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빙(아오히무)] 청빙을 연애시키고 싶습니다
w. 플루핑 & 24
* 24님(http://bozodiac.ivyro.net)과 릴레이로 쓴 글입니다
-> 24님의 쿠로바스 별관을 찾으신다면 이쪽으로 : http://the3rdpresent.ivyro.net/xe/text
농구가 좋았다.
왜 좋았느냐, 무엇이 좋았느냐 하는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기억도 못 할 어린 시절부터 농구를 했고 정신을 차리면 늘 농구를 하고 있었다. 코트에 농구공이 튀는 소리와 발을 굴러 힘껏 뛰어오르는 시원한 동작, 골대 아래에서의 치열한 박진감. 남자와 농구를 하고 땀을 잔뜩 흘린 후 주저앉아 땀을 식히는 시간. 농구공이 제 손을 떠나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 일련의 눈부신 과정들에 홀려 있었다. 농구의 모든 것이 좋았다. 매일매일 늘어가는 실력을 체감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짜릿했다. 노력하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목을 맸다.
카가미는 농구를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인간이었다. 재능, 히무로는 카가미를 보기 전까지는 그 말을 믿은 일이 없다. 노력하는 것은 언제나 성과를 이룰 수 있고 자신이 고통을 감내한 만큼의 대가는 보상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카가미 타이가, 그는 그런 히무로의 믿음을 정면에서부터 부정하는 것 같은 인간이었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지만 자신과 남자는 근본적인 부분부터 다른 것 같았다. 현저한 재능, 남자는 다른 부분에서도 참 반짝이는 인간이었지만 그 모든 반짝이는 부분들 중에서도 가장 눈부신 것은 그것이었다. 다른 어떤 것에서도 그에게 뒤지지 않았지만 농구코트에서만큼은 달랐다. 자신이 먼저 시작했고, 자신이 먼저 노력했는데 그 모든 시간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남자의 성장은 매서웠다.
그 남자를 질투했다. 그것을 깨달은 것은 오래 전부터의 일이다. 자신이 석 달 걸려 익힌 기술을 남자는 삼 주도 지나지 않아 구사할 수 있었다. 재능은 잔혹했다. 보다 더 노력하는 것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저보다 훨씬 우월한 능력으로 저보다 더 성장해가는 남자를 보는 일은 절망보다도 공포에 가까웠다. 남자가 다친 저를 배려해서 일부러 실수를 했을 때, 히무로는 그동안 남자를 어떻게 해서든 뛰어넘고자 해 온 모든 노력이 짓밟히는 기분을 맛보았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노력하는 천재를 평범하게 태어난 자신은 이길 수 없다는 비웃음이 들리는 듯했다. 히무로는 도망치듯이 코트를 떠났고, 그 이후로 다시는 예전 같은 기분으로 농구를 할 수가 없었다. 농구에 대한 생각을 할 때마다 선택받지 못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괴만이 무섭게 자라났다. 남자들과 자기 시작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Congratulation~! 역시 타이가네. 미국은 언제쯤 가는 거야?”
히무로는 한 손에 분리수거 쓰레기를 가득 들고 어깨로 전화기를 받친 채 적당히 분리한 쓰레기를 한 손으로 던져 분리수거 통에 골인시키는, 매우 어렵지만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하며 말했다. 한쪽 눈을 가리는 긴 앞머리가 조금 귀찮다는 생각을 하면서. 각자 무게와 부피가 다른 쓰레기들이 퍽 멀다 싶은 쓰레기통에 깔끔하게 골인한다. 대충 던지는 모양새인데도 절도가 잡힌 동작이 유려했다. 준비하는 대로 들어갈 것 같아, 아마 한 달이나 두 달쯤. 전화 저 편에서 카가미가 조금 주저하며 말을 꺼낸다. 그래서, 그 때 일이랑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Well, it’s no bother. 준비나 잘 해”
머뭇거리는 상대방의 대답을 듣는 대신 히무로는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통화종료 화면이 뜨는 순간, 의식적으로 짓고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말끔하게 닦아낸 것처럼 표정이 사라진 얼굴에 남은 건 달궈진 휴대폰이 내뿜는 열기뿐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쓰레기를 던져 넣던 행위를 그만두었다. 생각에 잠긴 듯 손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지만 그렇다고 전화를 다시 걸어 약속을 잡는 일은 하지 않았다.
주머니에 휴대폰을 성의 없이 구겨 넣으며 히무로는 쓰레기통 앞으로 다가섰다. 봉투째로 뒤집어 남은 쓰레기를 쏟아 넣으려는 찰나, 뒤에서 불쑥,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상통화도 아닌 것 같은데 표정이 왜 그래?”
낯선 목소리였다. 자신에게 하는 말인가 싶어져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훌쩍 키가 큰 남자애가 대충 다리를 꼬고 아파트 현관에 앉아있었다. 옆집 녀석이었다. 같은 층에 사는 이웃사촌. 어떻게 아는 사이냐 하면 우연히 본 그 집 아주머니 휴대폰 대기화면이 녀석 사진이었더랬다. 중학생쯤 되었다고 했던가.
히무로는 무표정 위로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는 웃음이었다. 녀석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선 말했다.
“얼굴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왜 억지로 웃고 있냐고. 끊자마자 그렇게까지 밥맛 떨어지는 표정 지을 정도면 되게 싫은 놈인가 보네.”
심드렁한 녀석의 목소리는 마치 오늘의 날씨라도 묻듯이 평화로웠지만, 친분 없는 이웃사촌에게 듣기에는 영 일반적이지 못한 주제였다. 히무로는 온화한 미소를 흘리며 눈앞의 의뭉스런 이웃에게 대답했다.
“딱히 싫어서라기보다…, 통화가 끝났으니 표정도 바뀌는 게 당연한 거 아냐? 아무도 없는데 혼자서 웃고 있으면 이상하잖아.”
“별로. 그렇게 순간적으로 변해버리는 쪽이 오히려 가식적으로 보이는데.”
히무로는 의례적으로 걸치고 있던 웃음을 지웠다. 묘하게 따끔거린다고 느낀 말 속의 가시가 혼자만의 착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정말로 이 녀석은 자신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었다. 건방지다는 생각보단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 히무로는 별다른 대구 없이 그대로 등을 돌려 분리수거를 마저 계속했다. 봉투 안에 남아있던 우유팩들이 종이류에 와르르 쏟아 부어졌다.
“아줌마들 사이에서 그쪽 이미지 엄청 나쁜 거 알아? 뭐 칼로 누굴 찔렀다드니, 경찰이 다녀갔다느니. 난 솔직히 별로 믿기진 않는데 불법적인 일 같은 거 한다는 소문도 있고.”
다시금 아파트 입구 쪽으로 돌아선 얼굴에는 표정 한 점 없었다. 불쾌한 기색조차 없이 서늘하고 지루한 얼굴로 히무로는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할일 없는 자세로 앉아있던 녀석의 앞에 멈추어 서자, 시선이 마주쳤다. 키가 커서 몰랐는데 생각보다 앳된 얼굴이었다.
어디까지가 악감정이고 어디까지가 호기심일까, 가늠하며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녀석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열넷? 다섯? 정확한 나이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그쯤이었던 것 같았다. 요새 중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까.
“불법은 아니고. 치정싸움.”
아무렇지 않게 히무로는 말했다. 눈이 둥그렇게 커지는 게 제법 귀여운 구석도 있어보였다.
“원나잇에게 원나잇을 들켰거든. 참고로 칼 휘두른 건 내가 아니고 그 쪽. 남자들이라 그런지 말보다 주먹부터 나가더라고. 덕분에 조금 시끄러운 일을 겪긴 했지만 본의는 아니었어.”
