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ts황] 탄광촌 AU 2
W. 플루핑
키세는 나라 잃은 표정을 하고 카사마츠가 건넨 자판기 커피를 힘겹게 쥐었다. 마찬가지로 카사마츠의 정장 자켓을 걸친 채 카사마츠가 안내한 의자에 얌전히 앉는다. 아까 그 자신감 과잉의 여자와는 아주 딴판이다. 마주앉은 카사마츠는 이 여자를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달래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키세가 뜻 모를 말을 했다.
“내 철밥통이… 내 인생… 망조…”
당췌 여자언어라는 것은 무슨 뜻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 카사마츠는 침묵했다.
“골프… 신상 샤넬백… 호모… 결혼…”
그러더니 심지어 눈에 가득 눈물까지 고이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놈의 라이벌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없게 되었다는 분노의 눈물이었지만, 쑥맥 카사마츠가 알 리가 없다. 카사마츠는 키세의 눈물을 실연 정도로 해석했다. 그래. 짝사랑 힘든 일이지. 그것도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차였다면 더더욱. 어쨌든 키세는 그 거죽만큼은 아주 상등품이었기 때문에, 딱히 그녀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카사마츠라고 해도 닭똥 같은 눈물을 또륵또륵 눈물을 흘리고 있는(분노를 삭히고 있는) 초미녀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우는 여자는 대체 어떻게 달래야 하는가. 그건 뭐랄까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박사 논문보다도 어려운 문제였다. 한참을 머리를 쥐어뜯으며 속으로 고뇌하던 카사마츠가 겨우 한 마디 했다.
“키세 씨가 우니까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서 한 말이다. 그런데 그 말에 겨우 겨우 잦아들던 키세의 눈에서 주룩 주룩 눈물이 다시 쏟아진다. 카사마츠는 더 당황했다.
“그렇게 울면 예쁜 얼굴이 다 망가지잖아요.”
이것도 진심에 팩트 그대로를 말한 것뿐이다. 그리고는 호주머니에서 손수건까지 꺼내 내밀었다. K.Y라는 이니셜까지 수놓인 그것은 카가미의 작품이다. 쿠로코 몫을 만들면서 같이 만들었다고 했다. 그 건장한 어깨와는 영 동떨어지게도 카가미의 취미는 요리와 수공예다. 저번에는 직접 만들었다는 귀여운 크리스마스 쿠키까지 받았다. 손수건을 두 손으로 받아든 키세가 팽, 하고 코를 푼다. 겨우 눈물을 그친 모양이다. 안도한 카사마츠가 훗 하고 상쾌하게 웃었다. 저도 모르게 손이 뻗어나가 키세의 머리를 쓰다듬은 것은 충동적으로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간헐적으로 흔들리던 키세의 등이 멎는다. 고개를 숙였던 채인 키세가 마스카라며 아이라인이 모두 번진 엉망의 얼굴로 슬쩍 고개를 든다. 그리고 그 시선이, 상쾌하게 웃는 카사마츠의 얼굴에 가 닿는다. 깜빡깜빡. 공들여 붙인 속눈썹이 비싼 값을 했는지 그렇게 울어 재낀 후에도 제자리를 얌전히 지키고 있다. 확실히 인형 같은 얼굴이다. 카사마츠는 속으로 감탄했다. 잠시 맞부딪힌 시선이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앗, 하고 카사마츠가 얼른 손을 뗀다.
“미안해요, 남자들만 있는 곳에 있다 보니 조심성이 없네요. 사과할게요.”
사람 좋게 웃는다. 키세는 카사마츠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 긴 속눈썹을 깜빡이면서 빤히. 둘만 있는 사무실, 제 옷을 걸치고 있는 화사한 여자, 우는 여자를 달래주던 상황. 급작스레 현실에 눈이 돌아가면서 카사마츠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기 시작한다. 조심성 없는 손으로 키세가 눈물 젖은 제 눈가를 슥 훑어 내자 마스카라가 굉장히 번지면서 키세의 눈가를 까맣게 바꿔 놓는다. 카사마츠는 민망함에 고개를 돌렸다. 제 얼굴 상태를 모르는 키세의 회복력은 재빨랐다. 엉망이 된 긴 머리를 뒤로 넘기며, 다시 예의 상큼발랄백치미의 웃음을 띄운 키세가 물었다.
