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마츠는 꽤 심각한 표정으로 제 앞에 앉은 키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좁은 사무실, 허락도 없이 문을 열어 재낀 키세는 카사마츠가 자리를 권하기도 전에 사무용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조심성 없이 털썩 앉았다. 안 그래도 짧은 치마가 아슬아슬하게 허벅지 위를 가린다. 현실 세계에서는 볼 일 없다 생각했던 구멍 성성한 가터벨트가 유혹적이다. 천천히 제 왼쪽 다리를 들어 올린 키세가 오른쪽 무릎 위로 다리를 꼰다. 그 통에 더 위로 말려 올라간 치마에서 새하얀 허벅지를 감싼 가터벨트의 까만 레이스가 엿보인다. 그 상태로, 키세는 상체를 앞으로 조금 당겨 앉아 턱을 괸다. 이미 치마라고 보기는 어려운 천 조각이 당장 들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로 구겨지고 있었다.
“좋은 아침, 상무님♡”
꿈에서 덜 깬 듯 몽롱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카사마츠의 귓전을 때린다. 한껏 인상을 쓴 카사마츠의 얼굴과는 달리 분명 새벽부터 머리를 만졌을 게 분명한 굵은 웨이브의 금발이 흘러내리는 키세의 얼굴은 여유만만하고 어딘지 모르게 섹시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상큼하다기보다는 색기있다에 가까운 미소를 띄워 올리며 키세가 카사마츠와 시선을 맞춘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키세를 보고 있던 카사마츠가 이내 시선을 떨구며 탁상 위에 놓인 전화기를 집는다. 키세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며 승리에 가까운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담당 비서에게 전화라도 하려는 모양이지. 역시 도중에 누가 들어온다던가 하면 곤란할 테니까. 정적과 침묵과 긴장감이 흐르는 사무실 속에서, 카사마츠가 전화를 건 상대가 대답한다. 네 xxx비서입니다. 상무님 찾으셨습니까?
“여기 손님이 길을 잘못 드신 것 같은데 역 앞까지 마중해줘요.”
아 진짜!! 단숨에 유혹적인 분위기는 어디론가 도망가고,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성이 난 키세의 새된 목소리가 사무실을 채운다. 곧 들어온 건장한 남자가 키세의 팔을 붙잡는다. 가시죠.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립 X ts황(카사키세)] 탄광촌 AU 1
w. 플루핑
재산 깨나 있는 독신 남성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진리이다, 라는 유명한 문구를 굳이 가져오지 않아도, 부유한 독신 남자에게 여자들이 꼬이는 것은 예쁜 여자에게 남자들이 꼬이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키세 료코는 돈 많고 잘 나가는 남자 하나 잘 잡아서 인생 펴고 싶은, 인생의 최대 목표가 취집인 현역 아이돌이었다. 모태미모가 한참 빛을 발하던 중학생 시절, 장래희망을 묻는 가정통지문에 평생 일 안하고 좋은 남자한테 시집가서 골프와 명품에 둘러싸여 살겠다는 거창한 포부를 밝혔더랬다. 그 위대한 꿈을 확인한 담임선생님이 뒷목을 잡고 쓰러지던, 저를 두고 반 전체 여자아이들이 수군거리던 절대 신경 쓰지 않는 뻔뻔함과 특유의 자기애는 그녀 최고의 무기였다.
가진 거라고는 타고난 얼굴과 몸매 뿐, 어려서부터 노력과 성실이라는 단어와는 담을 쌓고 지낸지 어언 스물다섯 해. 행운이라면 그 얼굴과 몸매가 밥벌이를 하기에 충분했다는 것이고, 불행이라면 그 얼굴과 몸매에도 불구하고 빵 뜨지 못할 만큼 발연기의 여왕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몇 번이고 인터뷰에서 좋은 남자 잘 잡아서 시집가고 싶은 자신의 속내를 가감 없이 피력함으로써, 여자 아이돌 안티 지분을 홀로 독점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녀가 출연한 모든 드라마는 그 몸매와 얼굴 그따위로 쓸 거면 나나 달라는 댓글이 수없이 달렸다. 그녀의 사차원적 매력은 여기서 폭발을 한다. ‘전 댓글 같은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아요~(윙크)’ 하고 한껏 쿨 한 척을 있는 대로 다 떨어 놓은 인터뷰와는 달리, 자신에게 달린 악플에 손수 키보드 워리어로 활동하셨던 전적이 뽀록난 것이다. 아역배우보다 못한 연기력은 주연을 맡는 드라마마다 족족 말아먹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고, 이미지는 이미지대로 바닥을 알 수 없는 싱크홀까지 추락하고야 말았다. 게다가 나이는 어느덧 스물다섯.
