 옮기려는데 녀석이 옷자락을 붙잡아 내려다보았다. 발갛게 부운 손으로 녀석이 꾸깃하게 구겨진 약봉지를 내민다. 두통약이었다.
“선배, 이거”
“뭔데”
“다 떨어졌길래.”
어쩌면 내가 녀석을 미워해야 했을까. 원수의 아들이라고 진부한 영화의 등장인물처럼 녀석을 원망해야 했을까.
“...이런 거 신경 쓰지 말랬지”
알 수 없지만. 이러고 있으면 어쩐지 다행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정신없이 녀석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으면 머리를 떠나지 않던 걱정들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게 된다. 무섭고 힘겹고 어렵던 모든 걱정이 저 멀리로 치워진다.
내가 녀석을 미워하는 게 맞는 걸까.
*
“밥 제대로 챙겨 먹고, 문단속 잘 하고.”
“응”
“춥게 하고 있지 마, 저번에도 감기 걸려서 고생해놓고선”
“알았어요”
“밖에 나와 있지도 말고.”
“안한다니까...”
“거기 서랍 위에 돈 좀 나뒀으니까 필요하면 그걸로 써”
“괜찮아요”
“말 좀 들어”
“언젠 말 들었나 내가”
입술을 삐죽이는 녀석의 단정한 이마에 콩, 소리가 나게 딱밤을 때렸다. 학교도 가. 지금은 몰라도 졸업장 중요한 거야. 했더니 입을 삐죽이면서도 네에 대답을 한다. 안 갈 것 같은 얼굴이다. 일단은 더 채근하지 않고 돌아섰다. 날이 매우 맑았다.
뺑소니 범을 잡았을 때, 그 남자에게 일곱 살 먹은 아들이 있었다. 아역배우라고 했다. 촬영이 바빠 사단을 냈다고 남자가 어머니에게 사정을 했었다.
나는 그 모든 과정에서 빠져 있고 싶었다. 어머니와 형사와 녀석의 아버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관심 두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자 했던 것 같다. 녀석은 경찰서 복도 의자에 앉아, 저 촬영가야 하는데 아빠 어디 있어요 하고 저를 붙잡고 물었다. 뭐가 뭔지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는 그 어린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원망조차 들질 않았다. 선배님, 저기 우리 아빠 어딨는지 알아요 하고 사회생활 좀 해봤다고 같잖게 선배님 선배님 하는 꼴이 웃겼다.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손에 컸다고 했나. 도리어 어쩌면 당분간 아버지도 못 보겠네 싶어 녀석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조금 했던 것 같다. 내가 할 생각이 아니었지만.
주저앉아 시선을 맞추고 뭐 하고 싶은 거 없냐, 물었더니 모르겠는데요 하고 동그란 눈을 하는 양이 퍽 귀엽기도 했다. 농구공을 빌려다 슛을 보여주고 드리블을 시켰다. 배우는 게 빠른 아이였다. 뭘 보여줘도 곧잘 해내는 모습이 뿌듯했다. 금세 배우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진종일 해가 지도록 녀석과 놀았다. 그게 녀석이 나를 찾아오기 전까지 우리 인연의 전부였다.
대학의 마지막 해다. 잘 나가는 놈들은 벌써부터 스카웃 제의다 면접이다 뭐다 해서 연습을 빼먹는 일이 잦았다. 카사마츠에게는 아직까지 스카웃 제의가 오지 않았다. 일찍부터 방향을 튼 모리야마는, 나 여고 체육 선생 할 거다. 하고 퍽 자랑스럽게 말했다. 의외로 성적 관리 열심히 하더니 교단 쪽으로 마음을 굳혔던 모양이다. 역시 최고는 여고생이지. 너 그러다 잡혀간다. 아니, 교육하기에 좋다는 소리야. 웃기네.