눈짓으로 대충 비키라는 표시를 하며 히무로는 옆집 녀석을 유유히 지나쳤다. 통로를 지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흘끗 뒤를 돌아보자 그쪽도 여길 보고 있었는지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쳤다. 빛을 등지고 선 녀석의 얼굴에 담겨있을 게, 경멸인지 혐오인지 보이지 않았다.
녀석과의 조우는 그 이후 의도치 않게 왕왕 일어났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죄로 이틀에 한 번은 녀석과 마주쳤다. 마주칠 때마다 녀석은 시비를 걸어오곤 했지만, 그 시선에 경멸이나 혐오를 찾을 수 없다는 점만이 퍽 의아했다. 그다지 포용력 있어 보이는 타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다지 어린애라고 귀여워할 만한 녀석이 아니었던 데다 어린애 특유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관심은 히무로를 피곤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이를테면 ‘재수 없는 녀석’ 정도의 카테고리 안에 있는 상대랄까. 인간관계가 극히 좁은 그에게는 이상할 정도로 자주 만나는 사람 중 하나였지만 그렇다고 큰 비중을 둘 만한 인물도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정기검진을 간다. 일상처럼 몇 개의 검사와 엑스레이를 찍고 나서, 히무로는 보통 검사를 받고 난 사람들이 보일 법한 초조함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는 나른한 표정으로 의사의 앞에 앉아 있었다. 벌써 열 번도 넘게 히무로를 보아 온 의사의 말은 이전과 같았다. ‘예전의 기량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부상 자체는 매우 심각한 상태는 아니어서 수술을 하고 재활을 하면 고칠 수는 있다.’ 히무로는 이번에도 고개를 젓는다. 의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형외과의 수술이라는 건 원래 기량을 되찾아 주는 역할을 하지는 못해요. 하지만 하지 않으면 점점 부상이 나빠져 갈 뿐이라는 거, 알고는 계시죠?”
“네. 그런데 굳이 수술까지 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요. 더는 선수도 아니고.”
부드럽지만 단호한 얼굴에 의사는 미묘한 표정이 된다. 히무로는 줄곧 수술을 할 것도 아니면서 정기 검진에는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참여해 왔다. 언젠가는 의사가 수술과 재활에서 생길 고통이 무서운 것이냐고 물어 온 적이 있었다. 히무로는 대답했었다. 아뇨, 저한테는 농구를 뺏기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없어요. 온화하게 웃으면서, 평온한 얼굴로. 의사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의사가 보고 있던 히무로의 랩 차트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히무로 씨, 사실 부상에 비해 통증이 심한 편인 거 알고 있어요?”
“꾀병이라는 소리에요 그거?”
“아뇨. 정신적인 문제가 수반되어 있을 수 있다는 거죠.”
히무로의 웃는 얼굴에는 변화가 없다.
“그래서요?”
“주치의로서는 상담을 권해보고 싶지만, 역시 생각이 없으시겠죠?”
“아직은 필요한 걸 못 느끼겠는데요.”
의사가 한숨을 푹 쉰다. 수술도 싫다, 상담도 싫다. 아프긴 하다. 하지만 큰 상관은 없다. 하긴 제가 생각해도 이렇게 까다롭게 구는 환자는 피곤할 게 뻔해서, 히무로는 마냥 웃고 만다. 약만이라도 잘 챙겨 드시고, 수술 안 받으셔도 좋고 상담도 안 받으셔도 좋으니까 지금까지처럼 검진만이라도 꼭 오라고 의사는 당부했다. 히무로는 병원을 나섰다.
대학리그 시절에 발목에 부상을 얻었다.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었지만, 무리를 하거나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면 욱신거리는 고통이 밀려와 달리는 것조차 할 수가 없었다. 당시 히무로는 대학 리그에서 경기를 뛰던 현역 아마추어 선수였고 카가미는 대학을 가지 않은 채 곧바로 프로에 입적했었다. 둘이 경기를 뛰는 곳이 달랐기 때문에, 서로 마주칠 일은 없었다. 다만 히무로가 뜨는 신인 정도의 취급을 받고 있을 때 카가미는 팀의 에이스로, 주전으로, 영웅으로 활약했다. 어릴 적부터 보였던 실력의 차는 성인이 되자 더욱 현저해져 있었다. 카가미는 스타였다. 농구의 신에게 사랑받는 그 남자는 코트에서 그 누구보다 반짝였다. 프로팀에 입적하자마자 수많은 상과 트로피를 휩쓰는 남자는 마치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다. 자신이 부상을 입은 것은 바로 그 즈음 이었다.
카가미가 세 번째 MVP를 받고 나서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질이 나쁘기로 유명한 선수가 히무로의 마크로 붙어 왔다. 실력으로는 애당초 싸움이 되지 않는 상대다. 얕보는 일 없이 실력으로 밀어 붙일 생각이었다. 상대 팀은 히무로의 활약에 손쓰지 못하고 밀리고 있었다. 4 쿼터의 후반, 점수 차는 15점. 방심하지만 않으면 특별한 일 없이 이길 수 있을 터였다. 상대 팀의 마지막 발악 같은 몸싸움이 격렬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몸싸움의 와중에, 히무로의 마크였던 선수가 속닥거리듯이 히무로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다. ‘평생 패배하면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이야?’
질 낮은 도발이었다. 큭큭대는 웃음소리가 상대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저열했다. 평정이 흔들린 것도 아니었고 흔들릴 만한 수준의 도발도 아니었다. 분명 그랬다. 대꾸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한 순간, 아차 하는 한 순간에 히무로는 상대편의 몸싸움에서 떠밀렸고 상대방의 다리에 잘못 꺾인 발목이 강하게 부딪히면서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대학 리그를 뛰고 나서 처음으로 얻은 부상이었다. 어차피 시합 종료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히무로는 그대로 퇴장했고, 히무로의 팀은 이겼다. 그러나 히무로는 이후 다시는 코트에 서지 못했다.
정작 히무로 자신은 제 부상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당시 더 법석을 떤 것은 카가미였다. 카가미는 유명하다는 병원 수십 곳을 히무로를 억지로 끌고 돌아다니면서, 몇 번이고 히무로에게 수술을 받을 것을 권했다. 히무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종의 사건을 겪고 나서는 부상을 핑계로 선수생활도 은퇴했다. 수많은 재능 있는 젊은 신인 중에 하나에 불과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잊히는 것은 매우 빨랐다. 재수 없는 꼬마 녀석의 말마따나 농구에 관심 없는 아주머니들은 자신이 전직 농구선수라는 것조차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마음을 다해 좋아한다는 건 이렇게나 힘이 없었다. 시간에 쓸려 맥없이 무너지는, 고작 그 정도만이 제가 쌓을 수 있었던 전부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지금과 다른 곳에 서있을 수 있었을까.
가끔은 궁금했다. 이제와선 너무 늦은 이야기지만 특히 오늘처럼 스스로의 미적지근함에 지치는 날에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미련을 버렸더라면 걸어갈 수 있었을 다른 길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히무로는 병원을 나서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서늘한 공기가 여름이 끝났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치열하지도, 분하지도, 힘겹지도 않은 여름이 또 한 번 지나갔다. 날짜는 세지 않았다. 그러고 싶을 만큼 하루하루가 의미 있지도 않았으니까. 계절이 막힘없이 순환하고, 모두가 앞을 향해 전진하는 상황에서 오로지 자신만이 혼자 남아 우두커니 멈춰서 있었다.
걸음을 더 빨리 옮겼다. 안 가본 길만 골라서 걷고 있으려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낯선 곳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담장을 따라 빙글빙글 내키는 대로 돌았다. 어서 빨리 발목이 아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병원에 다녀오는 날은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심해져야만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언젠가부터 생긴 불문율이었다.