여자 나이 스물다섯 이면 꺾이기 시작하는 나이라고 했던가. 요즘 여자 서른은 예전 스물과도 같다고는 하지만, 이쪽 세계라는 것이 여자 나이에 한해서는 말도 못 하게 보수적인 곳이다. 스물도 넘지 않은 풋풋하고 귀엽고 무엇보다 키세보다 연기도 성격도 개념까지 우월한 아이돌들이 이 중에 하나쯤은 네 취향이 있겠지 레벨로 시시각각 양산되는 곳이란 말이다. 이런 정글 가운데 연기도 못하고 성격은 거지같기로 손가락에 뽑히는 료코의 아이돌 인생은 사실 한 물 간 것과 다름이 없었다. 키세에게 스물다섯 번째 생일은, 아이돌 치고는 치명적인 노땅에 도달하고야 말았다는 사형 선고이기도 했다. 얼마 남지 않은 팬(그들도 차마 실드는 치지 못한다)들이 보내 온 스물다섯 번째 생일 축하 케이크를 먹으며 키세 료코는 태어나 처음으로 위기감이라는 것을 느끼고야 말았다.
그래서 료코는 이 위기를 기회로 뒤바꾸자는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잊고 있던 제 어린 시절의 꿈, ‘돈 많은 남자 만나서 골프나 치고 명품에 둘러싸여 사는’ 라이프를 실현시킬 때가 되었다고 느낀 것이다. 자아실현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키세는 먼저 그동안 자신에게 들러붙던(자기가 어장 관리하던) 돈 많은 오빠들에게 한껏 아양을 떨며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미안한데, 나는 가정이 있는 몸이야.
다음 달에 나 결혼해
너 누구냐?
지금 번호는 없는 번호이므로…
료코는 폰을 내던지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키세의 이마에 대빵만한 ‘빡침나무’ 가지가 뻗어나는 동시에 할부도 안 끝난 신상 아이폰에 예쁘게 나뭇가지가 돋아났다. 제발 어장에 넣어달라고 빌어재낄 땐 언제고 이것들이 뒤에서 이따위 짓을 해? 본인이 하려던 짓과 별 다를 바 없다는 자각은 하지 못했다. 심지어 기분전환으로 들어갔던 연예인 루머 사이트에서, 자신에게 방금 전까지 가정 운운했던 남자가 자신이 제일 싫어했던 라이벌과 다정하게 팔짱을 낀 사진을 발견하고 말았을 즈음에는, 분노의 요가를 시전하며 반드시 내가 그 놈보다 훨씬 잘난 놈을 잡아서 이놈의 팔자를 고쳐놓고야 말겠다고 이를 박박 갈기까지 했다.
그러던 차에 쿠로코 테츠야의 이름을 발견한 것은, 키세에게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 날도 키세는 오이팩을 한 채 어디서 어떤 광고를 찍어야 한 푼이라도 더 벌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기획사에서 보내 준, 광고 모델을 모집하는 수많은 공고 목록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푹푹 나온다. 나 같은 에이급 광고모델이 이런 헐한 싸구려 광고나 찍어서 되겠느냐 이 말이다. 심지어 오디션까지 봐야 하고. 키세는 그대로 서류를 내팽개치려고 했다. 목록 중 한 곳에서 우연히 ‘탄광 쿠로코’ 따위를 읽지만 않았어도 분명 서류 따윈 던져버리고 잠이나 잤을 거였다.
왜인지 이상할 만큼 이름이 익숙했다. 마치 아주 예전에 친하게 지냈던 사이라도 되는 양 낯익은 이름이다. 잠이 번쩍 깨는 것 같았다. 키세는 그 밑에 적힌, ‘회장 쿠로코 테츠야’를 읽고는 벌떡 일어섰다. 얼굴에 붙여놓았던 오이가 후두둑 떨어졌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분명 아는 이름이었다. 키세는 그 길로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모든 졸업앨범을 뒤졌다. 중학교 졸업앨범에서 겨우 여간해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흐릿한 존재감의 남자를 발견해 냈을 때, 키세는 제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모든 일이 다 끝났다는 듯이 큭큭 웃기 시작했다. 쿠로코 테츠야, 예전에 같은 반이었던 존재감 없는 남자애, 그리고 지금은 무려 탄광 오너! 게다가 멍한 남자의 얼굴은 척 봐도 여자 면역 없는 동정의 그것이다. 키세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사람 죽으란 법은 없는 거다. 그래, 너 그 노땅이랑 다니니 행복하디?(키세는 아직도 자기가 꼬시려던 기업 총수의 왼팔을 꿰찬 제 라이벌을 잊지 못했다) 내 쩔어주는 젊고 잘생긴 남편을 보라지!