어쩌면 계속 이런 생활을 이어가는 건 제 욕심일 뿐일지도 몰랐다. 일 년에 나오는 무명 선수가 몇이고 그 무명 선수의 말로가 어떻고 하는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어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 고생이 부족한 건 아닌 거 같은데, 포기가 안 되는 것이 세상에는 있다. 카사마츠는 반 이상의 인원이 빠진 체육관을 둘러보았다. 한산한 라커룸이나 사람들에게 죄 하나씩 돌리고도 한참이 남은 농구공이 빈자리라는 걸 실감하게 한다. 정말 포기하는 게 맞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아니 집에 돌아간다 하더라도 어머니를 살피고 동생을 돌보다 보면 지금과 별 다르지 않은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 도저히 농구를, 제 가장 우선순위에 둘 수가 없었다. 어쨌건 어머니고 어쨌건 가족이다. 넌 조금 이기적으로 굴 필요가 있어. 코보리의 말처럼 집에서 나온 거면 아예 모든 것에서 관심을 떼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제 일만도 벅찬 주제에 무슨 오지랖,
...키세는.
오 년 만에 대뜸 그를 찾아와선 오래전부터 선배를 좋아했어요, 라고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사람 쉽게 좋아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일 거라고 대꾸했더니 그런 게 아니라고 했다. 중학생 때 하기 쉬운 착각이라고 했다. 전혀 아니라고 대꾸했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고 자고 싶은데 옆에서 앵앵대는 게 듣기 싫었다. 집에도 안 들이고 돌아가라며 쫓아냈다. 그랬더니 밤새 거기 웅크리고 있더라. 다음 날 훈련 가려고 새벽에 나왔더니 그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선 잠들어 있었다.
카사마츠는, 그 애가 비참한 꼴을 한 걸 보면 화가 난다. 지금도.
*
사람마다 각자가 감내해야 할 제 인생이라는 것이 있다. 카사마츠에게는 제 고집으로 팍팍하기만 한 현실을 살아 견뎌야 하는 것이고, 키세에게는 키세대로 녀석 나름의 인생이 펼쳐져 있겠지. 그러니까 사실은 카사마츠가 해야 할 일은 이 길 잃은 영혼을 제 인생의 궤도로 돌려보내주는 거였다. 인생의 선배로서, 한 성인 남자로서 방황하는 어린 아이를 제대로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맞는 거였다.
..저 멀리서 선배애애, 하고 손을 흔드는 밝은 금발을 바라보면서 카사마츠는 혀를 찬다.
같이 산 두 해 동안 카사마츠는 녀석의 무엇도 물은 적이 없었다. 잔소리를 해 봐야 학교 가야지, 부모님에게 연락정도는 드려라, 딱 그 정도. 처음에는 그런 걸 꼬치꼬치 캐묻는 게 어색했고 녀석의 팔뚝에서 푸르스름하게 멍 진 자욱을 발견하고 나서는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이후로는 그렇게 녀석과 더불어 사는 게 익숙해졌다. 두 사람 분의 식사를 준비하고 한 세트뿐인 제 담요를 양보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나오지 말라니까 또 죽어라고 말 안 듣지”
“안 들을 거 빤히 알면서 매일 잔소리하는 선배도 참 징해요”
선배님 소리가 영 이상해서 다르게 부르라고 했었다. 그랬더니 그럼 형? 형이라고 부를까요? 카사마츠 형? 하고 아주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불러 재끼더라. 더 닭살 돋는다고 버럭 성질을 냈다. 이번에는 그럼 뭐라 해요, 뭐 선배라고 부를까요? 했다. 야, 내가 왜 니 선배야 하려다가 형 소리 또 듣기가 민망해서 냅뒀다.
“나 은행 들렀다가 바로 아르바이트 갈 거야. 너 먼저 집 가라.”
“나도 같이 있으면 안 돼요?”
“되겠냐!”
“숨어있지 뭐, 뭐가 어렵다고.”
“추워. 들어 가.”