아픈 발을 절뚝절뚝 이끌며 곱씹는, 바보 같은 행동에 대한 알싸한 후회가 그는 퍽 좋았다. 코트를 떠나던 때 느끼던 것과 비슷했다. 자신을 좀먹고 있는 것. 미련과 고집 같은 이름이 붙은 것들을 통증으로 치환해서 느끼고 있다 보면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알고도 포기하지 못했던 욕심의 종착지는 동정도 가지 않을 만큼 흔해빠진 결말이었다. 세상에 별처럼 많은 천재와 그보다도 많은 범인들의 마지막이 조금 빠르게 찾아왔을 뿐인 것이다.
상념에 푹 절여진 채 발은 쉼 없이 움직였다. 허리께까지 오는 담장을 한 손으로 쓸면서 이렇게 길게 담장이 세워질 필요가 있었을까 따위를 생각하던 차였다. 아직 만족할 만큼 혹사시키지 못한 발목이 갑작스레 멈추어 섰다. 마주오던 사내 녀석 때문이었다. 상대방도 저를 알아봤는지 우두커니 멈춰서있었다. 미묘한 시선이 오고갔다. 굳이 여기에서까지 마주칠 필요는 없는데. 가벼운 성가심을 느끼며 히무로는 인사대신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교복. 정말 안어울리네.”
“남이사.”
녀석의 얼굴에 언뜻 낭패감이 떠올랐다 사라진 것 같았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오늘은 마주치는 모든 가로등에게까지 심술을 부리고 싶은 기분이니까.
언제나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모습만 보다가 처음으로 본 교복차림이었다. 그리고 옅은 채도의 셔츠와 하얀 재킷은 놀랄 만큼 녀석과 어울리지 않았다. 히무로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하얀색이 그렇게까지 안 받기 힘든데…. 다른 학교를 가지 그랬어.”
“바보냐. 무슨 교복 때문에 학교를 바꿔.”
한층 더 인상이 험악해진 녀석은 그르릉거리며 맞받아쳤지만 말없이 키득거리는 히무로에게 그 이상 따지고 들진 않았다. 막상 만났을 땐 말도 안 되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계속 손으로 짚어오던 담장이 학교였던 모양이었다. 같은 교복을 입은 무리들이 두엇 더 지나갔다. 대충 그들에게 시선을 주다 히무로는 다시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럼 만나서 반갑,진 않았지만, 어쨌든 갈길 가. 아오미네군.”
“…내 이름 알고 있었어?”
“명찰에 쓰여 있네. 거기.”
턱짓으로 대충 명찰을 가리키며 히무로는 인사 없이 걸음을 뗐다. 두어 걸음 떨어진 뒤에서 아오미네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 아니거든? 왜 거기로 가.”
“별로 상관없잖아.”
“집이랑 정반대로 가고 있는데 뭘 상관이 없어. 설마 지금 길 잃은 거야?”
“그러니까. 너랑 상관이 없다고 말하잖아?”
“아 그러셔.”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아오미네는 성큼성큼 잘도 따라왔다. 떨쳐버리는데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두었더니 바로 옆까지 바짝 따라붙은 녀석이 별안간 진로를 막아섰다.
“근데 거기로 가면 뒷산이거든요? 딱히 등산하기에 적당한 옷차림도 아닌데다가, 발목 슬슬 경련날 것 같은데 집이나 가지 그래?”
“…….”
“뭐? 보이는 걸 어떡하라고?”
성가신 꼬맹이 같으니.
딱히 애들을 싫어한다고 말할 건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다. 게다가 사사건건 저에게 상관하려고 드는 상대라면 애고 어른이고 간에 짜증부터 솟는 게 당연했다. 단정한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가, 아주 짧은 몇 초 만에 다시 원래의 웃던 낯으로 돌아온다. 히무로는 꽤 온화한 어투로 대화를 잘랐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낯익은 이웃사촌이 헤매는 꼴을 보면 도우라고 배워서 말야.”
어려서 그런가. 아니면 성격이 원체 남 눈치 보는 편이 아닌가. 밀어내는 말에도 밀려날 줄을 모르는 오지랖에 히무로는 조금 강경한 어투로 다시 말했다.
“낯익은 이웃사촌은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하시니 가던 길 가.”
“사람이 도움의 손길을 뻗으면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하는 거라고 못 배웠어? 거 참 성격 한 번 아름답네.”
“나는 도와달라고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녀석한테 저도 모르는 새 무슨 실례라도 저지른 걸까. 어떤 은원관계도 없는 상대에게 자꾸만 부딪혀 오는 어린 아이의 오지랖이 솔직히 유치하고 피곤했다. 열 살은 어린 아이와 말다툼이나 벌이고 있는 꼴이라니. 꼭 기분이 좋지 않고 머리가 복잡할 때 쓸모없는 감정소모가 생기는 거 무슨 공식 같은 걸까. 더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슬쩍 비켜가려 했더니 녀석이 곧장 따라붙는다. 대체 얘는 뭐 이리 한가한 거지.
“의도는 참 고마운데, 적당히 해 줬으면 좋겠어. 원하지 않는 오지랖은 참견이고 방해야. 할 말 끝났으니까 길 좀 비켜주시지?”
“말하는 꼴 보게. 애초 신경 쓰이게 한 쪽이 누군데?”
그러니까, 나는 너한테 신경 써 달라고 한 적이 없다 이 말입니다. 진심으로 귀찮다는 생각이 몰려들었다. 얘는 대체 왜 이렇게 눈치 없이 구는 지 알 수가 없다. 중학생이면 한창 노느라 바쁠 시기일 텐데 왜 혼자 친하지도 않은 옆집 사람 따위한테 시비를 터는 걸까. 저가 녀석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걸까 생각해 봐도, 얼마 전부터 소소하게 말을 트기 시작한 것 말고는 기억나질 않는다. 게다가 항상 실랑이를 걸어 온 것도 저쪽이고 말이다. 심심한 걸까. 이성한테 관심 많을 시기니 여자 친구라도 만들면 좋을 텐데. 새삼 히무로는 녀석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중학생답지 않은 큰 키에 까무잡잡하긴 해도 시원시원한 외모, 지적이지는 않지만 잘 잡힌 몸매와 근육을 보면 하드웨어는 그다지 꿀리지 않을 것 같은데 하는 말본새를 보아하니 여자 친구는커녕 동정이 분명했다. 어리네. 말끄러미 쳐다보는 히무로의 시선을 읽었는지 녀석이 발끈하며,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뭐냐 호모.”
“…….”
“왜…. 뭐.”
순간 머릿속에 방어기제가 빠르게 돌았다. 스위치가 올라간 것처럼 여태까지 신경 쓰지 않았던 녀석의 표정 손끝 발끝 입술 모든 것들이 거슬렸다. 대충 무해한 느낌으로 방치해두고 있던 옆집 녀석은 아차 하는 순간 깊은 곳 어딘가를 자극시켰다. 히무로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말없이 녀석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숨기려했겠지만 거리가 한 뼘 가까워지는 순간, 주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부러 입술을 꾸욱 물었다가 무덤덤한 말투로 뱉어냈다.
“아오미네군. 혹시 해본 적 있어?”
듣지 않아도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던지며 히무로는 의식적으로 눈꼬리를 휘었다. 갈 곳 없는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꺼내서 녀석의 셔츠 카라를 붙잡았다. 손가락에 슬며시 닿은 녀석의 체온이 높았다. 아마 상대방 입장에선 반대로 서늘하게 느껴졌을 게 분명했다. 느리게 손등으로 아오미네의 목을 훑으며 조금 더 노골적으로 물었다.
“남자랑 자본 적 있냐고.”
“…있겠냐!”
아오미네는 버럭 소리를 치며 잡혀져 있던 히무로의 손을 뿌리쳤다. 목소리에서 한껏 당황스러움이 묻어나온 그를 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신경 쓰인다며? 그런 의미 아니었어?”