“오빠 이름이 뭐에요?”
여자한테 듣는 오빠, 소리에 놀라 딸꾹질이 난 카사마츠가 겨우 대답했다. 카사마츠 유키오, 딸꾹, 라고, 딸꾹, 합니다. 왜 제 이름을 물어보는 건지에 대해서는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은 채.
그리고 그 순간, 키세의 타깃이 변모했다.
*
나 이제 사랑이 뭔 지 알거 같아요. 광산에서 못 먹을 거라도 먹었는지 키세가 꿈꾸는 소리로 전속 피부과 주치의 미도리마에게 말했다. 미도리마는 키세의 말을 일상적인 헛소리쯤으로 취급했다. 로맨스 연기나 제대로 하고 그런 말을 하라는 것이야. 키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사랑에는 이름이 있어요. 그 이름은 바로 카사마츠 유키오죠.
세상에는 운명의 빨간 실이라는 게 있는 게 틀림이 없다. 며칠 전만 해도 제 손가락에 매달린 실의 반대편에 있는 게 쿠로코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키세는, 이제 그 빨간 실이 사실은 카사마츠에게 이어져 있었던 것이며 쿠로코는 이 운명적인 사랑을 이어주기 위한 큐피드 같은 존재였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쿠로코가 없었다면 그 탄광에서 카사마츠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날부터 키세는 편도 다섯 시간 반짜리 탄광촌에 일주일에 세 번씩 출근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일 같은 걸 할 시간이 있을 리 없었다. 제 눈앞에 자신의 운명이 떡하니 있는데 이 남자를 놓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미 호모였던 쿠로코 남편 후보 때문에 받은 충격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목석은 무엇으로 넘어가는가.
키세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수학문제를 받은 수험생의 기분으로 그 방법에 대해 골몰했다. 지금껏 만나온 남자들은 조금 야한 옷을 입거나 조금 애교를 떨어주면 낙승이었는데 이 목석 오브 목석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았다. 저번엔 귀여운 섹시함으로 승부를 봤는데 통하지 않은 걸 보면 그쪽 취향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설정에 약한 것인가. 키세는 해리포터 교복을 방불케 하는 기다란 망토를 두르고 카사마츠의 사무실을 찾았다. 카사마츠는 인사도 없이 뭐하냐는 표정으로 키세를 보고 있었다. 키세가 입고 있던 망토를 훌렁 벗어 던지자 키세가 직접 만든 마개조된 메이드복이 튀어나왔다. 리본과 레이스, 그리고 프릴이 촘촘히 박힌 팔락팔락한 스커트를 휘날리며 카사마츠가 보는 앞에서 레이스 빠방한 모자까지 썼다. 반응이 없어 주인님~ 부르셨어요~ 하고 수줍게 애교도 떨어봤다. 아니오. 안 부르셨는데요. 카사마츠가 대답했다.
그 다음에 키세가 도전한 것은 화끈한 섹시함이라는 부분이었다. 이번에도 수상쩍은 망토를 뒤집어쓴 키세가 카사마츠의 앞에서 카이사르 앞에 선 클레오파트라라도 된 마냥 망토를 벗어 재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구멍 성성한 망사 스타킹과 새끈한 브라탑의 바니걸 복장이었다. 키세가 카사마츠에게 토끼 귀를 내밀며 말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토끼도 될 수 있어요. 씌워주세요. 카사마츠가 답했다. 아뇨, 필요 없거든요. 또다시 실패의 쓰라림을 겪은 키세는 콘셉트를 완전히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 키세가 도전한 것은 정숙미였다. 정숙함이라고 하면 대체 어떤 복장이 되어야 하는 걸까. 키세의 의식의 흐름은 키세를 미망인 코스튬으로 인도했다. 직접 발품을 팔아 산 검은 색 망사 모자와 은근하게 하얀 속살이 비치는 시스루 검은 긴 원피스에 검은 망사 레이스 장갑까지 완벽했다. 키세는 카사마츠의 앞에 서서 말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물론 씨알도 안 먹혔다. 카사마츠가 답했다. 부조는 안 하셔도 됩니다.