카사마츠는 통장정리기 앞에 서서 통장에 찍혀 나온 숫자들을 찬찬히 살핀다. 관리비가 얼마, 식비가 또 얼마. 다달이 동생 용돈으로 부쳐주는 돈이랑 단말기 할부금이랑 교통비를 제하면 이 돈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고민해도 답이 나올 것 같지가 않다. 통장을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쑤셔 넣고 옆에서 다른 기계로 장난을 치는 녀석의 손을 붙들고 나왔다.
해가 완전히 저문 겨울밤은 손가락이 아릴만큼 춥다. 빨갛게 언 녀석의 귓불이 영 신경이 쓰였다. 지나다가 고로케 가게에서 고로케를 한 아름 사서 녀석에게 안겼다. 제 머플러를 풀러 녀석의 목에 감쌌다. 녀석이 어색한지 둘둘 감긴 머플러를 얼핏 매만진다.
“들어가 있어. 일 끝나고 바로 갈 거니까 말 좀 듣고.”
“......”
“밥도 챙겨 먹고. 먹기 싫음 그거라도 먹고 있어”
나 참, 애 아빠가 된 기분이다. 첫사랑 같은 건 없었지만 어쨌든 첫사랑이랑 사고를 쳐도 저만한 아들은 없을 텐데. 저보다 한 뼘은 작은 그 녀석을 내려다보다가 푹 한숨을 쉬고,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음 사 갈게. 툭 말했다. 녀석은 당혹스런 얼굴로 고로케 봉지를 꼬옥 안고는 고개를 젓는다. 왠지 마음이 풀어져선 금방 갈테니까. 덧붙였다.
총총거리며 흐릿하게 멀어져 가는 밝은 금발을 가만히 서서보고 있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에 주홍색 가로등이 부딪혀 반짝반짝, 반짝반짝 빛이 난다. 연예인들 실제로 보면 후광이 난다던데. 익숙해져서인지 녀석에게서 그런 걸 느낀 적은 없다. 다만 때로 보고 있으면 굉장히 눈부실 때가 있다. 저절로 빛이 나는 것처럼 화사해 보일 때가 있다. 연예계라. 너무 먼 이야기라 감도 잡히질 않는다. 핏 좋은 값비싼 옷을 입고 멋진 얼굴을 하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그런 거? 팬하고 마주치면 사인도 해주고 사진도 같이 찍어주고 그런 건가. 어쩐지 마음이 답답해 중얼거렸다.
“저 녀석, 염색 할 때 됐네...”
*
최근 카사마츠는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나서 인터넷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대단한 건 아니고, 공인영어시험 용 기초 강의다. 눈 부셔서 키세 녀석이 못 잘까봐 일부러 구석에서 이어폰으로 듣는데도 키세는 카사마츠가 강의를 다 듣고 누울 때까지 잠들지 않았다. 아무리 피곤하고 졸려도 제 팔뚝을 꼬집어 가며 깨어 있었다. 자라고 해도 말을 들어먹을 녀석도 아니었다. 그리곤 뒤에서 뚫어져라 강의를 보는지 강의를 듣는 카사마츠를 보는지 꽁하게 앉아선, 이런 소리나 불퉁거리며 하는 것이다.
“그 선생님, 이쁘네요”
“수업을 내용으로 듣지 얼굴로 듣냐”
“쌍꺼풀 했고, 코도 좀 만졌네. 입술에는 그거. 보톡스 넣은 거 같고”
“이쁘면 됐지 뭘 그래”
“어릴 때부터 얼굴 만진 사람들 많이 봐서 척 보면 알아요. 얼굴에 손 많이 댔네”
얜 또 왜 이리 꼬였어.
“선생님이 이쁘던 말던 나는 그냥 유명하다고 해서 듣고 있을 뿐이라니까...”
카사마츠는 퍽 귀찮다는 투로 답했다. 다시 필기에 집중하려는데 녀석이 불쑥 묻는다.
“갑자기 무슨 영어에요?”
