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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쿠로바스

[청빙(아오히무)] 청빙을 연애시키고 싶습니다 4

 

 

화면에 KO라는 빨간 글씨가 뜸과 동시에 아오미네는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뱉었다. 아니 이게 대체 몇 번째야? 컨트롤러를 쥔 양손에 힘이 절로 빠졌다. 소파 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있던 몸을 뒤집어 남자를 돌아보았다. 굉장히 어처구니없는 기분이었다. 편한 자세로 소파 위에 앉아 대충 쿠션에 기대어 있던 남자는 왜 그러냐는 얼굴로 웃을 따름이었다.

해본 적 없다며.”

. 처음인데.”

내리 다섯 판을 이겨놓고서 지금 그런 말이 나와?”

남자의 발치에 앉아 물끄러미 올려다본 그가 오늘따라 평소의 열배쯤 성격 나빠 보였다. 편한 홈웨어를 입고 한쪽 무릎을 올린 채 컨트롤러를 흔들흔들 쥐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집구석 백수 같았다. 아오미네는 턱을 괴고 물었다.

다른 건 다 못하면서 격투게임만 사정없이 마구 이기는 이유가 대체 뭐야? 무슨 초심자가 한 판을 안내줘.”

, 역시 네 실력의 문제 아닐까?”

히무로는 온화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듣던 중 개소리를 다 듣겠다며 아오미네는 한쪽 눈썹을 모로 휘며 말했다.

내가 이걸 썩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처음 해본다는 사람한테 질 정도는 아니거든?”

졌잖아 지금.”

그러니까 말이 안 된다는 거지. 이건 분명 뭔가 있어. 바른대로 말해 봐. 실전으로 다져진 실력이라던가? 학교 다닐 때 이름 좀 날린 거 아냐?”

별로?”

아 지금 살짝 눈동자 흔들렸어. 그냥저냥 이름만 날린 정도가 아니었나본데? 본격적이었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은근하게 자신을 찔러대는 아오미네의 어깨를 발로 밀어내며 히무로는 컨트롤러를 내려놓았다. 이미 식어서 훌훌 들이켜도 될 커피를 한 모금 머금는 사이 아오미네는 소파에 뺨을 붙인 채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차이 좀 나는 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어 그는 아오미네의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어린애 취급하는 걸 알았는지 발끈하면서도 또 손길은 거부하지 않는다. 이젠 그런 게 익숙했다.

우리학교 미션스쿨이었어. 아침 미사 시간마다 복장단속도 할 정도였는데 본격적으로 할 게 어디 있었겠어.”

고등학교? 아키타에서 다녔다고 했지?”

.”

왜 하필 아키타였어? 가족들 다 미국에 있었다며. 다른 데도 갈 곳은 많았던 거 아냐?”

아오미네는 손을 뻗어서 히무로가 마시던 커피 잔을 받아 호로록 마셨다. 역시 써, 하고 얼굴을 찌푸리는 폼이 이전하고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어서 히무로는 쿡쿡 웃었다. 녀석에게서 다시 커피 잔을 받아들며 히무로가 말했다.

그냥 그 정도가 적당하다, 싶었어.”

무슨 기준이야? 그거

마음의 거리 같은 거? 도저히 갈 수 없을 정도로 멀지도 않고, 그렇다고 절대 가깝지도 않고.”

히무로는 애써 괜찮은 표정을 만들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자연스럽게 아오미네에게서 받아든 커피를 두어 모금 마신다. 녀석을 대하는 것이 이전보다 편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던 속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을 수 있다는 점이 그랬다. 이미 제 바닥을 들켰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저열한 밑바탕을 보고도 자신이 좋다던 말의 마력 때문일까. 최근 계속 생각하는 것이지만 아오미네는 확실히 신기한 구석이 있다.

그렇게 말하는 거 치고는 꽤 멀리까지 도망갔네. 한 육백 킬로 쯤?”

그땐 나도 어려서마음 제대로 크게 먹으면 못 갈 거리는 아니잖아. 최대한 멀리 떨어지자고 생각하면서 고른 곳인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그럴 거면 더 멀리 가버리지, 싶긴 하더라. 아예 그냥 미국에 계속 있을 걸 싶기도 하고.”

히무로는 말을 마치며 녀석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마구 헝클어뜨려 놓았다. 짧은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삐죽삐죽 섰다. 아오미네는 고개만 흔들어서 머리카락을 정리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짧고 뻣뻣한 머리는 뜻대로 되질 않는다. 결국 삐죽삐죽 솟아오른 머리를 정리하는 걸 포기하는 남자애 특유의 게으름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수라도 하는 폼으로 소파 위로 올라온 아오미네가 팔을 뻗자 히무로가 킥킥대며 몸을 피했다. 아오미네보다는 조금 긴 머리카락이 히무로의 눈가로 흐트러진다. 아오미네는 흐트러진 히무로의 머리카락을 잡아 만지작대며 물었다.

아키타는 좋았어?”

비슷했지 뭐. 대체로는 재밌고 즐겁고. 가끔은 화도 나고 짜증도 나고 그랬지. , 겨울은 진짜 충격적이었어. 어떻게 눈이 그렇게 오지 싶더라.”

거기가 원래 악명 높긴 하지. 하늘에서 버리는 쓰레기라고.”

삭막하기는. 말하고 보니 정말 오래 됐네. 금방 다시 갈 수 있을 거 같았는데.”

히무로가 생각에 잠긴다. 추억이라도 생각해 내는 듯 한 평온한 얼굴이었지만 입 밖으로 내는 내용은 영 얼굴과는 딴판이었다.

뚫어놨던 담배 가게는 안 걸렸나 모르겠네. 거기 너무 대중없이 막 팔던데. 원예부 화단 뒤에서 몰래 담배피우는 애들 많아서 불나기도 했었는데 거긴 여전하려나.”

양아치.”

본인도 그다지 모범생은 아닌 것 같은데 새삼스럽긴.”

그래도 담배는 안 피워.”

의외로 그런 면에서는 철저하네?”

당연하지. 농구 할 거니까.”

히무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가, 아오미네가 알아채기도 전에 원래 그랬던 것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아주 순식간의 일이라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아오미네로서는 눈치 채지 못했을 터였다. 히무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벼운 어투로, 빈말처럼 말했다.

그립네옛날 생각난다.”

흐응.”

아오미네는 콧방귀를 뀌며 히무로의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데 집중하는 듯 보였다. 타인의 손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느낌이 간지러우면서도 좋았다. 의외로 남의 손 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것도 녀석을 만나면서부터였다. 히무로는 양지바른 곳에 몸을 누인 고양이가 된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그럼 나랑 같이 겨울에 가던가.”

어디를?”

아키타 얘기하고 있었잖아?”

관심을 끈 줄 알았는데 여태껏 생각하고 있던 모양인지 아오미네는 불쑥 그렇게 말했다. 남의 말 하나도 안 듣는 타입인 게 분명한데도 녀석은 이따금씩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들을 때가 있었다.

가볍게 스치듯 한 이야기든 혹은 진지하게 했던 이야기든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문득문득 나오는 녀석의 그런 모습들도 싫지 않았다. 히무로는 녀석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아오미네가 제 옆자리를 차지한 뒤부터 알게 된 게 많았다. 스무 해가 넘도록 겪어온 스스로에게서 자꾸만 낯선 모습을 발견하는 게 재밌었다.

그맘때쯤은 너 한창 바빠야 하는 거 아니야? 수험은 어쩌고.”

나 벌써 학교 정해졌는데?”

?”