이 남자는 현실의 여자는 사랑할 수 없는 운명인 걸까? 키세는 탄광을 향하는 기차 속에서 고뇌했다. 내 운명의 상대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아니었던 걸까. 설마 그 호…호모 회장에게 호모를 옮아버린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이쁘고 깜찍하고 섹시하고 사랑스러운 나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대체 무엇을 하면 남자를 꼬실 수 있다는 것인가? 이번에는 조금 길게 노력해 보기 위해 옷이며 화장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아예 옆에서 숙식하며 얼쩡거려 볼 작정이었다. 또다시 카사마츠의 사무실을 찾은 키세가 말했다. 일자리 구하러 왔어요. 카사마츠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모델 안 구하는데요. 예상했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키세가 밝게 말했다. 모델 일 말구요.
그리고 키세는… 급식 도우미가 되었다.
쿠로코 회장의 독특한 경영 방침 덕에 남자만 득시글하던 탄광에 처음으로 생긴 여자 직원이다. 게다가 아이돌까지 했다던 초 미녀. 심지어 베이글(은 놀라운 뽕의 힘이다). 키세는 단숨에 탄광의 아이돌이 되었다. 연기도 하지 않고 사랑에 빠진 키세는 이제 더 이상 ‘좋은 남자 만나서 인생 펴는’ 꿈 따위도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탄광의 사나이들에게 그녀는 마돈나였다. 아름답고 착하고 가정적이고 게다가 한 남자만을 죽도록 사랑하는 사랑스러운 여자.
이쯤 되니 괜한 분란 일으키기 싫어 그녀를 어떻게든 해고하려던 카사마츠만 악덕 고용주가 되었다. 심지어 쿠로코 회장에게 이 고민을 토로했더니, 쿠로코는 매우 감동해서 그녀에게 기회를 주고 싶군요, 같은 말이나 했다. 그냥 재밌어 하는 것 같았다. 여론을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했지만 어느새 생겨 있는 ‘키세 료코를 보호하기 위한 모임’ 따위의 노조가 생겨 버려서, 지금 있는 일꾼들을 모두 갈아치우지 않고는 도저히 키세를 내칠 수가 없었다. 마지막 보루로 남겨 두었던 카가미에게도 말을 해 봤다. 그랬더니 이 망할 놈의 호모충은 자기 애인이 그녀를 썩 마음에 들어 한다며 사람 좋은 얼굴만 했다. 카사마츠는 조금 야비해지기로 했다. 혹시 쿠로코가 키세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 카가미는 조금 생각하더니 갸웃거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선배님, 아시다시피 녀석은 호모이지 않습니까.
그래. 어차피 인생은 혼자 사는 거였다. 아무도 없는 밤 사무실에 혼자 앉아 카사마츠는 콜라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어차피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건 어디에도 없는 거다. 내 편이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 인생 헛살았구나, 카사마츠… 남들이 볼 땐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카사마츠는 진심으로 신경 쇠약에 걸릴 것 같았다. 모두가 료코의 편이니 이제 료코를 받아주지 않으면 자신이 순진한 소녀 갖고 놀다 버리는 망나니 난봉꾼이 된 것만 같았다. 늦은 새벽이었다. 탄산에 취한 카사마츠는 왜 성실하게 살아 온 자신의 인생에 이런 역경이 찾아온 것인지 신에게 따져 묻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카사마츠의 등에는 누가 봐도 키세의 것인 핑크색 무릎담요가 둘러져 있었으며 그 밑에는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쉬엄쉬엄 하세요, 미래의 아내 키셋치♡’ 라는 쪽지가 놓여 있었다. 카사마츠는 오래 전 그때처럼 화장실로 돌진해 어젯밤 마신 콜라를 모두 게웠다. 돌아왔더니 제 책상에 방금 탄 것이 분명한 꿀물이 놓여 있었다. 범인은 이 안에 있었다. 키세밖에 없었다. 카사마츠는 무슨 끔찍한 것이라도 집는다는 얼굴로 꿀물을 세면대에 버렸다.