“무슨 일이 어떻게 있을지 모르니까 대비해 두는 거지”
미국이라도 가게요? 툴툴거리며 녀석이 물었다. 카사마츠는 대답하지 않고 강의에만 집중했다. 몇 번을 들어도 강의 내용을 따라가기는 벅차다. 한참 심각하고 진지하게 수업을 듣는데, 키세가 다가와 카사마츠에게서 마우스를 빼앗는다. 확 인상을 찌푸리며 카사마츠가 탁, 소리 나게 펜을 놓았다.
“왜 또 그러는데.”
“선배, 설마.... 설마 농구 안 할 거예요?”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게 있다면 제 약한 부분을 들켜 남에게서 그것을 듣게 되는 일이다. 비난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상대가 날 비난하기 위해서 꺼낸 말처럼 꼬아서 듣게 되어버린다. 특히 제 입장이 좋지 않고 불안할 때면 더더욱. 무섭고 방향을 몰라 길 잃은 것 같은 아득한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카사마츠는 되려 성이 났다. 비겁하고 치졸하게 녀석에게 분을 푸는 건 줄 알면서도 도리가 없이, 확 치밀어 오르듯이,
니가 그걸 알아서 뭐 할건데!
짜증을 확 낸 순간부터 후회했다. 녀석이 아, 실수했다 하는 표정을 하는 것부터 흐려진 눈을 애써 참는 저 얼빵한 얼굴 하며 어쩔 줄 모르고 마우스를 잡은 채 안절부절 못하는 그 엉거주춤한 자세까지, 단숨에 사진을 찍듯 제 머리 속으로 전달되면서 아 잘못 밟았다 싶었다. 잘 참다가 왜 하필,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타이밍에. 속으로 자신을 잡도리하면서도 도통 녀석한테 상냥한 말 한 마디 건넬 줄을 몰랐다. 카사마츠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벅벅 머리를 긁고는, 야 자자. 딱 한 마디 건넸다. 이 어색한 공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무뚝뚝하게 노트북을 끄고 조금 더 용기를 내서, 불 끈다. 다시 말을 건넸다. 녀석은 아무 말이 없다. 삐졌나 싶어 엄청 신경은 쓰이는데 뭐라고 말을 다시 꺼내야 하는지 영 아는 바가 없다. 등 돌려 아무렇게나 누웠다. 잠이 올 리가, 없다...
녀석은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사랑하고 있다고. 평생 이런 감정을 가진 이는 선배가 유일하다고 했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녀석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해 본 일이 없었다. 어린 시절의 치기어린 첫사랑조차 겪어보질 못했다. 줄곧 의심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나 있을까? 이렇게 파삭파삭한 인간이 되어선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끼고, 보듬어 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애초부터 없었던 건 아닐까. 혹시 있었다고 해도, 여유 없이 살아오면서 그 능력을 모두 잃어버린 건 아닐까.
카사마츠는 그 밤 내내 잠을 설쳤다. 저 꼬맹이 삐진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깔깔하게 거치적거리는 것도 짜증스러웠고 답지 않게 녀석한테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쏟아 부은 자신에게도 짜증이 났다. 다 짜증스러웠다. 와중에도 세 시간도 채 못 자고 새벽 훈련을 가야 하는 제 일과에도 짜증이 났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늘따라 정신교육을 빙자한 잔소리를 한 시간 넘도록 하는 코치에게도 짜증이 났다. 이쯤 되니 본인이 짜증이 나는 게 아니라 세상만사가 본인에게 시비를 털고 짜증을 내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여! 밥 먹자 하고 제 어깨를 뒤에서 잡아 온 모리야마에게 놀랐지 않느냐고 짜증을 번쩍 냈을 정도였다. 너 생리하냐? 모리야마 녀석이 딱 녀석 다운 말을 늘어놓았고 머리끝까지 짜증이 오른 카사마츠는 대답했다. 그래! 이틀째거든 어쩔래!