히무로는 반쯤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되물었다. 아오미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스포츠 추천으로 진학하기로 했어. 오라는 데 많아서 골라서 들어갈 정도였는데 그쪽 나한테 정말로 관심 없었구나. 나 의외로 잘나가.”

?”

우리 학교 인터하이도 우승했는데 전혀 몰랐어?”

. 그 안 어울리는 교복.”

중얼거리자 아오미네가 뭔가를 떠올렸는지 인상을 썼다. 그리고 기껏 정리해놓은 히무로의 머리를 죄다 헝클어뜨리며 불퉁하니 투정을 부렸다.

아 진짜! 그 이후로 하얀 옷 입을 때마다 엄청 신경 쓰인다고.”

오늘 입은 건, 파란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회색 티셔츠였다. 히무로는 작게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 녀석이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그렇게 소리쳤지만 그 얘기에 더더욱 웃음이 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녀석과는 어느 정도 편하고 생각보다 좋았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로움은 녀석에게서 묻어져 나온 것이었다. 안정을 선물처럼 가득 품에 안고서 저에게로 온 아오미네를 지금은 잃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문득 마음을 가르는 날카로운 불안감을 히무로는 무시해버렸다. 석연치 않은 작은 바늘이 꽂히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제 겨우 진물이 멎은 상처를 헤집고 싶지 않았다.

나른한 오후의 일광욕 같은 시간들을 버리기엔 그는 너무 무너져있었다.

 

-

 

시간은 안온하게 흘러갔다.

이처럼 평온한 나날을 보낸 것이 언제였는지 히무로는 기억조차 할 수가 없었다. 녀석은 재주 없고 요령 없는 평범한 남자아이였지만 녀석과 함께하는 시간은 스스로도 신기할 만큼 그를 치료해 주고 있다, 고 히무로는 생각했다. 녀석의 반짝반짝함이 사랑스러웠고 녀석의 순진함이 부러웠다. 빛나는 청춘이라는 말을 녀석에게 대입할 것은 아니지만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파릇파릇한 십대 이십대들을 바라보며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음악 들어?”

눈을 감은 채 이어폰을 꽂고 반쯤 졸고 있는 녀석의 한 쪽 이어폰을 잡아당기며 히무로가 물었다. 언뜻 보면 사나운 뒷골목 어깨 같은 그 얼굴이 부스스 눈을 뜨며, 왔어 하고 눈을 비볐다.

그냥 이것저것.”

대답하며 눈가를 찌푸리는 양이 푹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히무로는 자연스레 그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물었다.

요즘 자주 조네. 많이 피곤해?”

특별 훈련이라나. 아카시 녀석이 연습량을 배로 늘렸거든. 덕분에 아무리 자도 피곤해.”

꽤 열심인 모양이네.”

딱히 밖으로 돌아다니는 성격이 아니다. 아오미네는 이따금 밖에서 데이트 비슷한 걸 해 보고도 싶은 모양이었지만 히무로는 부러 모른 척했다. 눈에 보일 정도로 그 주제에 대해서는 말을 돌리고 대답을 피해서, 아오미네도 히무로가 내켜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게다가 최근의 특훈까지 겹쳐 바빠지자 같이 무얼 하자거나 어디를 가자는 말은 쏙 들어간 터였다.

내일도 연습이라며. 피곤하면 일찍 들어가서 자지 그래?”

누구 좋으라고?”

들켰네.”

히무로는 낮게 웃었다. 의미 없는 대화가 몇 마디 더 이어지다 멈춘다.

녀석과 보내는 시간들은 확실히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는 힘이 있었지만 그래서 무서운 데가 있었다. 히무로는 이따금 그의 마음을 헤집어놓는 찜찜한 불안감에서 눈을 돌리고자 노력했다. 정체도 모르고 원인도 모르는 순간들을 완전히 극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녀석이 없을 때, 그의 마음을 좀먹는 이름 모를 불안감과 마주칠 때마다 히무로는 손도 써 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씁쓸한 무력감을 느껴야만 했다.

히무로는 손에 든 채인 이어폰을 제 한쪽 귀에 꽂았다. 히무로가 하는 양을 흘끗 본 아오미네가 볼륨을 조금 높인다. 짐작으로는 헤비메탈이나 락 종류 아니겠거니 싶었는데, 정작 들려오는 것은 아주 달콤한 발라드 장르다. 감성적인 가사며 달달한 멜로디가 귓가를 간질였다.

의외네?”

당신 말이야. 의외로 편견 심한 거 알아?”

솔직히 너도 내 반응 정도는 예상했잖아. 이런 이야기 자주 듣지 않아?”

저기요나는 당신과 달리 섬세한 영혼이라서 곧 죽을 것 같은 데스메탈 같은 건 안 듣거든?”

곧 죽을 거 같다니. 단번에 스트레스를 다 날려줄 것 같은 파워풀함이 매력적인 장르지

히무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뻔뻔하게 대답하고 음악을 감상하며 눈을 감았다. 처음 녀석이 제 집에 있는 음반들을 골라 듣다 기겁하던 때가 기억이 났다.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블랙 새바스 같은, 이름만 던지면 바로 알 법한 헤비메탈의 저명인사들의 CD 컬렉션을 보고 녀석이 기가 차다는 듯이 당신 얼굴하고는 정말 딴판이라며 신음했었지. 그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났다.

아오미네와 머리를 맞대고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R&B나 발라드 따위에 귀를 기울이며 히무로와 아오미네는 몇 마디 실없는 소리를 한참 떠들었다. 달착지근한 가사들이 귀에 엉겨 붙는 것 같다. 평상시 즐겨 듣던 락 음악과는 다른 느낌에 히무로는 아오미네의 어깨에 기대어 귀를 기울였다. 말이 느려진다 싶다가 어느 순간 아오미네의 투덜대는 목소리가 잦아든다. 히무로는 몸을 빼내거나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기대어 녀석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런 시간이 자신에게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른함에 사고가 점점 느려지다가, 몽롱해지다가, 멈추었다. 잠든 히무로의 입꼬리가 와중에도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아오미네와 같이 있으면 히무로는 스스로가 놀라우리만치 평범해 진다는 걸 느꼈다. 조금도 특별하거나 새롭지 않은 일상 속에서 그는 자연스레 평범한 척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었다. 위화감은 들지 않았다.

정말이지 특별할건 하나도 없는 일상들뿐이었다.

함께 소파에서 졸다가 일어나, 고픈 배를 문지르며 함께 집 근처 편의점까지 걸어가 진열된 도시락을 보지도 않고 쓸어 담아온다던가 하는.

그들은 식탁에 2인분이 훌쩍 넘는 음식들을 전부 늘어놓고 한입씩 집어먹으며 킬킬거렸다. 서로 마지막 초밥을 먹겠다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였고, 개중 가장 맛없었던 장어덮밥을 상대방의 입에 밀어 넣어주기 바빴다. 데우지도 않은 식어빠진 편의점 도시락들을 앞에 두고도 고급 음식점에서 포장해온 마냥 맛있게 먹었다.

훈제 연어를 잘게 부숴 밥알과 섞으며 아오미네는 주변 친구들의 아이스크림취향 따위를 얘기했고, 히무로는 삼각 김밥 포장을 깔끔하게 분리시키며 평소에 즐겨 마시는 음료 이름 같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시시껄렁하고 의미 없는 가벼운 대화와 차가운 도시락 그리고 페트병 째로 꺼내진 생수가 식탁 위를 돌아다녔다.