“누가…!”
“치대는걸 보니 너도 그쪽인가 했지. 내가 그런 쪽엔 눈치가 별로 없는 편이라, 돌리고 돌린 섹스어필은 못 읽을 때가 많아.”
히무로는 손목을 의미 없이 두어번 털어보았다. 뿌리치는 손이 생각보다 매서웠다. 이상 없이 작동하는 손목을 무의식적으로 확인하던 히무로는 어이가 없어져서 미간을 찡그렸다. 다 끝난 마당에 그깟 손목 좀 망가지면 어떻다고. 농구 하던 때의 버릇이 아직 다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오미네는 크게 얻어맞기라도 한 얼굴로 우두망찰하게 서있었다.
“…….”
“궁금한 거면 한 번 대줄 수도 있고. 어린이에게 성정체성을 일깨워주는 셈 치고 딱히 답례는 안 받을게. 이웃사촌 서비스.”
“…그딴 거 흥미 없어. 누굴 싸구려취급이야.”
도발은 질이 낮았고 불쾌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아오미네는 조금 화난 목소리였다. 히무로는 대답 없이 녀석의 열 받은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일자로 다물어진 입매가 금방이라도 들이받을 것처럼 사나웠다. 원래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험한 표정까지 더해지니 사람 두엇쯤은 가뿐히 묻어봤을 것 같은 위압감을 풍겼다. 하드웨어란 참 중요하구나, 생각하면서도 히무로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설령 제가 온갖 불법적인 일에 연루되어있거나 칼자루를 품에 안고 다니는 범죄자라 해도 과연 아주머니가 무서워할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소박한 의문이 들었다. 해코지라도 하려다간 아드님에게 제가 먼저 당할 것 같은데 말이에요.
들어줄 사람 없는 혼잣말을 떠올리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구두코를 들어 바닥을 툭툭 두드리며 손을 다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아니면, 네 갈길 가.”
튀어나온 목소리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건조했다. 만지면 버석거릴 것 같은 대답 뒤로, 빠드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오미네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어금니를 씹으며 돌아섰다.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다 어느덧 모퉁이를 돌아 아예 사라져버렸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지만 생각보단 녀석의 인내심이 좋은 것에 히무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내가 저 나이였으면… 일단 주먹부터 날리고 봤겠지.
나이가 들면서 많이 유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히무로는 주먹 쓰는 일에 서슴없었다. 집에서 호모치정극이 일어났을 때도 경찰에 신고하긴 했지만 출동 시간을 기다릴 수가 없어서 폭력으로 한 발 먼저 해결을 보았더랬다. 녀석들은 아마 하지도 않은 폭행죄까지 뒤집어썼을 것이다.
‘어차피 쌍방과실일 테니 폭행정도 얹어져도 시시비비 가리기엔 딱히 지장 없잖아?’
그렇게 말하며 두 녀석을 나란히 걷어차던 그때, 망설임은 전혀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몸을 섞은 상대라는 건 그에게 있어 일말의 가치도 없는 존재였다.
걸음을 옮기려는데 순간적으로 발목이 시큰해서 히무로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많이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올라오는 통증이 새삼스러웠다. 의사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정신적인 문제가 수반되어 있을 수….'
생각하는 순간 또다시 아픔이 올라왔다.
‘준비하는 대로 들어갈 것 같아.’
어느새 의사의 목소리는 남자의 것으로 변모해있었다.
‘아마 한 달이나 두 달쯤.’
남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저에게 있어서 동생 이상의 무언가였다. 온전히 자신이 바라온 모습 그대로 빚어진 그는 말하자면 꿈이었다. 소망이나, 그에 준하는 어떤 귀한 것.
그렇기 때문에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소중하게 아끼는 이였으니, 분명 그럴 수도 있었다. 못할 이유가 없었다.
남자의 성장을 내 것처럼 기뻐하며, 남자의 승리에 순수하게 벅차하며, 온전히 그의 영광을 축하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코트에서 밀려나서 멍하니 서있는 지금에 와서도 대리만족이나마 느낄 수 있었을 테지만….
하지만…. 마음속에 타버리지 못한 열망이 저를 향해 울부짖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하냐며. 끝끝내 연소되지 못한 채로, 열망은 비명을 질렀다.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비명은 눈물과 섞여 자신을 채근했다. 나를 잊으면 안 된다고. 너는 나를 결코 버릴 수 없을 거라고. 이제와 포기하면 나는 어디에 숨어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하냐며.
그 울음소리가 족쇄가 되어 자신을 점점 벼랑으로 몰고 갔다.
“…….”
히무로는 우두커니 서서 눈을 감았다. 망가진 발목이 그를 현실로 데리고 돌아왔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통증이 저를 지탱했다.
한참을 못 박은 듯 서있던 그때에, 문득 낯선 운동화가 시야에 걸려 들어왔다. 검은 농구화. 조던이었다.
“짜증나, 진짜.”
농구화의 주인은 그 앞에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았다. 그리고 가방을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내더니 히무로의 신발을 벗겼다.
“내가 진짜…. 눈에 거슬려서 진짜.”
있는 대로 신경질을 내면서 그는 히무로의 발목에 검은 밴드를 끼우더니 벨크로를 채웠다. 발목 보호대였다. 손에 익을 대로 익은 물건인지 아프지 않게 길이를 조정하는 손길이 익숙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꼼꼼하게 당겨진 밴드가 지지대를 강하게 고정시켰다.
“재수 없는 걸로도 모자라서 발은 또 왜 지랄 맞아서, 사람 정신 사납게.”
분이 풀린 건 아닌지 여전히 씩씩거리는 녀석의 어깨가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삭히지 못한 분통을 끌어안고도 녀석의 손길은 부상자를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그가 하는 양을 말없이 지켜보던 히무로는 제 앞에 앉은 아오미네의 어깨를 살짝 쥐었다.
농구, 하는구나. 머리는 부작용처럼 그것만 떠올랐다. 어깨도 좋고, 팔도 탄탄했다. 중학생인 걸 감안하면 신장도, 체격도 나쁘지 않았고, 그리고, 그리고 또….
“그쪽 말야.”
“어…어?”
“그런 표정 좀 안하면 안 돼?”
신발을 다시 신기며 아오미네는 히무로를 올려다보았다. 한 쪽 눈이 찡그려진 채였다. 자신의 눈썹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그는 말했다.
“그런 표정 지을 때마다 엄청 짜증나. 되게 거슬려.”
남자가 그런 의미 아니냐며 콕 찍어서 입에 담았던 ‘신경이 쓰인다.’는 표현은 어쩐지 입에 담기 껄끄러워져서 아오미네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굳이 자신의 마음과 가장 가까운 감정을 고르자면 짜증 난다보단, 역시 신경 쓰인다가 옳다고 생각했다.
-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복도에서 담배피우는 모습이었다. 단정하고 수려하게 생긴 남자가 못지않게 길고 예쁜 손가락으로 담배를 붙잡는 순간은, 영화라도 보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낡고 좁은 아파트 복도를 금방이라도 TV속으로 끌고 들어갈 것만 같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기대어 남자가 담배를 다 태우고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았더랬다. 버려진 꽁초를 주워 담던, 영화엔 절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일을 하는 동안에도 남자의 묘한 분위기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누군가의 외견에 그렇게까지 마음이 홀리던 일은 처음 겪어본 경험이었다.