아르바이트를 가서도 뭘 해도 녀석의 그 흐려지던 눈동자가 잊히질 않았다. 사내자식이 성 좀 냈다고 그게 뭐냔 말이다. 하여튼 요즘 애들은 마음이 약해 빠져가지고는 아주 큰일이다. 집중이 되지 않아 실수를 연달아서 했다. 사장님이 요즘 피곤하지, 하고 조금 더 쳐줄 테니 내일은 좀 쉬라고 따뜻한 목소리로 카사마츠의 등을 퍽퍽 쳤다. 제 자신이 점점 못난 기분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같았다. 화났겠지. 많이 났을까? 하지만 본인이 좀 짜증스럽게 군 것 정도는 자각해 주지 않으려나. 사람들에겐 각자 건드려선 안 될 부분이라는 게 있고 녀석도 그걸 건드린 셈이니까... 까지 생각해 봐야 자꾸 제 자신이 못났을 뿐이다. 일부러 지름길을 놔두고 빙 돌아서 걸었다. 목적도 없이 편의점에 들렀다. 괜히 이곳저곳 일없이 가판대를 구경하다가 염색약 앞에서 멈춰 섰다. 헤어 틴트라는 녀석부터 평범한 염색약조차도 색깔이 수십 종류다. 카사마츠는 또 난관에 봉착한다. 대체 요즘은 뭐 이리 간단한 것도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어 놓는단 말인가.
한참을 고민했다. 애써 녀석의 머리카락 색을 떠올려 본다. 노란 색. 밤거리에서 가로등 불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던 색. 꿀처럼 샛노란 색. 봄철 개나리처럼 해사한, 햇살의 색. 결국 가장 밝은 색을 골라들고 계산을 했다. 어쩐지 마음이 흡족했다.
집에 반쯤 도착해 가는데 차가운 무언가가 이마에 닿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었다. 찔끔찔끔 감질나게 오는 눈이 아니라 아주 작정하고 오는 함박눈이었다. 하얗고 포근한 눈이 하얀 이불처럼 거리에 쌓인다. 내일 아침이면 그대로 얼어붙어 고생스럽겠지만, 눈은 확실히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드는 구석이 있다. 마음이 누그러든다. 집에 돌아가서, 일단 녀석을 보고 사과부터 해야지. 그냥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었다 너한테 화가 났던 것이 아니다 말을 해야지. 지금은 괜찮다고, 반짝반짝한 그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을 해 줘야지...
집 앞 길목은 가로등이 딱 하나 뿐이다. 외진 골목의 가로등이 길게 한 사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빨간 우산을 들고 손을 호호 불며 서 있는 그 사람은 녀석이었다. 반짝반짝. 우산이 기울어질 적마다 주홍색 가로등 불빛을 받아 반짝반짝, 별처럼 빛이 난다. 사박사박, 눈 오는 소리와 반짝이는 소년과, 유난히 어둡고 외로운 겨울 밤. 왜인지 녀석이 아주 머나먼 세상의 사람 같다. 카사마츠는 저벅저벅 걸어 녀석의 앞에 섰다. 그제야 그를 발견한 녀석이 멋쩍게 웃으며, 눈이 와서요. 하고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한다. 추워서 창백한 하얀 얼굴이, 우산을 붙잡은 마른 손이, 제 낡은 후드를 뒤집어 쓴 어린 몸이, 카사마츠의 눈으로 폭사되는 것처럼. 주변이 모두 하얗고 부옇게 흐려진다. 카사마츠는 정지된 것처럼 멈추어 섰다.
“저, 있잖아요 선배.... 앞으로는 선배 공부하는데 방해 안 할게요.”
“.....”
키세가 다가와 카사마츠의 위에 부랴부랴 우산을 씌운다. 그의 머리카락이며 어깨 위로 쌓인 눈을 털어 내는 손길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녀석은 계속 말했다.