사무실에 앉아 서류작업을 하고 있자니, 키세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카사마츠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오늘의 콘셉트는 차이나인 모양이었다. 키세에게 참으로 잘 어울리는 새까만 치파오의 왼쪽 다리가 허벅지 라인까지 시원하게 개봉되어 있었다. 뭔가 비밀스러운 일이라도 있다는 듯 슬며시 사무실의 문을 닫은 키세가 은근한 말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어떤 메뉴로 하면 될까요?”
“카가미 군이 할 테니 떠주기만 하시면 됩니다.”
카가미는 광부에서 영양사로 이직했다. 갱도로 내려가면 쿠로코가 카가미를 자주 보기가 힘들다는 게 이유였다. 때문에 요리를 하겠다고 설치던 키세는 주방 보조로 입사했다.
“특별히 좋아하는 거 없으세요?”
“주는 대로 먹습니다.”
처음 키세가 카사마츠의 사무실을 찾아오기 시작했을 때, 카사마츠는 나름대로 인생 선배로서 키세를 잘 타일러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거듭 말하지만 남자 후배였다면 몇 대 때려주면 간단했을 것이다. 차마 사내자식처럼 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없어 카사마츠는 키세를 잘 달래고자 했다. 특이한 농담 스타일인 것은 이해하지만, 나는 일이 바쁜 사람이라 더는 같이 재밌게 웃어넘기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매우 판타지적인 마법소녀 코스튬을 입은 채인 키세가, 손에 쥐고 있던 마법봉 - 달리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 를 내던지며 내가 하는 일이 농담처럼 보이냐고 반문했다. 카사마츠로서는 최선의 정중함이었다. 그녀가 왜 화가 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카사마츠는 조언했다. 쿠로코 녀석은 날 때부터 그 쪽이라 포기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키세는 매우 화가 난 듯 눈을 부라리다가, 천천히 진정했다. 다음에 다시 올게요. 그때까지만 해도 카사마츠는 키세의 공략 대상이 쿠로코가 아니라 자신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카사마츠는 이제 이 여자에게 더는 다른 여지를 주지 않기로 작정했다. 키세가 뭘 하든, 뭐라고 말하든, 어떻게 상처를 받든 신경 쓰지 말자고. 키세가 찾아오기 시작하고 이 주일 뒤, 카사마츠는 그제야 키세가 관심을 두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 모든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회장 쿠로코에게 상담했다. 쿠로코는 답했다. 카사마츠 씨는 그래서 안 되는 겁니다. 차려진 밥상 안 먹을 거면 증여라도 제대로 하셔야죠.
분명히 제대로 거절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자는 생각 이상으로 끈질겼다. 한 번은 정말 제발 좀 방해되니까 나가달라고도 했었다. 여자가, 정말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천천히 또르륵 눈물을 흘렸다. 마음이 조금 약해질 뻔 했지만 다잡았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평생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몰라. 여자는 정말 이제 그만두겠다는 듯이, 꾸벅 인사를 하고 카사마츠의 사무실을 나섰었다. 마음이 많이 안 좋았다. 어쨌든 나 좋다는 여자인데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확신이 안 갔다. 하루 종일 일에 손이 안 갔다. 집중이 될 리가 없다. 카사마츠는 한숨을 내쉬며 바람을 쐴 작정으로 사무실 밖을 나섰다. 그리고 그가 밖에서 마주친 것은, 아주 신이 나서 카가미와 원온원을 하고 있는 키세 료코의 모습이었다. 카사마츠는 이마를 짚었다. 저 짧은 치마 입고 대체 뭐 하는 짓이야!!