그 얼굴을 잊기가 어려웠다.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이후로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그를 따랐다. 다가가 말을 걸지는 않았어도 그의 모습을 엿본 일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주말의 엘리베이터라던가 늦은 저녁의 아파트 앞 벤치 앞에서, 쓸쓸히 앉은 그의 실루엣을 몇 번이고 숨죽인 채 보았다. 홀로 오도카니 앉아 오래도록 맥주를 홀짝이는 그 목울대, 턱 선을 홀린 것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뼛속 깊이 외로운 모습에 눈길이 끌렸다. 스스로 수상쩍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각에 민망해 하면서도 왜 그만두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미련이 철철 넘치는 얼굴을 할 거면 그렇게 나른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듯 손 놓은 표정을 할 거면 금방이라도 저 벼랑 밑으로 추락해버릴 것만 같은 그 시선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슬아슬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훔쳐보고 있으면 저도 같이 저 밑으로 한없이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이 아찔했다.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 몇 번이고 그를 훔쳐보던 발걸음을 돌렸다. 그럼에도 세상을 적당히 포기하고 살아간다는 듯 한 그 특유의 분위기, 그것만은 도저히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성인 남자의 얼굴을 하고 짐짓 놀리는 게 뻔 한 얼굴로 제게 무안을 주던 그 남자에게 되돌아갔던 것은.
“있잖아. 당신 대체 뭘 포기하고 있는 거야?”
“…어?….”
“굉장히 후회하는 얼굴이잖아.”
아오미네는 툭툭 던지듯이 말했고 그와 함께 히무로의 얼굴이 굳어가기 시작한다. 내가 뭘 버렸냐고? 굳이 마주쳐오는 아오미네의 곧은 시선이 폭력적이다. 굳이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들여다보려는 거친 손길 같았다. 자신의 가장 깊은 부분을 들추고 그 썩어 문드러진 제 속을 전부 간파해 낼 것처럼, 날카로운 다정함이었다. 저 눈빛과 같은 것을 히무로는 본 일이 있다. 이 순간 가장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서.
그 날, 히무로는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분으로 이따금 찾던 가게에서 새벽 늦게까지 혼자 술을 마셨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생각이라는 걸 할수록 진창인 제 삶만 돌이키게 될 것 같았다. 내내 핸드폰을 꺼 놨었다. 카가미에게 어떤 말을 듣게 될지 너무나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새벽 세시를 조금 남겼을 무렵, 술집 주인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 왔다. 저기, 히무로 씨 바꿔달라고. 주인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자신을 찾을 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저를 찾을 이유도 없을 텐데 하는 생각에 의아함이 앞섰다. 주인이 내민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너머의 목소리는, 남자였다.
- 타츠야.
- …….
- …듣고 있어?
- 응.
- 지금 갈게. 기다려.
- …어떻게 알았어.
- 내가 너를 왜 몰라.
왈칵 울음이 터질 듯이 눈이 뜨거웠다. 내가 너를 왜 몰라. 대단한 말도 아니었는데 그냥 무너지듯이 울컥했다. 의식하기도 전에, 전에도 몇 번이고 그랬다는 듯이 자연스레 응석이 흘러나왔다.
- ……타이가. 나, 집에 못 가겠어.
틈을 두지도 않고 대답이 돌아왔다.
- 알아.
얼마나 마셨는지 눈앞의 병을 세어 보았다. 몇 병은 주인장이 치웠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제 본래 주량을 고려한다면 그다지 많은 양도 아니다. 그런데 집에 못 가겠다고? 히무로는 전화를 끊자마자 제가 한 소리에 대해 조소했다. 남자는 아마 제가 취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눈치 챘을 것이다. 그래도 오겠지. 와서는 또 그 남자답게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서 제가 제 침대에 눕는 꼴을 보고서야 집에 돌아갈 것이다. 그런 남자였으니까. 그래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떼를 썼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다정함을 이용한 것이다. 그는,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매정해지지는 못한다. 그게 남자의 근간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혹시, 아주 어쩌면,
만약에 남자가 자신을 경멸하고 있으면 어쩌지?
전화를 끊고 삼십 분쯤 후에 남자가 제 눈앞에 나타났다. 매우 걱정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절친한 친구의 모습을 하고선 짐짓 취한 척을 하는 저를 차로 옮겼었다. 차 문을 닫고 차키를 꽂아 시동을 걸기 전에, 남자는 말없이 잠시간 침묵했다. 남자의 낮은 한숨이 들렸다. 남자가 저에게 그랬었다. 왜 그렇게 항상 혼자서만 힘들어하는 건데. 내려다보던 그 때의 시선이 꼭, 지금의 녀석 같았다. 내 속에 담고 있는 모든 어둡고 비밀스런 일면들을 꿰뚫어 볼 것 같이.
히무로는 천천히 발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새삼 녀석에게서까지 남자를 떠올리는 자신이 조금 비겁하게 느껴졌다.
버렸다. 그래 이미 버렸으니까….
“후회해도 어쩔 수 없어.”
녀석이 일어서자 시선이 훌쩍 위로 올라왔다. 히무로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속삭였다. 다짐하듯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일깨워주듯이.
“처음부터 욕심이었으니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녀석은 맘에 차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팔목을 붙잡고 걷기 시작했다.
“욕심인지 아닌지, 누가 정하는데?”
보폭이 커졌다 작아졌다 제멋대로였지만 와중에도 자신의 속도를 맞추고 있어서 따라가기 어렵지는 않았다. 아주 작은 차이로 자신의 발 앞에서 사라지는 농구화 뒤꿈치를 하릴없이 응시하며 히무로는 대답했다.
“내가.”
그리고는 조금 웃었다. 말하고 보니 조금 우스웠다. 자신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욕심이라고 여기는 모습이 초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쌍했다. 납득하기 위해, 포기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버둥거리는 스스로가 딱했다.
“내가 애초부터 주어지지 않은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서….”
“…….”
“…그러면 안 돼? 노력이 부족한 거라고 말할 거야?”
웃음소리는 힘없이 사그라졌다. 보호대를 한 발목에선 한결 가벼워진 통증이 사라질 듯 없어질 듯 쫒아왔다. 집에도 비슷한 게 있었다. 병원에서 굳이 권하기에 사두기만 했던 것이었다. 어디서 잠들어 있을지도 모를 그게 문득 생각이 났다.
“마음대로 해. 납득은 내가 아니라 그쪽이 하는 거잖아.”
“…비꼬는 거야?”
“신경도 안 쓰면서.”
“그건 그래.”
아파트가 보이기 시작하는 시점에선 손을 떼어냈다. 이미 충분히 넘치는 것 같은데, 이 이상의 추문은 사양이었다. 싫은 표정을 지어보이긴 했지만 아오미네도 딱히 손을 다시 잡거나 하진 않았다. 그들은 마치 모르는 사이처럼 나란히 입구를 들어서서,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같은 층에서 내려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마치 오늘 처음 본 사이처럼.
히무로는 문을 열기 직전, 멀어지는 녀석의 뒤통수를 잠시 쳐다보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
아오미네는 제 방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아니, 천장을 보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그 위로 남자의 이미지가 겹쳤다. 누운 지는 한참이었지만 영 잠이 오질 않았다. 진짜 바보 같은 생각인 것은 아는데. 뭘 포기하고 있는 거야, 하고 물었을 때 남자는 꼭… 울 것 같았다. 울먹이는 목소리도 아니었고 얼굴도 평상시의 남자처럼 재수 없을 만큼 평온했는데 이상하게 그렇게 보였다. 자신보다 일고여덟 살은 더 많을 성인 남자가 우는 꼴이 왜인지 통 보기가 힘들 거 같아서, 아오미네는 입을 다물고 남자의 혼잣말에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말았었다.
신경이 쓰였다. 그것은 어떻게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남자의 절뚝이는 다리, 아픈 표정 같은 것들. 그대로 놓아두고 돌아서면 입 안이 깔깔해 견딜 수가 없을 거 같았다. 그래서 괜히 유치하게 굴고 주변을 뱅뱅 맴돌았다. 마침 발목 보호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아오미네는 아픈 다리로 절뚝이며 거리를 헤매는 남자를 사실 여러 번 봤다. 기가 차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발목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남자는 걷고 있었다. 그 꼴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짜증이 치밀어서 속이 터졌었다. 바보도 아니고, 애도 아니고, 아프면 아픈 척이라도 할 것이지.