“선배 힘든데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하지도 않을게요.”
“그래.”
“선배한테 짜증도 안 부리고, 성질도 안 내고, 또....”
“그래.”
“밥도 잘 챙겨 먹고, 일어나랄 때 일어나서 아침도 먹고, 아. 설거지도 내가 할게요. 선배 그냥 가도 돼요”
“그래.”
“학교도 다시 가고 공부도 할게.”
“그래.”
키세는 준비해둔 것처럼 말을 쏟아 내면서 말하는 내내 카사마츠의 눈치를 살폈다. 집이 가깝다. 선배.... 그러니까 있잖아요..... 녀석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우물쭈물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카사마츠는 말없이 문고리를 잡았다. 실내로 들어오자 훈훈한 온기가 확 끼쳐 온다. 점퍼를 벗어 걸었다. 눈치를 살피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다짐했던 말이 한 마디도 나오지를 않는다. 어색해서, 곧장 샤워를 하러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제야 숨이 트이는 기분이다.
샤워를 마치고 나올 그를 기다린 건지 키세는 이부자리를 편 채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불 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키세가 정돈해 둔 그의 자리에 몸을 뉘였다. 그때까지도 녀석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내내 생각했다. 머리가 복잡하다. 아까, 그의 눈을 산란하게 했던 녀석의 이미지가 자꾸만 상념 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이불이 들춰진다 싶었더니 등에 따뜻하고 까슬까슬한 머리카락이 닿는다. 키세가 웅크리고 모로 누운 카사마츠의 등 뒤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뱉는 숨이 등줄기에 닿는다. 이상한 감각이다. 녀석은 거의 카사마츠의 등에 얼굴을 묻다시피 한다. 키세가 말했다.
“있잖아요....... 선배....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요...... 버리지 마요.......”
선배가 좋아요. 나한테 선배 같은 사람은 선배밖에 없는데....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오던 그 날의 녀석이 떠오르는 건 또 왜인지.
“....버리지 마요....”
사랑이라. 그 말이 대체 어떤 의미인지 알고나 있는 걸까.
키세는 웅얼웅얼 그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 좋아해요 나 버리지 마요 하고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창밖으로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우웅 하고 돌아가는 보일러 소리. 녀석이 속닥거리는 반쯤 훌쩍이는 목소리. 깊은 겨울밤의 적막한 소리....
카사마츠는 한숨을 푹 쉰 뒤, 어떤 결심을 한 것처럼 돌아누웠다. 녀석이 화들짝 놀라는 게 이불을 통해 느껴졌다. 가만가만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에 손을 댔다. 퍽 무심한 동작으로 그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녀석은 떨고 있다. 몸은 컸어도 아직 한참 아이다. 어리고 바보 같고 맹목적이고.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머리 많이 길었더라.”
“......”
“내일 염색하자”
*
아침나절 내내 녀석과 씨름을 했다. 사온 염색약을 꺼내 놓았더니 녀석이 나 이거 할 줄 몰라요, 하더라. 카사마츠도 염색 같은 걸 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아침을 해치우자마자 녀석과 머리를 맞대고 설명서를 읽었다. 딱 세 줄 넘어가면서부터 녀석은 흥미를 잃고 딴청을 피웠다. 카사마츠 홀로 고집스레 설명서를 독파한 결과, 의욕 없는 녀석이 아니라 그나마 사용법을 글로 배운 카사마츠가 염색을 해 주게 되었다. 염색약을 바르면서도 녀석은 연신, 이거 아닌 거 같은데. 선배 제대로 읽은 거 맞아요? 나 머리카락 엉망 되면 어떡하지 하고 종알종알 시끄럽게 굴었다.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누르며 카사마츠는 침착하게 녀석의 정강이를 콱 차고, 그럼 니가 하던가! 했다. 금세 조용해졌나 싶더니 삼 분을 못 가고 또 종알종알 떠들어 댄다.