한입만 남은 도시락과 절반만 비워진 음료, 귀퉁이만 깨문 삼각 김밥들을 어지럽게 남겨두고 두 사람은 쓰레기를 치울 정신도 없이 또 다시 소파에 늘어져 잠이 들었으며, 아오미네는 다음날 아침연습에 지각했다.

녀석은 아침이 되어 잔뜩 잠긴 목소리로 하는 잘 다녀오라는 배웅을 좋아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죽을 만큼 느리게 깜빡거리면서 현관문 앞까지 기어 나와야하는 평소와 다른 아침도,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늦은 새벽 슬리퍼를 편하게 끌고 하는 공원 산책도, 자꾸만 집에 늘어가는 타인의 소지품들도 아무런 무리 없이 인생에 스며들어왔다.

녀석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늘어날수록, 녀석과 함께 있는 시간이 당연해질수록 이 순간이 아주 오래오래 지속될 거라는 허망한 기대를 히무로는 품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치유 받고 위로 받으면서 아주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도 답지 않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파고드는 막연한 기대를 내치기가 힘들었다. 어릴 적 카가미를 만났던 때부터 지금껏 줄곧 바라 온 순간이었으니까.

 

-

 

사귀는 사이 비슷한 관계가 되고서 처음 싸웠던 것은 초겨울의 일이었다. 사실 불씨는 여기저기 있었다. 관계가 오래될수록, 아오미네는 히무로에 대해서 더 많이, 누구보다 더 깊게 알고자 했고 히무로는 히무로대로 자신을 내보이지 않으려 애를 썼다. 히무로는 평범한 연인인 양 굴다가도 문득 아주 얕은 곳에 묻어 두었던 제 모습을 건드릴 때면 겁먹은 아이처럼 뒷걸음질을 쳤다.

아오미네는 히무로의 물러섬을 이해하지 못했다. 좋아하니까, 나도 너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으니까 하는 히무로의 진심을 자신에게 더 내어주지 않으려는 섭섭함으로 받아들인 일도 많았다. 시작이 본인의 강권이었으므로, 아오미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힘겹게 다가갔나 싶으면 저만치 멀어져 버리는 히무로의 행동에 시시각각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기실 아오미네는 아주 편한 사이처럼 보이는 지금에 와서도 불안했다. 자신이 히무로를 언제까지 붙잡아둘 수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었고 카가미에 대해 느꼈던 어쩔 수 없는 열등감은 그를 비참하게 했다. 처음 느껴보는 불안감에 아오미네는 히무로와 있는 시간이 행복하고, 즐겁고, 소중했지만 그만큼 뒤채이고 있었다. 히무로에게는 농구 연습이 늘었다고 둘러댔지만, 실상은 아오미네가 홀로 코트에 남아 카가미가 하던 기술들을 연습하는 날이 많아졌던 것이었다. 남자가 하던 메테오 잼, 따라할 수 없을 것 같은 가공할 점프력, 단숨에 뛰어올라 마치 허공을 걷는 것 같은 에어 워크.

남자만큼 농구를 잘 하게 되면, 남자 같은 대 스타가 되면, 내가 카가미가 될 수 있다면저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도록 허락받을 수 있을까. 계속 곁을 얼쩡거려도 괜찮다고 용납될 수 있을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나이보다도 오랜 세월을 함께 한 그들의 지난날이 억울했고 그래서 히무로에 대해 카가미가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 억울했다. 도저히 초월할 수 없는 나이차라던가 카가미가 모두 가져가 버렸다는 히무로의 마음이 죄다 너무 억울해 농구공을 들고 있으면 이유도 없이 분통이 터졌다.

어린 시절부터 눈만 뜨면 껴안고 있던 농구공이 문득 무겁다는 생각을 했다. 그저 즐거워서, 농구가 좋아서 농구를 했던 시절에는 결코 알지 못하던 감정이다. 아오미네는 꽤 강팀이라는 옆 학교와의 연습게임 도중인데도 도저히 시합에 집중이 되지 않는 것을 느꼈다. 벌써 삼십 점을 넘게 땄고, 다른 팀원들도 경기를 잘 이끌어 흥미진진하게 이기고 있는 시합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긴장이 풀리고 맥이 풀려 나른한 기분이 든다. 형태도 채 갖추지 못한 잡생각들이 머리 위를 둥둥 떠다녔고, 아오미네는 사츠키가 일러 준 전략이나 미리 테츠야와 이야기해 두었던 연계 플레이 따위를 모두 무시한 채 내키는 대로 공을 던지고 슛을 넣었다.

건성인 플레이에도 아오미네를 막지 못하는 상대 팀 선수들이 경악하는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오미네는 정신을 다른 곳에다 팔아먹은 채, 공을 빼앗고 달리고 슛을 넣는 것을 반복했다. 아무도, 심지어 같은 팀인 아카시마저도 그의 플레이를 어쩌지 못했다. 미도리마는 고개를 저었고 무라사키바라는 재미없다는 표정을 했다. 키세는 벤치에 앉아 질린다는 표정으로 아오미네의 플레이를 보고 있었다. 스코어는 무섭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상대 팀은 아오미네의 기세와 능력에 밀려 속수무책으로 점수를 내어주고 있었다. 4코트 후반, 겨우 정신을 차린 아오미네가 턱밑까지 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덩크를 넣었을 때, 블로킹조차 포기한 상대 팀을 바라보며 아오미네는 멍하니 생각했다. 재미없다.

떠올린 한 순간, 그의 생각은 삽시간에 현실이 되어 등을 짓눌렀다.

웅성거리는 코트도. 응원석의 관중소리도. 농구공이 튀어 오르는 소리까지도. 아주 오래된 소음처럼 천천히 그의 곁에서 물러섰다. 경기종료를 알리는 휘슬소리와 함께 그는 눈을 감았다. 줄곧 그의 심장을 뛰게 하던 농구가 빛을 잃고 천천히 바닥으로 침잠하기 시작했다.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허무는 열등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마음을 사로잡는 불안과 이곳에 있지 않는 누군가의 뒤를 쫓는 초조함이 믿기지 않게도 전혀 닮지 않은 감정을 일으켜 깨웠다. 아오미네는 정렬하라는 안내를 들으며 등을 돌려 코트를 벗어났다. 바라는 게 그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루함은 충분히 그를 집어 삼킬 수 있었다.

연습에 소홀해지고 시합에 종종 나가지 않게 되었다.

부쩍 늘어난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잠귀신이 붙은 사람처럼 침대에 들러붙기 시작했다. 물릴 만큼 잠을 청했다. 남자의 침대 위에서 피곤하지도 않은 몸으로 선잠을 자고 있으면 어느새 그가 옆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도 했다. 무슨 일 있어? 지나가는 말처럼 그는 잠든 저에게 들리지 않는 물음을 건넸다. 정작 깨어있을 때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남자가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 있어. 엄청 많아.

듣기를 바라지 않는 물음에 차마 소리를 낼 수가 없어 마음속으로만 답했다. 당신을 보고 있으면 불안하더라고.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모습에서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고. 그렇게 시작하는 게 아니었던 건지도 모른다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수 있는지 정말로 사실은 모르겠다고.

확신할 수 없는 모든 물음표들이 잠에 섞여들어 무의식속으로 녹아들었다. 풍랑을 만나 뒤집어진 마음의 배는 정체모를 것들로 뒤덮여 항해를 멈추었다. 덕지덕지 붙은 볼품없는 감정들을 애써 긁어내며 아오미네는 손을 뻗어 히무로의 소매 자락을 붙잡았다.

언제 깼어?”

방금.”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잡히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히무로는 저의 이마를 짚었다. 그냥 평소와 똑같은 체온에도 손을 떼지 못하고 그는 연신 뺨이며 목을 만졌다. 손바닥이 스치고 지나간 감촉이 오래 남아있었다.