기실 아오미네는 처음부터 욕심이었기 때문에 포기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남자의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노력하면 그만큼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힘이 든 만큼 결과는 따라오게 되어있다. 아오미네는 단 한 번도 그 생각에 배반당했던 일이 없었다. 손을 뻗어서 붙잡지 못할 것이 없다, 아오미네는 늘 그렇게 생각해왔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껏 아오미네가 간절히 바라왔던 것들은 어찌되었든 이루어낼 수 있었다. 좌절은, 아오미네에게 있어 가장 먼 단어였다. 언제나. 그러니까 아마 다른 이들이 저에게 그렇게 말해 왔다면 우는 소리 한다고 일축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남자에게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왜? 남자가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 이름도 모를 그 남자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대체 그게 뭐가 어쨌다고?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남자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처음 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오미네는 남자가 트로피며 농구화, 농구공 같은 농구 비품들을 가져다 분리수거 통에 버리는 것을 봤었다. 농구를 했었구나, 그 때의 감상은 단순했었다. 그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남자가 버리고 열 걸음도 채 못 가서 다시 자신이 가져다 놓은 비품들을 주섬주섬 챙겨들었기 때문이다.
그 때의 남자가 무슨 얼굴을 했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 확실한 건 웃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였다. 남자는 가져다 버릴 때의 거친 행동과는 달리 아주 느리게, 소중하다는 듯이, 얼핏 낡아서 응당 버려야만 할 것처럼 보이는 농구화를 집어 들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참을 그 물건들을 껴안고 바라보다가, 다시 내려놓고 열댓 걸음. 결국은 다시 돌아와서 조심스레 챙기기를 여러 번. 무슨 바보짓인가 하면서도 그 모습이 참 위태위태해 보여서 아오미네는 내심 속이 좋지를 않았다. 그 행동을 지켜보는 것에 지쳐 다섯 번째 다시 물건을 챙겨든 남자의 곁을 지나가면서 슬쩍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단정한 얼굴이 미련과 고통과 절망으로 점철되는 모습을. 이를 악물며 다시 물건들을 내려놓는 모습을.
남자는 다시 손을 털고 자신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같은 층까지 올라왔는데, 그 때 남자의 표정이 꼭 아까 같았다.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었다. 그것이 줄곧 마음에 걸렸었다.
잠을 설친 다음 날 아침, 가능한 마주치지 않길 바랐던 아오미네의 희망사항과는 달리 엘리베이터 앞에서 딱 마주쳐 버린 둘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아오미네는 넥타이를 매는 척 거울 앞에 서서 뒤에 선 남자의 얼굴을 살핀다. 혹시나 어제 같은 얼굴은 아닐지. 남자는 늘 그래왔듯 아무렇지도 않은 평온한 얼굴이다. 슬쩍 시선을 내려 남자의 발목을 살폈다. 살짝 통이 남는 청바지 사이로 어제 자신이 감아 줬던 발목 보호대가 언뜻 보여 뿌듯했다. 아오미네는 짐짓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그 발을 하고서 잘도 돌아다닌다. 걸어 다닐 만 한가보네?”
“일상생활에 지장 있을 정돈 아냐.”
자신에게 시선도 주지 않는 남자는 썩 대화를 이어갈 의지가 없어보였다. 아오미네는 벽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건데. 이쯤 됐으면 나랑 통성명 하고 싶지 않아?”
“별로.”
“마음에 병이라도 있나. 사회성이 대체 왜 그 모양이야.”
“내 사회성이 어떻든 그건 어디까지나 내 문제니 신경 쓰지 마.”
말투가 퍽 부드러웠다. 재수 털리는 말을 하면서도 그럴 수가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닌 것 같고, 본래 익어있던 억양 자체가 그런 모양인지 남자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듯 기분 나쁜 소리를 하는 재주가 있었다.
아오미네는 배신감을 느낄 정도로 둘도 없이 상냥한 마스크를 가진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트러블과는 관계없는 인생이나 살 것 같은 얼굴을 한 주제에 의외로 성격이 나빴다. 남의 기분을 건드리는 것에 한 점 망설임이 없는 화법이라니.
전화를 끊으며 표정을 깨끗하게 지우던 그때의 얼굴이 문득 생각났다. 고작 웃음이 사라졌을 뿐이었는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분위기가 달라졌었다. 차분하게 내리깐 눈엔 어울리지도 않는 권태가 치덕치덕 묻어있었다.
“가만 보면 친구는 그쪽이 없을 것 같아.”
“그것도. 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고.”
아오미네는 시선을 돌려 남자와 나란히 앞을 보았다. 대화가 조금도 맞물리지 않은 게 평행선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그쪽도 그럼 내가 신경 쓰는 거에 신경 쓰지 말던가.”
남자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 것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춰 섰다. 뭐라고 쏘아붙이려다 문이 열리는 걸 보니 다 귀찮아졌는지 남자는 대구하지 않았다. 아오미네는 입을 다물고 밖으로 걸음을 막 옮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무방비한 남자는 자신의 옆자리로 뒷걸음질 치며 도로 끌려왔다. 눈이 세 번 깜빡이는 동안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닫혔다.
“지금 이거, 뭐야?”
의아한 목소리가 살짝 얼빠진 얼굴위로 덧씌워졌다.
“오늘, 집에 언제 돌아와?”
묻자 남자는 한결 더 당혹스러워하며 잡혀있던 팔을 뒤로 당겨 풀면서 얼떨떨하게 답했다. 일곱 시. 아오미네는 본능대로 움직이는 자신의 입을 막지 않았다.
“여덟 시쯤 갈 테니까.”
“…뭐?”
“나랑 영화나 보던가.”
“……왜?”
“아니면 게임도 괜찮고, 싫으면 잡지나 책 같은 거 읽던가.”
“그러니까… 너랑 내가 왜.”
“아 뭐. 이유가 그렇게 중요해? 대충 넘어가.”
꺼내놓고 나니 민망해져 버려서, 아오미네는 답도 듣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떴다. 황망히 아오미네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이 제 뒤통수에 께적지근하게 매달려 오는 것만 같다. 아오미네는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솔직히 나오는 대로 던져 본 말이다. 아오미네는 아침에 제가 던져 놓은 폭탄 발언을 계속 곱씹으면서 학교에서 내내 멍을 때렸다. 평상시에도 수업에 관심이 있던 편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관심이 없는 걸 떠나서 아예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은 수준이었다. 아침부터 몇 번이고 주의를 주었던 미도리마는 질려서 나가 떨어졌고, 점심시간이 된 지금은 키세가 넋이 나간 아오미네의 모습을 살피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아오미넷치~ 여자 생각해요?”
“여자 생각 따위가 아니라 아예 정신이 나갔다는 거야. 아침부터 계속 저 상태였다는 거야.”
“얼굴까지 굳히고 있으니 오늘은 한층 더 무서운 얼굴이네요.”
팀원들의 비웃음 섞인 말에도 아무 반응이 없다. 도리어 여자네 여자, 저거 여자 문제야 하고 킥킥대던 키세만 그 무반응에 머쓱해져 버렸고, 부원들은 저마다 저 단순무식한 농구바보가 대체 무슨 고민을 저렇게 하나 의아해하고 있었다. 불쑥, 아오미네가 말을 꺼냈다.
“있잖아.”
바닐라 셰이크를 쪽쪽 빨던 쿠로코의 눈동자가 아오미네에게로 향한다. 키세는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있잖아? 하고 되묻고 있다. 관심 없는 표정의 미도리마와, 과자를 먹는 데 정신이 팔린 무라사키바라만이 아오미네의 말을 싹 무시하고 있었다.