키세는 농구를 썩 잘 했다. 농구에 일가견이 있는 그 큰 덩치의 카가미와 경기하면서도 크게 밀리지도, 지치지도 않았다. 카가미와 몸을 부딪히고 농구공을 붙잡고 빼앗기면서 뛰어다니는 키세의 치마가 신경쓰이게도 팔락팔락 휘날렸다. 이미 회사의 모든 직원이라는 직원은 다 나와서 그들의 농구 쇼 - 인지 키세의 치맛속인지 - 를 구경하고 있었다. 당장 저 여자를 끌어내서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살라고 호통치려는 순간, 키세가 카가미의 공을 빼앗아 그대로 슛을 날린다.
TV 농구 경기에서나 보던 화려한 기술이었다. 카사마츠도 취미로 농구를 한다고 했지만, 저렇게 매끄러운 동작은 처음 보았다. 부드럽게 키세의 손을 떠난 농구공이 림을 부딪치는 일도 없이 깔끔하게 들어선다. 와아아 하는 함성이 터지고, 활짝 웃으며 카가미에게 브이를 그려 보이는 키세를 카사마츠는 넋 놓고 보고 있었다. 그 때, 그의 어깨를 툭툭 치는 손이 있었다. 쿠로코였다.
‘꽤 잘 하죠? 요가나 헬스 하기가 너무 싫어서 다이어트용으로 농구를 했대요. 카가미 군에게도 안 질만한 실력자인 줄은 몰랐네요.’
골을 넣고 신이 난 키세가 전 직원들의 손에 하이파이브를 하며 달린다. 높게 묶은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땀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셔츠가 휘날리고, 치마가 휘날린다. 전 직원들이 키세의 슛 -인지 몸매인지 -를 보며 휘파람을 불고, 환호성을 지른다. 신이 나서 달리던 키세가 카사마츠를 발견하고, 아까 울었던 여자라고는 절대 생각도 못할 상기된 얼굴로 찡긋 윙크를 날린다. 그리고는 카가미가 쥔 공을 받아들고, 다시 3점 라인보다 훨씬 뒤에서 공을 날린다. 역시 매끄러운 폼이었다. 가볍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공이 림의 뒷부분에 살짝 부딪히고는 깔끔하게 떨어진다. 슛이 들어간 것을 본 키세가 의기양양하게 카사마츠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어 보이고, 곁에 있던 카가미가 친근하게 키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키세가 크게 웃는다.
카사마츠는 그 일련의 과정을 경직된 듯이 보고 있었다. 잠시 감전된 사람처럼 꼼짝을 못 했다. 카가미가 다가와 키세의 머리를 쓰다듬을 즈음에야 정신을 차린 그가, 매우 사나운 얼굴을 하고 성큼성큼 인파를 헤치고 경기장에 들어가 깔깔대며 웃는 료코의 손목을 이끌고 나왔다. 딸려오는 키세는 의아해 하면서도 절대 우악스러운 손길을 털어내지는 않는다. 한참을 성난 듯이 걷던 카사마츠가 발걸음을 멈추고, 화를 참는 듯이 몇 번 심호흡을 했다. 키세가 뭔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카사마츠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카사마츠는 눈치 채지도 못했다. 한참을 씩씩대다, 카사마츠가 그대로 몸을 돌려 소리쳤다.
“치마 입고 무슨 짓이야!!!”
*
그게 잘못 이었다.
카사마츠는 회장실에까지 피난을 와서 머리에 수건을 얹고 누워 있었다. 몇 주간 두통에 시달린 탓이다. 오늘도 키세가 어떤 코스튬과 어떤 설정을 가지고 제 사무실을 찾을 지 무서울 정도였다. 어떻게든 얼굴을 못 보다 보면 알아서 식지 않을까 하는 허망한 희망을 품고 회장실까지 도망을 친 터였다. 쿠로코가 카가미와 아주 닭살 넘치는 통화를 끊고 ‘패배견 카사마츠’의 모습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바보입니까?”
“맞나봐.”
“나는 카사마츠 씨가 박력 넘치게 고백이라도 하려는 줄 알았죠.”
그럴 리 있겠냐! 벌떡 일어나 바락 고함을 친 카사마츠의 이마에서 수건이 툭 떨어진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쿠로코가 말했다.
“하여튼 태도가 그렇게 어중간해서야. 그러게 왜 외간 여자 치맛속까지 걱정합니까.”