있잖아.”

.”

내일 밖에서 저녁 먹지 않을래?”

갑자기 왜?”

그냥. 그런 거라도 없으면 정말 가기 싫을 거 같아서.”

아오미네는 다시 잠들 것처럼 눈을 감은 채 그렇게 말했다. 지역결승이었지만 조금도 설레지 않았다. 이것마저 결장하면 주변에서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아 억지로 끌려 나가는 시합이었다. 지루함을 참아낼 수 있는 보상이 필요했다. 대답을 잠자코 기다리면서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와 보상이 모두 같은 곳을 향해있다는 건 생각보다 무력한 일이었다. 목을 내놓고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 그러자. 어디로 가야하는지 메모 남겨놔.”

이마를 느리게 쓸어 넘기는 남자의 손을 느끼며 아오미네는 보이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까지는 남자에게 이런 어리광이 통한다는 것이, 남자가 여기까지는 양보해 준다는 것이 마냥 고맙고 아팠다. 아오미네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어떻게 막아내기 힘든 울컥임이었다. 아오미네는 제 이마를 쓸어 넘기는 남자의 손을 붙잡아 제 입가로 옮겼다. 입술에 닿아오는 촉감이 단단했다. 이건, 농구를 했던 사람의 손이었다. 아오미네는 천천히 그 손에 키스했다. 아주 소중한 무언가를 대하는 듯이, 아주 고귀한 무언가를 감히 붙잡는다는 듯이.

애 같아.”

남자는 쿡쿡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었지만 그 손은 약간 떨고 있었다. 그 차이가 때때로 저를 견딜 수 없게 한다. 아오미네는 말없이 입술을 그 손에 묻고 있었다. 남자의 손, 남자의 태도, 남자와 했던 딱 한 번의 농구를 통해서 아오미네는 남자가 포기한 것이 농구였을 거라는 가정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남자에게서 훔쳐 온 사진이 떠올랐다. 카가미의 슛을 바라보며 웃고 있던 남자. 그 화사하던 웃는 얼굴이 수도 없이 절망하고 좌절해 이토록 아픈 얼굴을 하고 웃는 꼴로 변해 버렸다고 생각을 하면-

어디 아픈 건 아니지?”

.”

눈가가 뜨거웠다. 뜨거워서, 너무 뜨거워서 도무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

날씨는 화창했다. 아오미네는 아주 오랜만에, 설렘이라는 것을 느끼며 경기장을 향할 수 있었다. 그것이 이전과는 달리 남자로 인한 것이라고 해도 개의치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마음도 몸도 가뿐했다. 도리어 이전보다도 상태가 더 좋아서, 코트 위에서 신나게 날뛸 수 있겠다 하는 생각에 간만에 피가 끓었다. 코끝을 맵싸하게 스쳐오는 찬바람마저도 잡념을 떨칠 수 있는 상쾌한 마법 같았다. 먼저 경기장에 도착한 테츠야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여어- 테츠 하고 말을 걸자 테츠야가 의외라는 듯이 대답했다. 네가 무슨 바람이랍니까? 아오미네는 그저 씩 웃었다. 그냥, 오늘은 기분이 좋네.

애인이라도 보러 왔슴까? 순순히 나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슴다.”

이놈들은 아주 순순히 나와 줘도 불만이야.”

당연하죠. 당신이 나오면 내가 벤치잖슴까.”

키세는 퍽 불만이라는 듯이 입을 삐죽였지만, 오랜만에 이전처럼 화목해진 분위기에 기분이 좋은 듯 얼굴이 풀려 있었다. 아오미네는 예전에도 없던 열정으로 작전회의에 참여했다. 이전 같으면 귀찮다면서 한 귀로 흘렸을 사츠키의 분석도 귀담아 들었다. 모두가 돌변한 아오미네를 두고 입을 모아 사망플래그라고 수군거렸지만, 아오미네는 들은 척 만 척 농구공을 매만지며 몸을 푸는 데에만 열중할 따름이었다.

뭘 먹으러 가면 좋을까. 아오미네는 그런 실없는 종류의 생각을 계속했다. 기분 좋은 고민이었다. 먹는 걸 즐기지 않아서 잘 표는 안 나지만 남자는 의외로 가리는 것이 별로 없었다. 온갖 까탈은 다 떨 것 같은 얼굴로 사실은 미각중추를 잃어버린 사람이란 것도 좋아하는 모습 중 하나였다. 칼로리만 채울 수 있다면 맛없는 것들도 굉장히 아무렇지 않게 입으로 집어넣곤 하는 인물이라서 더더욱 맛있는 걸 먹이고 싶었다. 맛없는 커피도 아무렇지 않게 마셔주지만 기왕이면 맛있는 커피를 만들고 싶은 것처럼.

아주 가끔 운 좋게 입에 맞는 커피를 내리는 날이면 그는 몇 잔이고 연거푸 밥도 거르고 커피만 마셨다. 옆에서 말려야할 정도였다. 저의 손에 빼앗긴 채 식어가는 머그잔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을 대하는 건 제법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시합을 위해 정렬하면서도 아오미네는 계속해서 그 이후의 일을 상상했다. 라멘처럼 뜨겁고 먹기 힘든 음식도 그는 아마 깔끔하게 먹겠지. 바른 젓가락질로 정갈하게 입에 음식을 집어넣는 남자를 상상하며 아오미네는 미리 들었던 포메이션대로 자리를 잡았다.

아오미넷치는 농구를 잘하죠.’

키세가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단순한 칭찬이었지만 실은 전부다 바쳐서 농구뿐이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 긴 인생은 아니었지만 농구보다 재밌었던 게 없었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공을 잡았고, 거의 모든 잔여 시간을 코트위에서 머리 하나씩은 더 큰 어른들을 상대하며 보냈다.

농구 말고는 그를 움직일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마도 남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대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말을 듣는다 해도 농구밖에 없어도 좋더라고 생각했을 게 틀림없었다. 하물며 시시하다는 생각 같은 건.

했을 리가 없지.’

, 소리를 내며 공이 바운드 되었다.

아오미네는 본능과도 같이 공을 향해 달렸고, 볼을 손에 넣는 것과 던지는 것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순식간이었다. 수비가 미처 따라붙기도 전에, 농구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림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시작한지 1분도 지나지 않은 순간 터져 나온 선취점이었다. 관중석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가 이내 술렁거림과 동시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등허리를 선뜩하게 훑고 지나가는 짜릿한 감각이었다. 컨디션이 좋을 거라고 애당초 예상했었지만 실제로 볼을 만지는 순간 그 기대치보다도 훨씬 더 몸이 가볍다는 걸 느꼈다. 코트에 홀로 남아있는 것과 같은 적막한 환호 속에서 아오미네는 웃었다. 불붙은 듯이 키세와 1on1을 끝없이 반복하던 순간, 집중력이 최고조로 올라가면 저도 모르게 짓곤 하던 웃음이었다.

농구공 잡고서 웃지 마요. 1on1이 끝나고 바닥에 주저앉은 키세가 그렇게 서두를 던졌고 주위의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침묵으로 고갤 끄덕였더랬다. 어디다 시체 하나 둘 쯤은 거뜬히 파묻고 난 뒤의 얼굴이라구요. 이어지는 말에 모모이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다이쨩이 범죄 상이긴 하지. 그래도 다이쨩을 오래 지켜봐온 사람은 알거야-.’

 

기분 좋아 보이네.”