“울 것 같은 게 신경이 쓰이는 건 왜 그럴까.”
그 아오미네치고는 진지한 질문이다. 의아해하는 쿠로코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한다. 키세는 아주 신이 나선 역시 여자? 어떤 여자에여 아오미넷치? 하고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었다.
“상대는 그… 내가 전혀 신경 쓸 이유가 없는 녀석이란 말이야? 애당초 이름도 모르는- 아니 키세, 유부녀 이런 거 아니거든? 그게… 그게 아니고. 어쨌든 신경 쓸 이유가 없는 녀석이야. 아 미도리마!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어린애 아니라고! 근데 자꾸… 왠지 지켜보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 그리고 지켜보고 있으면 짜증이 나.”
그럴 때 있다. 반 장난으로 시작했는데 상대가 너무 진지해져 버리면 재미가 없어지는 때. 호들갑을 떨던 키세는 에이 별로 위험한 연애가 아닌가보네. 재미없어 하고 주저앉아 버렸고 쿠로코가 말없이 빨아먹는 쪼오옥, 하는 소리가 부실을 채우고 있었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홀로 불안한 아오미네만이 혼란스러워 하며 이유를 묻고 있었고. 잠자코 듣던 키세가 흐응, 하고 조언하는 것이었다.
“그 쪽을 계속 지겹다 싶을 만큼 따라다니다 보면 대충 알게 되지 않겠슴까.”
“스토커냐?”
“아니, 범죄를 저지르라는 게 아니구요. 그 사람이 어느 순간 선을 그을 때, 아 여기에서 멈춰야겠다. 그러면 그냥 호기심인 거구여. 그 사람이 선을 긋는다 했을 때 섭섭하고 짜증이 나고, 불안해지면 빙고.”
“아?”
“사랑이라구여, 사랑.”
손가락을 흔들며 어린아이에게 한 수 전해준다는 듯 거들먹거리는 키세의 잘 생긴 얼굴을 앞에 두곤, 아오미네는 바보처럼 아? 하는 신음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를 낸다. 그럼, 힘 내 보시죠. 홀로 고민에 빠진 채인 아오미네의 어깨를 툭 툭 치며 키세는 건들거리며 부실을 나선다. 아오미네는 멍하니 앉아 키세의 말을 곱씹었다. ‘사랑이라구여, 사랑.’
시간은 언제와 똑같이 흘렀겠지만 체감만으로는 평소보다 서너 배는 느리게 흐른 것 같았다. 생각할 거리가 있다는 건 시간감각을 굉장히 제멋대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아주 느리게 수업을 듣고, 슬로우 모션처럼 부 활동을 하고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집으로 향하는 길이 평소보다 한참은 길었다.
집으로 들어온 뒤부터는 탁상시계를 눈앞에 끌어다 놓고서 집착증 환자처럼 1분에 한 번씩 분침을 노려보았다. 옷을 못해도 다섯 번쯤은 갈아입으며 아오미네는 지겹게 따라다녀 보라던 키세의 말을 머릿속에서 되풀이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때려치워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던 건 학교 앞에서 마주쳤던 그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주겠다고 말하던 그 얼굴을 봤을 때였다. 마치 자신에겐 그런 일쯤 별로 우습지도 않은 것이라고, 목덜미가 서늘해지도록 무심하게 이야기하던 남자에게서 등을 돌리던 그 순간 이미 한 번은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시계를 흘끔 보았다. 삼십분이 남았다.
아오미네는 하얀색 무지티를 걸치다가 문득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라, 목까지 걸어 넣은 티셔츠를 벗었다. 굉장히 안 어울린다며 피식 웃던 얼굴. 목소리. 손동작. 그것들을 생각하며 그는 검은색 셔츠를 집어 들었다. 팔을 끼워 넣으며 언젠가 사츠키가 ‘다이쨩, 이런 거 입으면 밤에 얼굴이 안보이게 될 거야!’ 라고 외치던 것을 무시했다. 매무새를 정리하며 시계를 봤다. 이십구 분이 남아있었다.
적어도 아오미네는 그때 결국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더랬다. 모퉁이를 돌다말고 정말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도 결국에는…. 그 망가져버린 몸을 이끌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남자를 내버려두지 못하고, 마치 자신이 일러주지 않으면 집을 찾아오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며, 금방이라도 길을 잃을 다섯 살 조카아이를 챙기듯이 그렇게… 아오미네는 남자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아오미네는 방을 나섰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행선지는 대강 근처에 다녀오겠다고만 알렸다. 시간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집에서는 할 일이 없었다. 등 뒤로 닫히는 현관문 소리와 복도 끝 맞은편 집의 현관문 열리는 소리는 거의 동시였다. 불쑥 열렸다 닫히는 옆집 소리에 놀랐는지 남자는 문을 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걸 기다리지 않고 아오미네는 남자를 열려진 문 안으로 밀어 넣으며 자신도 안으로 들어섰다. 우악스런 손길에 비틀거리며 남자는 현관 안쪽으로 구겨져 들어갔다.
“나이스 타이밍.”
씩 웃으며 말하자 히무로는 굉장히 이상한 얼굴을 한 채로 저를 올려다봤다. 소매를 들춰 시계를 본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목 째로 시계를 눈앞에 들이밀었다.
“전혀 아니거든? 아직 일곱 시 반이야.”
“밖에서 벨을 최소한 삼십분 정돈 눌러야 할 각오하고 있었는데 잘 됐잖아?”
“가택침입을 뻔뻔하니 잘도 하네.”
어깨에 닿아있던 손을 매정하게 떼어내면서 남자는 신발을 벗었다. 아침에 하고 있었던 보호대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하여간에 정 없는 건 하나부터 열까지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신도 대충 발만 구겨 넣었던 신발을 벗으며 아오미네는 남자와 나란히 거실로 들어섰다. 겉옷을 식탁의자에 대강 걸친 남자는 손을 성의 없이 내저으며 말했다.
“씻고 나올 테니까 대충 아무데나 앉아있던가.”
집에 잘 모르는 이웃을 앉혀놓고도 전혀 걱정되지 않는지 히무로는 거리낌 없이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아오미네는 홀로 낯선 이의 방 안에 남겨져 있었다. 물소리가 들리고 깔끔한 방 안은 정적으로 가득 찬다. 남자의 샤워는 오래 걸렸다. 기세 좋게 들어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여전히 제가 뭘 저지른 것인가 하는 자괴감은 떠나질 않는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슨 작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늘 생각 같은 건 미뤄 두는 자신의 곤란한 행동력이 이번에는 제대로 좋지 않은 곳을 향한 것 같았다. 가끔은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살라는 사츠키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늘 짜증나고 시끄럽다고 묵살했는데,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소꿉친구의 조언은 역시 흘려들을 게 못 되는 것이다. 망했다 싶어 제 머리를 쥐어 잡기도 하고 안절부절 남자의 거실을 왔다갔다 돌아다니기도 했다. 문득 남자의 방에 생각이 옮는다. 남자 혼자 살기에는 퍽 넓은 집에 남자 혼자 산다고 하기에는 기묘하다 싶을 정도로 깔끔한 방.