미국 물 먹은 거 맞아요? 쿠로코는 제 옆에 구비해 둔 바닐라 쉐이크 파우더를 듬뿍 타내며 물었다. 정량보다 세 스푼 더 들어가는 레시피를 멍하니 쳐다보며 카사마츠는 힘없이 대답했다.
“남자들만 이렇게 득시글한데 겁 없이 그 꼴로 나다니는 여자도 문제가 있어…”
“그러니까 애초에 금방 떼어내고 돌려보내면 좋았잖아요.”
쿠로코는 즉석 바닐라 쉐이크를 쪽쪽 빨며 카사마츠의 옆에 앉았다. 카사마츠는 차마 ‘그 여자가 너한테 실연당하고 울고 있는데 나가라고 어떻게 그랬겠냐!’는 말은 못 하고 혼자 끙끙 앓았다. 쿠로코가 은근슬쩍 물어온다.
“예쁘고 귀엽던데, 그렇게 싫어요?”
당장이라도 탄광을 뛰쳐나갈 것만 같던 키세는 카사마츠가 버럭 성을 낸 날 이후로 아예 눌러 앉았다. 매일 하는 코스튬 플레이는 거의 런웨이 수준이 되었고 직원들과도 어느새 완전히 친해졌다. 그녀는 아주 바빴다. 카사마츠에게 작업을 걸지 않을 때에는 그들과 수다를 신나게 떨었다. 주로 그 수다의 내용은 ‘어떻게 해야 목석을 사로잡을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카사마츠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은 잊지 않았다. 짧은 치마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친해진 사람들과 술을 먹고 고성방가를 하는 일도 잦았다. 한 번은 취한 키세가 카사마츠를 찾으며 울고 있다고 직원이 그를 찾기도 했다. 어떻게든 달래서 방에 집어넣으려고 했더니, 은근슬쩍 그의 몸에 몸을 접촉시켜 오는 것이었다.
‘상무님은 왜 날 싫어 할까요…’
제 목덜미에 팔을 두르는 폼이 연습이라도 한 듯이 자연스러웠다. 키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정말 상무님이 너무 좋은데… 말캉한 여자만의 무언가가 카사마츠의 팔에 닿아왔다. 물컹이는 촉감이 너무 너무 선연했다. 여자랑 접촉이라고는 해 본 일 없는 순진한 카사마츠의 얼굴이 폭발할 것처럼 벌개졌다. 진풍경이라고 킬킬거리며 쿠로코가 그 모습을 카메라로 찍기까지 했다. 아무리 떼어내려고 해도 울고 불고 앵겨 오는 통에, 어쩔 수 없이 그날 밤 내내 그녀를 달래느라 카사마츠는 한 숨도 자지 못했다. 그래도 참았다. 어쨌든 여자고 여자고 여자니까. 조금 마음이 안 좋기도 했다. 시시각각 실연당하는 짝사랑이니 그럴 만도 하지. 그러나 그녀가 진탕 술을 먹고 직원들과 어지럽게 얽혀서 자고 있던 꼴을 발견했을 즈음에는, 카사마츠도 인내심이 끊어지고야 말았다.
겁을 상실해도 이 정도일 줄이야. 생각이 없는 레벨이지 싶었다. 술에 취해 완전 코알라가 된 키세를 업어다 옮기면서, 카사마츠는 대체 이 여자는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건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복잡한 카사마츠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키세는 아주 신이 나선 그녀를 업은 카사마츠의 등에 침 까지 질질 흘려가며 단잠을 잤다.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는 대책 없는 여자였다. 가만히 혼자 내버려 두면 무슨 사고를 칠지 알 수가 없다. 카사마츠는 점심이며 저녁 식사를 챙기는 키세의, 본격 머릿수건까지 쓴 가정주부의 모습을 예의 주시하며 조금도 긴장을 놓지 못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카사마츠의 머릿속을 조금도 떠나지 않는 중대한 사안은 ‘오늘은 또 저 여자가 어떤 사고를 칠까’에 대한 것이었다.