“나 머리 폭탄 되면 선배가 책임져요”
“이거 염색약이거든? 파마약 아니야”
“알 게 뭐야. 선배 해 본 적 없죠?”
“하는 법은 알잖아”
“모두가 그렇게 착각하죠”
“모두가 그렇게 시작하지”
“아 진짜! 나 미용실에서밖에 해본 적 없는데!”
“궁하면 통하게 되어 있는 거야”
모리야마 카더라 통신에 사람이 가장 못나 보일 때는 머리할 때라던가. 카사마츠는 그것조차 케바케(케이스 바이 케이스)요 머완얼(머리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파마하는 아주머니들이나 쓸 법한 마젠타 색 비닐 캡을 씌워 놨는데도 그다지 보기 꺼림칙하지 않은 축복받은 얼굴이라니. 도리어 이 녀석이 쓰고 있으니 무슨 귀여운 패션 아이템처럼 어울리는 것이다.
괜히 심술이 나서 이것저것 녀석의 머리를 가지고 장난도 쳐 봤지만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머리에 뿔을 달아 봐도 마구 꼬아 놓아도 장난을 좋아하는 미소년으로밖엔 보이질 않는다. 죽어라 이케맨, 하고 녀석의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겼더니, 땜빵 있는 미소년이라니 말도 안됨다! 하면서 울상이다. 재수라고는 싹퉁머리도 없는 놈 같으니. 잠시나마 귀엽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다. 카사마츠는 설명서에 따르면 그 상태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말아야 한대, 하고 조금 심술궂은 장난을 쳤다. 몇 분이나요? 한..... 이십 분쯤?
애 놀려먹는 일이 이렇게 재밌는 줄 몰랐다. 카사마츠가 그거 조금이라도 기울어지면 그쪽은 엄청 심하게 탈색된다더라, 울긋불긋하게 염색된대 따위의 거짓말을 늘어놓았으므로, 키세는 고개를 쭉 펴고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키세 얼음’ 상태였다. 카사마츠는 그런 키세의 옆에 앉아 팔락팔락 문제집을 넘기는 중이었고.
“선배애애.... 이거 이제 다 된 거 같지 않아요?”
“글쎄. 충분히 기다리라던데. 안 기다리면 이상한 색이 되겠지만 뭐 그렇게 힘들다면야,”
“아녀... 그런건 아닌데여.... 그게 아니고.....”
“아님 기다려.”
기다려. 무슨 강아지한테 하는 소리 같다. 카사마츠는 애써 웃음을 참았다.
염색약을 씻어내는 것도 한참이 걸렸다. 녀석은 귀에 물이 들어가네 코에 물이 들어가네 비눗물이 맵네 어쩌네 쉴 새 없이 잔소리를 해 댔다. 중간쯤엔 때려치울까 말까 고민도 많이 했는데, 헹구어 놓고 머리를 말려주다 보니 머리가 바짝 이쁘게 물이 들었다. 단 한 번도 머리 염색을 좋아한 적이 없는데도 녀석의 반짝반짝한 금발은 이쁘게 염색 잘 됐네 싶은 것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성취감 비슷한 느낌이 든다. 아니 말도 안 돼. 알바를 그렇게 뛰더니 노예근성이라도 생겼나 나. 카사마츠는 공연히 키세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너 머리 잘못 감아서 베개에 노랗게 물들여 놓기만 해봐!”
*
일하는 중에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동생이었다. 엄마한테 전화 진짜 안 할거야? 단숨에 숨이 턱 막혔다. 잊고 있던, 굉장히 하기 싫은 과제를 마감 전 날 발견한 느낌이다.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미루기만 하다 집에 다 도착할 때까지도 성공하지 못했다. 재촉하듯이, 문자가 한 통 더 온다. 엄마가 많이 보고 싶어 하셔. 아, 이건 도저히 거역할 수가 없는 명령이다.