히무로는 관중석에서 턱을 괴고 앉아 중얼거렸다. 위압감을 온 몸에 휘감고서 공을 천천히 돌리는 아오미네는 시야에 결코 오래 머무는 일이 없었다. 따라 잡았다 싶으면 어느새 저만치 달려가서 자기 마음대로 볼을 던져대는 게 믿기지 않게도 족족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공이 골대와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각도로 슛을 성공시키는 녀석을 향해 옆자리에서도 저마다 자연스러운 탄식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 . 저게 어떻게그거 참 귀신같이 들어가네.”

히무로는 말없이 그 얘기에 동의했다. 지역결승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압도적이고 일방적인 시합이었다. 히무로는 씁쓸하게 웃으며 코끝을 살짝 찡그렸다.

아무래도 신이 자신에게 내려준 배역이 있다면 이렇게 관중석에 앉아 그들을 내려다보는 것이리란 예감이 들었다. 손톱이 괴고 있던 턱밑을 파고들어 깊은 자국을 새겼다.

아오미네가 남긴 메모는 그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역 이름이 적혀있었다. 약속시간과 장소를 조합해보면 아오미네의 행선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고민이 짧았던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무로가 결국 이곳에 발을 들인 건 온전히 아오미네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

근래 들어 녀석이 뭔가 이상해졌다는 건 조금만 지켜보면 알 수 있었다. 티는 별로 내지 않았지만 뭔가 중요한 게 뒤틀려있는 모양새였다. 학교나 친구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건가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해결해주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힌트정도는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온 시합이었는데, 히무로는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뒤통수를 얻어맞아야했다.

녀석이 공을 잡고 있는 걸 본 건 겨우 두 번이었다. 비오는 날과, 야외코트에서 단 두 번.

몰랐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짜여있는 게 운명이라면, 빌어먹게도 이런 게 운명이라면, 정말로 자신의 운명일 수밖에 없다면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할까.

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맑아지는 걸 반복하는 눈으로 히무로는 녀석의 얼굴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녀석이, 그 반짝반짝 빛나는 재능이, 눈부시다고만 느껴졌다.

저기 저 파란 팀 스코어러가 대체 누구냐고. 예선 내내 안보이다가 어디서 튀어나온 녀석이냐고 누군가 소리 내어 묻는 게 들렸다.

예선에 줄곧 불참했었구나. 어쩐지 내내 지루해 보이더니.

생각하며 히무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녀석만을 보았다. 눈 안에 오직 녀석만을 담았다.

히무로가 아는 아오미네 다이키는 하얀 색이 안 어울리고, 편의점 샌드위치를 싫어하며, 쓴 커피는 못 마시는 주제에 매일 아침 등교하기 전 자신의 커피메이커를 돌려놓고 가는 이웃집 남자애였다.

그리고 코트 위에 서 있는 기적 같은 스코어러는 굉장 낯익은 얼굴로 낯선 눈을 하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두 사람이 가까워져 가다가 이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히무로는 모든 생각의 스위치를 내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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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제 생에 단 하나 신성처럼 반짝이는 빛이었다. 밝아서, 불꽃처럼 밝아서 매일같이 제 시력을 살해할 것만 같던 사내. 삶이 끝날 때에 유일하게 남아 있을 이름이라고 생각해 왔다. 죽어 신 앞에 섰을 때 꺼낼 이름이 그 남자밖엔 없을 거라고. 사랑과 미련, 그리고 집착을 모두 관통하는 단 하나의 언어였다. 맺어지지 못해도, 평생 이 마음에 보답 받지 못할 지라도, 아니 저가 앞으로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사랑하든 잊지 못할 단 하나의 존재.

타이가히무로는 신음처럼 내뱉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남자의 환영이 그의 발치까지 다가와 제 발목을 적시고 있다는 것을 히무로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에게 여태 남아있을 줄 몰랐던 당혹스런 남자의 그림자가 그의 목을 졸라 오는 것이다. 겨우 도망쳤다고, 겨우 지워냈다고 생각했었는데 전부 자신의 착각이었을 뿐이었다.

거 봐, 아오미네. 역시 역부족이야. 왜냐하면 너는 정말 남자를 많이 닮았거든.

눈이 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는, 녀석에게서 타이가를 보았기 때문에 녀석의 애정을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었을지 제가 했던 모든 선택이 의심스러웠다. 스멀스멀 자기혐오가 다시 고개를 쳐들어 왔다. 녀석을 보는 것이 힘이 들었다. 아니 제가 있는 곳이 농구 경기장이라는 것부터 속이 뒤집힐 것처럼 머릿속이 샛노랬다. 득점 후 세상을 다 얻은 얼굴로 주먹 쥔 손을 치켜드는 아오미네의 얼굴에 자꾸만, 자꾸만 남자가 겹쳤다. 분명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시야가 물과 기름처럼 부옇게 유리되어 그 위로 기억이 밀물처럼 들이쳤다. 그 순간, 히무로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그저 도망쳐야겠다는 것뿐이었다. 도망쳐야만 했다. 시시각각 그를 덮쳐 오는 과거의 망령에서.

 

자리를 떠나 약속장소로 향하는 걸음에는 별별 생각이 다 따라붙었다. 이대로 녀석을 볼 수 있을 지부터 녀석과의 관계를 그만두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는 성급한 고민까지 히무로가 걷는 골목마다 고개를 내밀고 그의 어깨를 붙들어 왔다. 부러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머릿속을 비우는 일을 여러 번 반복했지만, 도저히 개운하게 지워내 지지가 않았다.

한참을 걷다가 약속 장소에서 멈춰 섰다. 만남의 광장 같은 곳인 듯 저마다 상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퍽 북적이는 곳이었다. 힐끗 시계를 보았다. 약속시간까지는 삼십 여분이 남았다. 약속 장소의 전방에 위치한 커다란 전광판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가미 타이가 선수가 오늘 15xx항공편으로 미국행을히무로는 그 자리에 다리가 풀린 듯 무릎이 꺾여 주저앉았다. 고개를 파묻었다. 위태위태하던 속이 결국은 뒤틀리듯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시절, 억지로 읽었던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큰 죄는 오만과 탐욕이었다.

히무로는 항상 궁금했다. 오만과 탐욕을 부정하다 할 것이면 왜 신은 내게 꿈꿀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꿈을 이룰 능력은 주시지 않는 것인지. 처음부터 자신에게 아무런 재능도 없었다면 이토록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중간한 재능은 그에게 오만을 가르쳐 저 하늘 끝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속삭이곤 했고 손에 쥐일 것만 같은 하늘은 그에게 욕심을 가르쳐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꿈을 꾸게 했다. 잔혹했다. 어차피 오르지 못 할 곳인 줄 알았다면 사랑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남자와 자신을 가르는 불연속점이 노력의 여하가 아니라 재능의 크기라는 사실은, 히무로를 지독한 허무감에 시달리게 했다. 농구와 남자 모두를 사랑했기 때문에, 아니 집착했기 때문에 히무로는 지금까지도 끝을 알 길 없는 허무 속을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이 들었을 때 히무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녀석과의 약속 장소를 벗어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이것이 녀석에게 굉장히 비겁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더는 견디기가 힘이 들었다. 교만과 탐욕의 죄를 씌울 것이면 그런 자신의 곁에 죄를 범하지 않고도 하늘 끝 높은 곳에 다다를 수 있는 남자를 배치하는 신은 또 얼마나 가학적인가 말이다. 모든 피조물들의 어버이라는 신이 자신에게는 너무도 잔혹했다.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했더니, 바로 곁에 똑 닮은 다른 이를 데려다 놓을 줄이야.