*
카사마츠가 그녀를 얼마나 발암물질처럼 생각하든, 키세는 알아서 잘 지냈다. 자신의 새로운 재능이라도 발견한 느낌이었다. 속세에 있을 적엔 외로운 검객처럼 누구와도 친해지질 못했었는데 이곳에서는 누구와도 격 없이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료코는 실상 자신의 숨겨왔던 친화력에 끊임없이 놀라는 중이셨다. 지금까지 자신은 잘못된 곳에서 살아왔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뭘 하든 욕부터 하는 사람만 가득하던 곳에서 살다 보니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어서 친구가 없는 줄로 알았다. 뭐, 딱히 친구가 필요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목석같은 카사마츠를 후리지 못하는 것도, 처음에는 애가 닳았지만 갈수록 재미가 있었다. 난공불락의 퀘스트라도 도전하는 느낌이었다. 이미 수행의 영역이었다. 카사마츠에게 도전하고, 깨지고, 경험치를 축적하는 과정은 분명 어딘가 게임을 닮아 있기도 했다. 키세는 천천히 게임중독이 되어갔다. 내일은 무슨 방법으로 카사마츠를 후려 볼까, 고민하는 매일 매일이 정말로 즐거웠다. 도리어 이제는 받아주면 심심해서 어쩌나 싶을 지경이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넘어오지 않는 남자는 신선했고 튕기면 튕길수록 매력적이었다. 어쩌면 약간 마조 기질이 있었을지도 몰라, 키세는 오늘의 코스튬을 고르며 생각했다. 오늘의 코스튬은 요컨대, 하얀 어깨는 다 내놓으면서 다리는 무릎을 덮는 오프 숄더 원피스의, 앙큼한 소녀 버전이었다.
상무님은 대체 뭘 좋아함까??
탄광촌의 유력 인물 중 그나마 키세를 인간취급 해 주는 사람이라고 하면 카가미 정도다. 농구 코트의 가로등만 아슬아슬하게 켜진 늦은 밤. 카가미를 비밀스럽게 농구 코트로 불러낸 키세가, 짧은 반팔과 츄리닝 반바지 차림으로 한손은 농구공을 들고, 한 손은 허리에 얹은 채 삥 뜯는 양아치처럼 물었다. 머리를 한데로 대충 올려 묶은 꼴이며 화장이라고는 1도 안한 모습이 정말이지 작정하고 나온 느낌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자다 나온 카가미로서는 그동안의 키세 료코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인 녀석의 모습에 하? 하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한다. 물론 키세는 상관하지 않았다.
“좋아, 의리임까? 뭐 상관없어요.”
“너 잠이 덜 깼냐? 한밤중에 무슨 짓이야…”
카가미는 산발이 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성가심이 완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키세는 눈치채줄 생각이 없었다. 나 좀 더 자고 내일 아침에 이야기하는 게 어때. 하는 카가미에게 키세가 별안간 손에 들고 있던 농구공을 팡 하고 내지른다. 카가미는 거의 반사적으로 흉기에 가까운 농구공을 받아들었다. 화를 내기도 전에, 키세가 말했다.
“승부하죠.”
기세 좋게 포즈를 잡는 키세가 씨익 웃는다. 원온원임다. 제가 이기면 카사마츠 상무님 정보를 내놓으시죠.
통통, 신새벽의 농구 코트에 농구공이 튄다. 간단하게 끝날 것 같았던 게임은 의외의 접전을 보이며 한참을 이어졌다. 눈을 찌르는 하얀 야외 조명 아래로 시원하게 코트를 가르는 운동화의 마찰 소리와 둘의 거친 숨소리가 긴박하게 얽힌다. 처음 의도가 어땠는지 이미 상관도 없는 것처럼 시합 그 자체에 집중해 있었다. 스틸한 공을 들고 슛을 날리는 키세의 공을 높이 뛰어오른 카가미가 낚아챈다. 뒤늦게 키세가 착지한 카가미의 공을 뺏어 보려 하지만, 미끄러지듯 키세의 블록을 빠져나간 카가미가 날아오르듯 골대에 농구공을 꽂아 넣는다. 공이 가뿐하게 네트를 통과하며 바닥을 구르고. 그것을 확인한 카가미와 키세 모두 둘 다 넉 다운이 되어선 농구 코트에 그대로 드러눕는다.