생활감이 옅은 집이었다. 사람 사는 집 치고는 지나치게 황량하고 쓸쓸해 보였다. 정돈은 잘 되어 있지만 꾸밈 하나 없는 집이어서일지도 몰랐다. 제 방이었으면 마이짱이나 갖고 싶은 농구화나 하다못해 대충 널브러뜨린 옷가지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이것부터도 참 다르다. 아오미네는 방에서조차 남자와 자신의 차이를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제 가장 먼 극에 있는 게 남자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글쎄, 즐거운 기분은 아니다. 괜히 기분 잡쳤다 싶어 TV라도 켤 겸 리모컨을 찾는데, TV가 놓인 나지막한 탁자 위에 액자 몇 개가 엎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은 심플한 방에 있는 유일한 장식물이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 아오미네는 별 생각 없이 액자를 뒤집었다. 사진은 유명 농구 선수였다. 아무리 TV와는 담을 쌓는 아오미네라 해도 이 남자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는. 카가미 타이가, 최근 MBA로 가게 된 유명 농구스타의 사진이었다. 특유의 점프력으로 상대 선수를 누르고 덩크를 넣고 있는 모습을 찍어 둔 사진이다. 그렇게 안 봤는데 이 사람 동경하는 선수 사진 같은 걸 이렇게 액자에까지 보관해 두는 성격이었나. 왠지 싸가지 없는 남자가 숨겨두고 싶어 하는 귀여운 일면 같은 걸 본 느낌이라, 아오미네는 키득거리며 액자를 원래대로 엎어 둔다. 그래 본인도 쪽팔리겠지.
다음 액자를 뒤집어 보았다. 그 카가미 타이가의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인 것 같았다. 세이린 고교라고 적힌 유니폼을 입고 있는 카가미가 윈터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 카가미라는 남자의 진가를 볼 수 있는 경기라고 했었나, 농구선수들의 스크랩이 취미인 쿠로코의 파일에서 몇 번인가 본 일이 있다. 아무래도 남자는 카가미라는 농구선수의 팬이었던 모양이다. 남자랑 팬질이 이렇게 안 어울릴 줄이야, 싶어 한껏 웃음을 참았다. 액자를 다시 엎어 놓고 돌아서려는데 액자의 뒷면이 조금 걸린다. 뭐지 싶어 살펴보니 사진이 세 장이다. 사진 두 장만큼 빡빡하게 조금 솟아오른 액자틀을 매만지다 아오미네는 홀린 것처럼 액자를 열었다. 달칵 액자가 열린다. 사진을 꺼내 뒤집었다. 찍혀있는 것은 남자와 카가미의 어린 시절 모습이었다. 농구코트에서 농구 연습을 하는 어린 남자와 카가미의 모습.
앳된 얼굴의 남자가 카가미와 1 on 1을 하는 사진, 그리고 카가미가 막 슛을 넣은 찰나의 사진이 늘 세상일에 관심 없다는 듯 한 지금의 남자와는 많이 달랐다. 자신이 모르는 남자의 모습이 신선해서 아오미네는 사진을 진지하게 들여다본다. 늘 카가미의 뒤에 선 남자의 시선은 카가미의 손이 닿은 공이나 카가미의 공이 골대를 유려하게 통과하는 농구대가 아니라 잔뜩 공에 집중하는 카가미의 얼굴이나 들어간 것을 예감하고 주먹을 말아 쥐고 좋아하는 카가미의 등에 닿아 있었다. 앳된 얼굴의 남자는 지금과 똑같이 단정하고 고운 선을 가진 얼굴을 하고서 농구공을 든 채, 지금껏 아오미네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로 웃는다. 그 화사함에 아오미네는 어쩐지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된다.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구나.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오미네는 한참을 남자의 사진을 놓지 못했다. 아오미네가 정신을 차렸던 건, 샤워를 다 마친 남자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뭐하고 있느냐, 하고 물었을 때였다. 아오미네는 당황해서 보고 있던 사진 중 마지막 사진, 그러니까 슛을 넣은 카가미와 그를 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찍힌 그 사진을 몰래 제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짐짓 아무것도 아닌 양 말했다.
“TV, 어떻게 켜?”
“바로 옆에 리모컨 있잖아.”
아, 그 그래? 당황해서 말을 더듬으며 아오미네가 리모컨을 들고 소파 앞에 앉는다. 아오미네의 곁으로 다가온 남자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 진동이 찌릿찌릿하게 제 등을 타고 올라오는 것만 같다.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은 남자의 사진이 들여다보던 제 체온이 남았는지 따뜻했다. 이 민망한 정적을 깨뜨리고 싶어서, 아오미네는 대충 TV를 틀어 자주 보던 스포츠 채널을 틀었다. 한창인 농구 경기의 중계가 흘러나온다. 카사마츠니 이마요시니 하는, 요즘 퍽 잘 나간다는 신인들의 경기인 모양으로 응원 열기가 뜨거웠다. 뒷걸음질 치다 소 잡은 격으로 TV를 켠 것 치고는 꽤 집중할 만한 경기가 나온 것이 아닌가 싶어 아오미네는 조금 안도했다. 경기의 스코어를 살피려는 찰나에 남자가 말했다.
“좋아하는 영화 같은 거 있어?”
“지금 이 경기 괜찮은데 왜?”
“나는 농구는 잘 모르고 관심이 없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뱉는 남자의 말. 표정부터 어조, 어투까지 정말 무심하고 자연스러워서 진짜 같았다. 거짓말. 그게 다 낡은 농구화를 그렇게 소중하게 껴안고 있던 사람이 할 말이냐고 아오미네는 속으로 핀잔을 삭힌다. 아오미네가 쥐고 있던 리모컨을 가져다 히무로가 적당한 예능 프로로 채널을 바꾼다. 실상 무슨 영화 보고 싶으냐고 물었긴 했지만 저 또한 영화를 즐기지 않기 때문에 아오미네가 무슨 대답을 했다고 해도 영화를 틀어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둘은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다지 재밌지 않은 예능을 보고 있었다. 아오미네는 반응 없는 관객들 앞에 홀로 선 광대처럼 홀로 안절부절못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타계해야 할 것은 같은데 무얼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생각이 많은 성격이 아니어서 한참을 침묵하던 아오미네가 불쑥 물었다.
“가족이랑 연락은 잘 안 하나봐?”
“하?”
아니 혼자 사는 거 같아 보여서. 남자는 알 수 없는 얼굴이 된다. 아오미네는 그제야 실수했나는 것을 깨닫고 아니 이렇게 넓은 집에 혼자 사는 거 사실 낭비잖아 하고 횡설수설을 한다. 남자의 생각을 알 수 없는 얼굴에 풉, 하고 아오미네를 향해서는 처음 보여 주는 온화한 미소가 스민다.
“너 아직 중학생이니까 사교성이라는 걸 좀 더 기르는 게 좋겠다.”
“…뭐.”
“다른 사람이랑 같이 살았었는데 그 사람이 나갔어. 혼자 살기에는 확실히 좀, 넓지?”
아, 웃었다. 곱상한 얼굴에 사연 있어 보이는 그 눈매가 곱게 접히며 가늘게 휘는 양. 하필 또 눈 밑에 붙은 그 신경 쓰이는 눈물점. 상상 속에 그렸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피와 질감과 오롯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표정. 그 얼굴에 아오미네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른다. 술에 취한다, 하는 말이 이런 느낌일까. 마셔본 적도 없는 술을 끌어다 생각할 만큼 아오미네는 당황했고 허둥지둥했다. 머리끝 귓불까지 빨개진 아오미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남자가 처음으로 파안대소한다.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전 애인. 당황도 하고 너도 의외로 귀여운 구석도 있네?”
아오미네는 반박하지 못했다. 대신 대답했다.
“…너가 아냐. 아오미네 다이키. 아오미네라고 불러.”
+ 엄청난 일이 되어버린...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길이가 되어버린... 모 사약러 24님과의 장장 14만자의 청빙 릴레이입니다. 오빠를 많이 개롭히고 싶었고 연하공 미네를 보고싶었고.... 미망인같은 오빠한테 반하게 만들고 싶었고.....
다시없을 사약이라는 느낌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스스로를 세뇌시킨 듯 둘이 잘 어울릴 것도 같고??
자세히 보시면 푸른 빛인 곳이 24님 파트, 검은 색이 제 파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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