터벅터벅 디디는 걸음 하나하나 마다 천근짜리 무게를 갖고서 바닥으로 파고들었다. 계단을 한 계단씩 오르는 동안 발은 올라가고 있는데 몸은 지하 어딘가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아파트 층계를 일부러 힘주어 오르며 히무로는 염증을 느꼈다. 지겹다는 생각을 하는 스스로마저도 지겨웠다. 난간을 잡고 발을 뻗는 내도록 누군가 밑에서 자신의 발목을 잡아채는 환각이 들었다. 두 계단 오르고 멈춰서 숨을 돌리고 다시 두 계단 오르고,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절망을 오르듯이 그는 층계를 올라갔다.

무게를 잔뜩 실어 계단을 오르는 건 발목에 특히나 부담 가는 일이었다. 통증을 느끼며 안도하는 저의 모습이 굉장히 비정상이란 걸 알면서도 히무로는 멈추지 않았다. 부상은 일종의 핑계이자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피난처였다.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에 대한 그럴싸한 변명이 필요했다. 도저히 달릴 수 없을 만큼 망가져버린 부속품이 필요했다. 실제로도 그건 직면하고 싶지 않은 나약한 모습을 납득시켜주는 썩 괜찮은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다만 진심으로 걱정해주던 남자도. 그리고 볼 때마다 눈을 찡그리며 부어오른 발목에 신경을 써주던 녀석도. 사실은 기만 속에서 그 다정함을 착취당하고 있을 뿐이라는 게 못내 미안했다.

미안하고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론 부럽고 질투 나서 견딜 수 없다가도 끝끝내는 사랑스럽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 모든 모순을 한 몸에 끌어안고 사는 그들은 왜 그렇게나 빛나는 걸까. 태양의 바로 밑에서 자신은 그늘 한 점 없이 녹아내려야 했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허리가 절로 굽었다. 숨을 고르지 못하게 내뱉으며 히무로는 흐르는 땀을 닦았다. 턱 밑으로 손등이 닿았을 뿐인데 상처가 따끔했다. 그제야 손톱을 내려다보니 다 말라붙은 피딱지가 보였다.

히무로는 굽혔던 허리를 펴고 억지로 현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마치 선물처럼 나타났던 그날의 아오미네. 그리고 아무렇게나 말을 주워섬기며 눈물을 뚝뚝 흘리던 언젠가의 제가 흐릿하게 그곳에 나타났다.

아오미네는 뺨에 손을 올리고서 한참이나 가만히, 마저 울기를 기다려주었다. 섣불리 달래지도 않고 그냥 혼자 외롭지 않도록 계속 옆에만 서있었다. 복도의 센서 등이 꺼지고 어둠에 삼켜져서도 손끝을 떠나지 않는 체온이 마냥 따뜻했다. 혼자 있는 것보다는 함께 있는 게 기쁘다고 느꼈다. 어떤 마지막이 올지는 몰라도 잠시만의 위안이라도 얻을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고작 남자의 대체품을 바랐던 것이었을까.

그럼 내가 너무 역겨워지잖아.”

히무로는 중얼거렸다. 그때와 같은 모습으로 서있던 환영이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주친 시선에는 환멸이 담겨있었다.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히무로의 환영은 어느새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걸음을 옮겨도 사라지지 않고 자신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대로 졸졸 따라온 놈은 소리 없이 말했다.

분수도 모르고.’

저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내 몫도 아닌 걸 탐내니까 괴로운 거야.’

저의 얼굴을 하고서 저의 목소리를 한 인영이 또 다른 자신을 비난했다.

동경이나 하면서 살 것이지 주제도 모르는 승부욕 같은 게 대체 무슨 소용이야.’

히무로는 신발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현관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친 발목 아래서부터는 더 이상 감각이 없었다. 무리하게 힘을 주고 걸었던 다른 쪽 발목은 차라리 끊어지는 게 더 편할 것처럼 아파왔다.

그런 주제에, 그 남자와 똑같은 과자를 먹고 싶어서 떼쓰는 건 꼴사납지 않아?’

벽에 등을 기대고 저에게 폭언을 내뱉는 스스로의 모습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저주 같았다. 알렉스에게 꼬투리를 잡아 성을 내던 때에, 혹시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내가 나빠?”

네가 나빠.’

줄 것도 아니면서 밥그릇을 흔들어대는 쪽이 나쁜 거 아냐?”

분수도 모르고.’

그렇지만바란 건 그거밖에 없었어.”

제 분수도 모르고.’

되고 싶은 건 그거 말고는 없었어.”

분수도 모르고.’

농구 말고는 싫었어.”

대답하며 히무로는 눈을 감았다. 천천히 몸이 기울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사람은 저마다 다 다른 상자를 가지고 태어난다. 원하던 게 상자에 없다고 그걸 부수거나 남의 걸 빼앗을 순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억지로 그런 척, 스스로를 속여 봐야 결국에는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맞지 않는 조각을 끼워 맞춘 환상이 깨져버린 순간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고, 제가 고른 건 아마 그중 최악이었을지도 몰랐다. 모른 척 돌아서서는 안됐다. 다른 눈속임을 찾아 도피하면 안됐다.

이 지독한 환각에서 깨어났을 때, 이번엔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까지 찾아와 칼을 휘두른 남자에게 다시 전화하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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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지 마.”

눈을 뜨자마자 득달같이 들려오는 목소리. 간신히 들어 올린 눈꺼풀을 다시 슬며시 누르는 손바닥이 차가웠다. 찬물에 씻기라도 한 건지 다소 물기가 묻어나는 손이었다.

아오미네. 나오는지 아닌지도 확신할 수 없는 말로 녀석을 불렀다. 천천히 목덜미에 차가운 수건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서늘할 정도로 식은 수건은 놀라지 않을 만큼 충분히 느리게 목과 쇄골을 훑고 지나갔다. 찬 기운이 지나고 난 자리는 훈훈한 공기와 맞닿아 금방 도로 뜨거워졌다.

눈 뜨지 말고 도로 자. 당신 열 있어.”

많이 기다렸어?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설마 오래 혼자 서있지는 않았지? 화 많이 났어?

물음이 목에 걸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서 허우적거렸지만 녀석은 아랑곳 않고 뺨이며 이마를 젖은 수건으로 닦았다.

아오미네.

이름을 부르면 어쩐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자라니까. 푹 자고 일어나서 얘기해. 현관문 열자마자 그쪽 엎어져 있는 거 보는데, 나 정말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 새벽까지 열 안 내리면 응급실 갈 거니까 그렇게 알고.”

더듬더듬 히무로는 보이지 않는 채로 녀석의 손목을 쥐었다.

안 갈 거야. 가래도 안 갈 테니까.”

지금은 그냥 눈 감아.

주문처럼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히무로는 도로 어둠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맥박이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 녀석을 앉혀두고서 잠에 빠져드는 그 순간에는 아무런 잡념도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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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미네는 복잡한 심경으로 붙들린 제 손목을 보고 있었다. 힘 하나 없는 사뿐한 억제였으나 부러 풀지 않았다. 그냥 남자가 제 의지로 자신을 붙잡고 있다는 것에 안심이 된다. 맞닿은 피부를 타고 남자의 체온이 뜨끈하게 올라왔다. 붙잡히지 않은 다른 쪽 손을 가만히 남자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조금 나아진 것 같았지만 여전했다. 아오미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남자의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가만히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었다. 어쩐지 제가 아파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바람맞았다는 사실 자체는 굉장한 충격이었다.