“괴물입니까?… 덩크라니… 농담이 심해요…”
“너도… 적당히 하지… 한밤중에… 이게 무슨 짓이야…”
“초 집중해서 완전 몰입한 사람이 누군데."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킨 키세가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긴다. 얼마나 뛰었는지 감감하던 새벽하늘에 동이 튼다. 우리 밤 샌 거 알아요? 키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을 했다. 땅에 벌렁 드러누운 카가미가 말했다. 너 때문이잖아? 키세가 삐죽였다. 신나게 같이 뛰어놓곤 딴소리는.
“의리고 뭐고 아는 게 있어야 가르쳐주지 않겠냐…”
“그럼 미리 말을 했어야죠. 친한 거 아니었어요?”
“대답할 시간은 줬고? 그저 그래. 쿠로코한테 물어보는 게 빠르지 않겠냐?”
“쿠로콧치는 뻥 칠 거 같은데… 그 사람 분명히 즐기고 있어. 나 도와주는 줄 알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군은 아냐”
“나는 아군이고?”
어… 중립국? 장난스럽게 툭 던져놓은 키세가 웃는다. 사심 없고 계산 없는 산뜻한 얼굴이었다. 땀에 번진 발그레한 입술과 볼이, 반짝이는 눈빛이 꾸밈없이 띄워 올린 미소가 꼭 평범한 여자아이 같았다. 다가가기 부담스러울 만치 화려한 키세 료코와는 다르다. 나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은 눈부신 키세 료코와도 달랐다. 언제나 카사마츠에게 보여주던 그 작정한 얼굴과는 딴판이다.
“너 말이다…”
“응?”
“아니, 아니다.”
차라리 지금 얼굴로 카사마츠에게 말을 걸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카가미는 말을 하려다가 삼킨다. 어찌 되었든 남의 연애사, 자신이 간섭할 부분이 아닌 것이다. 카가미는 그저 말을 삼킨 채, 평범한 여자의 얼굴을 하고 불어오는 바람에 얼굴을 식히는 키세의 곁에 누워 있었다. 새벽의 바람이 선선했고, 푸른빛을 헤치고 올라오는 주홍 빛 하늘이 아름다웠고, 조용한 코트에 내려앉은 어스름 속 키세의 실루엣이 그림 같았다.
카사마츠는 여느 때처럼 새벽에 일어나 코트를 향하다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농구 코트를 내달리는 키세와, 카가미가 시원하게 매다 꽂는 덩크슛과, 바람을 맞는 키세와 붉게 상기된 그녀의 볼 같은 것들을 카사마츠는 코트 밖 한 편에 서서 지켜보았다. 나란히 벌렁 드러누워 있던 둘은 코트 바깥에 설치된 수돗가로 옮겨 가 씻기 시작한다.
둘은 친해 보였다. 얌전히 손을 씻던 키세가 멀쩡하던 호스의 방향을 틀어 카가미에게 흩뿌린다. 물벼락을 맞은 카가미가 반격에 나서고, 이미 씻는다기보다 물장난에 가까운 무언가로 변모한다. 머리가 젖고, 옷이 흠뻑 젖는다. 키세의 얇은 티셔츠가 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어 간다. 하얀 피부와 천상 여자의 곡선이 보일 듯 말듯 드러나고 있었다. 정말 저 여자는. 카사마츠는 낮게 짜증을 읊조렸다. 저 여잔 가만 두면 또 저러지 싶은 한편 내가 왜 굳이 신경까지 쓰고 있는지도 미스터리였다. 쿠로코 말마따나 왜 굳이 외간 여자에게 관여를 한단 말인가. 신경을 끄자 싶었다. 그래도 둘 만의 세계에 있는 것 같은 둘을 뚫고 들어가서 농구공을 튀기는 건 영 껄끄러웠다. 카사마츠는 자꾸만 그들에게 따라붙는 시선을 애써 거두고 돌아섰다. 미적미적한 걸음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꺼림칙함이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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