실상 보러 가야 한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새해도 멀지 않았으니 이 말은 연락하라는 의미라기보다는 가끔은 집에도 얼굴 좀 디밀어라, 그 소리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머리가 아프다.
집에서 나올 적에는 떨어져 살면 어머니를 대하는 일이 더 힘들지 않아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거리를 두고, 먼발치에서 어머니의 소식을 들으면 온전히 안쓰럽게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다른 거 없이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틀렸다. 지금에 와서도 그는 어머니를 만나는 일이 무섭고 어머니를 마주하는 것이 어렵다. 도무지 하고 싶지가 않다. 생각해보면 그저 어머니를 피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도망치고 싶은 치기어린 마음을 애써 그럴듯한 옷을 입혀 덮어 둔 것이다.
집은 지척이다. 계단에 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그 반짝이는 금발이 눈에 에일 듯이 들어온다. 다른 생각은 전혀 하고 싶지가 않다. 내일 새벽 훈련도, 야간 알바도 혹은 불투명한 제 미래나 아픈 가정사 모든 것을 모조리 미뤄 두고 싶다. 당장 녀석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 버리고만 싶다. 또 바보 같이 차갑게 곱았을 저 손을 붙잡고,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고, 잔소리를 하고 늦은 저녁을 하고 싶었다. 몇 마디 부질없는 잡담을 하다가 잠들고 싶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녀석과 함께 사는 그 집,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진다. 잠시 멈추어 섰다가, 녀석이 알아채기 전에 카사마츠는 집을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골목 저 끝을 ㄱ자로 돌아들어 숨듯이 섰다. 무슨 힘겨운 일이라도 하는 듯이 휴대폰을 쥔다.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쥐었다. 버거운 책임을 다하는 것처럼 익숙한 전화번호를 눌렀다. 서너 번의 벨소리가 울린다. 그 와중에도 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서른 번은 교차한다.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가 여보세요, 하고 힘없이 전화를 받는다.
...엄마. 나에요. 밥은? 왜 또. 챙겨먹으라 그랬지. 동생이 안 챙겨요?
자박자박, 얼어붙은 눈을 밟는 소리가 카사마츠가 숨은, 골목 담장을 끼고 너 댓 걸음 앞까지 다가와 멈춘다. 나지막한 숨소리. 벽에 기대어 선 그림자.
건강 생각 해야지. 병원은? 왜 또. 저번에 나한테 다리 아프다고 그랬잖아요. 내일은 꼭 가요. 아, 병원비. 그거.... 내가 저번에 보낸 건?
어쩌면 어리광을 부린 건 제 쪽일지도 모르겠다고, 카사마츠는 생각한다. 익숙한 그림자를 내려다보면서, 어쩌면 내가 녀석에게 위로받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저를 사랑한다는 너에게서 어떤 위안을 찾았던 것은 아닐까고. 녀석은 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전부터 저 같은 사람은 선배밖에 없었다고, 선배뿐이라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상 네가 나밖에 없다고 말했던 것처럼 내게도 너밖에는 없었다. 나를 걱정해 주고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너 뿐이었다. 생활에 지쳐 쓰러지고 싶을 때 내 곁에 있었던 것은 오로지 너 뿐이었다. 나 때문에 울어주는 사람도 내 손을 잡아주던 사람도 너였다. 그게 좋아서..... 그게 나는 정말 좋아서.
목소리가 떨어 나왔다. 카사마츠는 잠긴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일 조금 더 보낼 테니까, 병원 가 봐요. ....응. 가야지 가야지 하는데 영 시간이 안 나네. 조만간 들릴게요. ..건강하세요. 끊을게요.
벽에 기대어 섰다. 그림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마주 서지도 않고,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선 줄을 알면서 둘은 그냥 그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고개를 들면, 새까만 겨울 하늘에 휘영청 밝은 달이 떠 있다. 반짝반짝한 노란 색이 아주 고왔다.
오래도록 서서 달을 보았다. 곁에 선 누군가에게 전화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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