자신에게 곁을 내어주지는 않아도 거짓말이나 지키지 못할 것들을 약속하는 이는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기어이 자신을 잘라내 버릴 셈이면 거짓으로 사랑을 위장하거나 자신을 속여 넘길 성격의 사람은 아니다. 지금껏 몇 번이고 그랬듯이, 말 몇 마디로 직접 자신을 내쳤으면 모를까. 그래서 아오미네는 추위에 떨며 기다리면서도 남자가 오지 않을 것을 의심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남자가 오겠다고 말했다.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남자가 물었었다. 밖에서 식사를 하고 싶다는 제 억지에 응해 주었다. 남자는 반드시 올 것이고, 단순히 시간이 지체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약속시간이 세 시간이나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야 겨우 남자가 오지 않을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러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역시 내키지 않았던 걸까, 내키지 않았으면 가기 싫다고 말하면 될 걸 왜 내게 거짓말을 했나. 오랜만에 마음을 가득 채웠던 승리로 인한 희열감이 한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고집처럼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남자를 기다리다가, 어둑어둑해질 즈음에야 일어났다. 자신과 비슷한 시간에 와서 상대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이제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저녁 시간도 훨씬 지나 실상 이제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오미네 혼자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에는 세상의 무게가 죄다 실렸다. 다리가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걷는 걸음마다 추가 매달린 듯 다리가 축축 늘어졌다. 집에 있을 거야, 하는 생각이 반. 아예 집에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반. 분명히 오겠다고 했던 남자를 믿고 싶었다. 오지 않을 것이었으면 처음부터 가지 않겠다고 이야기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더니 그렇다면 남자는 왜 오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남았다. 아픈가? 그랬다면 먼저 연락을 주었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일이 생겼을까? 마찬가지다. 그는 미리 언질을 주는 성격이다. 그것도 아니면사고가 난 건 아닐까?

무서운 생각이 머릿속을 하얗게 비워내고 있었다. 아오미네의 상상력이 기어코 어딘가에서 사고를 당해 쓰러져 있을지도 모를 남자의 모습을 그려냈을 때, 아오미네는 손바닥이 짓이겨질 만큼 세게 주먹을 쥐었다. 남자에게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자신이 알 방법은 없을 것이다. 남자가 자신이 모를 어딘가에서 어떤 모습으로 죽어간다고 해도 자신에게 그 소식이 들려올 가능성이란 아주 적은 것이었다. 겨우 그 정도의 관계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라진다고 해도 자신은 영영 알 수도 없을 것이었다.

아오미네는 이를 악물었다. 마음이 답답했다. 남자의 집을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지다가, 종국에는 거의 뛰는 모양새가 된다. 남자를 봐야 할 것 같았다. 남자를 보고 남자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마음을 놓고 싶었다. 차라리 남자가 자신에게 받는 것조차 질려서 나오지 않은 거였으면 좋겠다. 이 관계를 그만 두고 싶어 나오지 않았다는 쪽이 훨씬 더 나을 것 같았다. 한참 위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아오미네는 단번에 포기하고 쿵쾅거리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제 발이 땅에 붙어있는지 아니면 허공을 허우적대는지도 모를 만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계단을 올라 남자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입에서 단내가 났다. 목 깊숙한 어딘가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아오미네는 신음처럼 내뱉었다.

히무로거기 있지? 있으면 문 좀 열어줘.’

문을 여는 인기척은 없다. 아오미네는 공연히 죄 없는 현관문을 주먹으로 쾅쾅 내리치다가, 그 문이 잠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오미네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살며시 밀어낸 문 뒤에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상상했던 끔찍한 사고가 그 위로 겹쳤다. 정신없이 뛰어 들어가 남자를 침대로 눕히고 집안을 뒤져 남자의 침구라는 침구는 다 내오고, 보일러를 켰다.

놀란 마음이 먼저였다. 남자를 응급실로 업어 뛰어야 할지 구급차를 부르는 게 나을지, 그것도 아니면 이대로 조금 쉬게 두는 것이 나을지도 알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워서 일단 남자의 이마를 닦아줄 찬물과 수건을 내왔다. 식은땀을 흘리는 남자의 목덜미며 이마께를 천천히 훑는데 남자가 눈을 떴다. 그 순간의 안도감이란.

뭔가에 홀린 것 같았다.

그의 어리석음에 화가 나기보다는 걱정이 먼저였고, 무신경함에 상처받기보다 무서웠다. 흐려진 머리가 물속을 들어간 듯 차분하게 가라앉는 걸 느끼며 아오미네는 인정했다. 남자는 자신을 답지 않게 만들었다.

한 번도 꺼내본 적 없는 제 모습을 하나씩 하나씩 어디선가 찾아내어 보여주었다. 작은 바람이 폭풍이 되듯 그의 옆에서는 작은 일에도 일희일비하는 낯선 자신이 있었다. 이미 온 마음을 빼앗겼던 농구가 있었기 때문에 자질구레한 감정들에 얽매여 본적이 없었더랬다. 손을 뻗어 꿈을 움켜쥐는 데 너무 바빴다. 그래서 줄곧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늦된 마음이 꺼내지자 이렇게나 허둥거리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다 할 것도 없이 평범하게 보내는 나날들 속에서 마음과 감정이 매일 격동하듯 휘몰아쳤다.

이런 사람, 어쩌면 살아가는 동안 또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그래도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오로지 그 남자뿐이었다.

아오미네는 깊은 숨소리를 들으며 히무로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줄곧 참아오던 눈물을 터뜨리던 얼굴이 어땠는지 지금도 눈앞에 선했다.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백번쯤은 생각했었다. 눈물점 위로 방울져 흘러내리는 눈물들이 어둠속에서도 느껴졌다. 아오미네는 천천히 손을 떼서 남자의 눈가를 쓸어보았다. 열이 올라 뜨끈한 눈 밑은 조금 부어있었다.

머리맡의 대야와 수건을 챙겨 일어나 다시 차가운 물에 적셔왔다. 많이 해본 적 없어서 서툰 솜씨지만 수건을 반듯하게 접어 감겨진 그의 눈 위로 조심스레 얹었다. 손끝에서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이 베개위로 굴러 떨어졌다.

히무로가 덮고 있는 이불을 가지런히 정리해주다 문득 그 옆의 활짝 열린 벽장이 눈에 들어왔다. 양쪽으로 열려진 입구에선 침구들이 반쯤 토해지고 있었다. 일단 무조건 따뜻하게 해줘야한다는 생각에 벽장속의 이불을 모조리 끌어내는 동안 바닥으로 팽개쳐진 것들이었다. 이제야 겨우 집안 꼴이 눈에 들어오는 걸 보면 정신이 없기는 했나보네, 생각하며 아오미네는 바닥에 뒹구는 얇은 침대커버들을 주워 올렸다. 야물지 못한 손끝으로 비뚤비뚤 접은 이불을 하나씩 벽장 속으로 집어넣으며 자꾸만 늘어지는 어깨를 추슬렀다. 경기를 뛰고 찬바람 속에 사람을 기다리고. 집까지 쉬지 않고 달리기를 했던 하루였다. 피로함이 이제야 뒤늦게 등을 짓누르고 있었다.

잡동사니가 가득한 벽장 속을 멍하니 들여다보던 그의 눈에 문득 들어온 건 낡은 신발 코였다. 고개를 아래로 조금 숙였다.

상자 밖으로 살짝 튀어나와서 끄트머리만 보이고 있을 뿐이었지만 눈에 들어왔던 이유는 그것이 농구화였기 때문이었다. 부활동만 나가면 지겹게 보고 또 보던 것들이라 틀렸을 리가 없었다. 브랜드와 모델명까지 맞출 수 있었다. 아오미네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잠시 고민했다. 가장 아래쪽 선반에 들어있는 상자는 손을 잘 타지 않았는지 먼지가 쌓여있었다.

꺼내도 될까. 흘끔 누워있는 히무로쪽을 돌아보았다.

갈등은 짧았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 아오미네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밖으로 꺼냈다. 부피에 비해서 많이 가벼웠다. 내용물이 많이 들었는지 윗부분이 바깥으로 열려있었다. 손끝으로 살며시 상자를 열자 안에 든 것들이 보였다.

농구화. 트로피. 유니폼. 상장과 상패들. 잡지며 보호대까지 낡고 소중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전부 농구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상자 안에 가득 찬 물건들엔 온통 그의 손때가 묻어있었다.

욕심이라더니.”

남자가 애써 외면하던 변명이 떠올랐다. 참을 수 없이 슬픈 기분이 머리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아오미네는 작게 신음을 토해내었다.

쓰레기장 앞에서 서성이던 그가 생각이 나버렸다. 버렸다 주웠다 그렇게 망설이더라니, 결국은 이런 결론인 것이다. 몇 번이나 고민하고 다짐하고 노력하던 것들이 결국엔 고스란히 다시 이 안에 담겨져 벽장 속에 숨어있었다. 그의 벽장 안에. 그의 벽장 가장 아래쪽 선반 깊은 곳에.

그의 미련이 이렇게나 분명한 형태를 띄운 채로 남아있었다.

끝내 버리지도 못했으면서.”

아오미네는 중얼거렸다. 남자를 몰래 들여다보았다는 것이 하나도 비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마지막까지 자신에게는 조금도 내보여주지 않았을 몫이니 반칙정도는 저질러도 용서해야만 했다. 알고 싶다는 마음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좋아하는 걸 멈추지 못하던 것처럼.

아오미네는 거실로 향해 부엌 서랍을 뒤졌다. 온갖 신경안정제 종류가 죄다 쏟아져 나왔다. 두통약도 제조사별로 있었고 개중에는 수면제도 섞여있었다. 이름을 적어서 검색해보니 그냥저냥 가볍게 먹을 만한 상비약이 아닌 수준도 많았다. 잠들고 싶어서 먹었다며, 대낮부터 약기운이 가득한 얼굴로 문을 열어주던 그가 생각나서 수면제는 뚜껑을 열어 전부 휴지통에 쏟아버렸다.

식탁 옆 콘솔을 뒤졌더니 이번에는 오랫동안 보지 않은 것 같은 어려운 공증서류 같은 것들이 잔뜩 나왔다. 대학 입학 증명서부터 프로 구단에서의 스카우트 제안서도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그냥 취미로 농구를 했던 정도는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선수생활을 하긴 했던 것 같은데, 어쩌면 대학 리그에 출전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팔락팔락 읽어 내려갔다. 서류 중에는 모델이나 배우 데뷔 제안 따위도 있어서 아오미네는 피식 웃었다. 하기야 그 미모를 썩히기는 어려웠겠지. 남자가 배우를 했다면 그것도 퍽 볼만 했을 것이다. 키세가 억지로 보여주곤 하던 녀석의 화보 사진 따위에 남자를 대입하니 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하기야 우리 타츠야 씨가 마스크는 좀 잘났지 하고 부심 돋는 대사를 떠올리니 마냥 흐뭇했다.

쿡쿡대며 읽어 내려가던 아오미네의 손이 멈춘 것은 진단서라고 적힌 꽤 두꺼운 서류였다. 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떠올랐지만 궁금한 마음이 더 컸다. 단순히 심술을 부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유가 있긴 했지만 어쨌건 바람맞은 것은 꽤 실망스러운 일이었으니까.

앞의 일곱 장 정도는 남자의 성격과 스타일, 그리고 지능지수 따위가 장황하게 쓰여 있었다. 잘 모르는 어려운 말이 많았지만 유독 심각한 정도의 불안이나 스트레스 해소의 어려움, 극도의 기분저하 같은 내용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언뜻 우울증이라는 단어가 보였다. 키세가 유명 연예인 누가 우울증으로 자살했다던 가쉽거리를 떠들던 것이 기억이 났다.

진단서를 넘기고 다음 문서를 펼쳤다. 서류라기보다 잘못 뽑은 인쇄물처럼 보였다. 한번 구겼다가 다시 편 듯 꾸깃꾸깃한 종이에는 기본 폰트로 적힌 두 문장뿐이다. ‘오랜만이야. 보낸 사진은 마음에 들어?’

평범한 말투에 평범한 내용이었지만, 딱히 머리를 굴려 추리하지 않아도 그 사진이 유쾌한 종류의 것은 아닐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사진을 말하는 거지. 아오미네는 다음 문서를 보았다. 이번에도 같은 종류의, 꾸깃한 흰 종이에 기본 폰트로 쓰여 있었다.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한 장 더 보내. 물론 아직 더 남았어. 연락 기다릴게.’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릴 것처럼 쿵쾅쿵쾅 시끄럽게 뛰었다. 훔쳐보고 있는 상황이라는 걸 갑작스레 의식이라도 한 것처럼 식은땀이 났다. 이 내용에 대해서 더 궁금해 하지 말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느낌과 채 억누르지 못한 호기심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한 장을 더 넘겼다. 또 마찬가지의 종이였다. ‘혼자 보기 섭섭해 하는 것 같아서 타츠야의 친구에게도 보내줬어. 이름이타이가였던가?’

아오미네는 못 볼 걸 본 것처럼 여태까지의 서류들로 그 종이를 덮어 버렸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제 지갑 속에 들어있는 남자의 사진이 떠올랐다. 카가미를 보고 있는 남자의 모습. 다른 사진들도 함께 떠올랐다. 항상 카가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남자. 카가미의 사진들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남자, 집 안에 꾸밈이라고는 카가미의 사진뿐인 남자, 카가미에게 제 마음은 다 줘 버려서 너에게 줄 게 없다고 말하던 남자…….

카가미를 사랑하는 남자.

어쩌면 아직까지도.

머리가 복잡했다. 아오미네는 다시 콘솔을 열고 서류들을 제 자리에 놓아두고 오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갑작스레 미아가 된 기분이다. 무작정 남자가 잠들어 있는 방을 향했다. 침대 가장자리에 서서 한참을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아파서 그런지 창백한 얼굴이 핼쑥했지만 아까보다 훨씬 편한 얼굴을 하고 잠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수면제 없이도 이렇게 평온하게 잘 수 있는 사람인데. 부엌에서 발견했던 수면제와 내용을 잘 알 수 없던 진단서, 그리고 마지막에 보았던 문서들까지 떠올라 마음이 착잡했다.

당신은 대체 얼마나 끔찍한 것들을 끌어안고 사는 거야.”

남자는 너무나 무거운 것들을 짊어지고 있었다. 자신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역의 문제였다. 남자를 어떻게 위로해 주어야 할지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너무 어리고 무력했다. 새삼 억울했다. 나는 왜 이렇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는지. 당신은 왜 그렇게 상처투성이가 되어야만 했는지. 너덜너덜하게 무너지고서도 당신은 왜 이리 반짝반짝하고 아름다운지. 그런 당신 곁에 있는 나는 왜 이리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초라한지.

그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잠이 깰까 걱정되어 열이 내렸는지 확인도 못 하고 방을 나왔다. 잠이 오질 않았다. 남자가 즐겨 마시던 커피를 대량으로 내렸다. 거실 소파에 앉아 줄기차게 마셨다. 제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생각했다. 새벽이, 매우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