미래의 남편 쿠로코 씨가 일하는 곳은 들어본 적은 없는 시골의 탄광으로, 쿠로코 씨는 그 탄광의 소유주라고 했다. 탄광이라니 잘 모르겠지만 아랍의 왕자들도 석유로 부자가 된 거니까 어마어마한 부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키세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릴 적 모습이 썩 괜찮았으니 성인 남성이 된 지금도 얼굴이 꽤 괜찮을 것이다. 그것도 엄청난 플러스 점수였다. 게다가 나이도 어리니, 이 남자라면 오래오래 백년해로하면서 살 수 있을 거였다. 다른 애들처럼 남편 꼬여서 사망보험 따위를 드느라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었다! 그야말로 제 인생을 평생 책임져 줄 철밥통 그 자체였다.
이건 전쟁이다. 키세는 당장 기획사에 전화를 때려 면접 날짜를 정할 것을 요청했다. 일 하는 데 의욕이라고는 팬더곰만큼도 없던 녀석이 무슨 일인가 싶었는지, 기획사에서는 니가 알아보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기획사가 끼면 분명 자신의 원대한 소망에 초를 칠 게 분명했다. 키세는 답지 않은 열정으로 직접 자신의 프로필과 이력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그렇게 서면으로 잡힌 날짜가 겨우 삼 일 뒤.
결전의 아침, 키세는 굳게 다짐하며 새벽부터 일어나 미용실에 들렸다. 전 날 밤 목욕재계며 전신 마사지, 팩은 당연한 수순. 오랜만에 만난 미용실 언니에게, 무조건 화려하게요! 무조건! 힘 빡 줘서 화려하게! 를 외친 키세는 세 시간에 걸친 드라이 끝에 자신의 노랗고 긴 생머리를 롤빵 같은 빅 사이즈 양갈래 웨이브로 바꾸어 놓았다. 휴가 중인 코디네이터를 닦달해 무대 위에서나 입을 법 한 블링블링 화사한 초미니스커트에 킬힐까지 장착한 키세는 누가 봐도 곧 무대에 나설 아이돌 그 자체였다. 큼지막한 귀걸이며 그동안은 귀찮아서 잘 쓰지 않던 인조 속눈썹까지 붙인 채 마찬가지로 화려한 명품 클러치를 손에 쥔 전투모드의 키세가 난생 처음 들어보는 깡촌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탄다. 면허도 없고 기획사에게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불상사였다. 그러나 환난과 고통 정도는 참아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무릇 영웅에게는 고난이 따르는 법. 하늘이 내린 자신의 남편감을 찾게 된 키세는 그 모든 불편함도 모두 감수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애로움이 넘치고 있었다. 정확히 다섯 시간 반 뒤, 키세는 두 번의 기차 환승과 한 번의 버스 환승, 그리고 십 오 분이 넘는 등산 끝에 드디어 ‘주식회사 탄광’에 입성했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멀었다. 버스를 갈아탈 때까지만 해도 이게 뭐하자는 짓인가 하고 본 적도 없는 남편 후보에게 성질이 버럭버럭 나던 키세는, 등산 중에 두 손 두발 다 들고 해탈해 탄광의 신비로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조금 더 시끌벅적할 것을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탄광은 조용하고 인적이 드물었다. 날도 흐릿했고 불빛도 적어서, 탄광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괜히 분위기에 말려서 위축되는 기분이다. 발도 죽도록 아팠다. 잠시 앉아 있고 싶은데 이 공들인 화장과 옷과 머리 세팅을 생각하면 (설사 그것이 상당히 망가진 상태라고 해도) 차마 석탄가루 뒤덮인 곳에 철푸덕 앉을 수가 없었다. 키세는 인간이 된 인어공주와도 같은 고통을 느끼며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발을 끌며 ‘외부인 출입금지’라고 적혀 있는 탄광의 사무 건물로 들어섰다.
건물 안에도 아무도 없었다. 하다못해 안내해주는 사람이라도 있을 줄 알았던 키세는 또 한 번 엄청난 실망을 했다. 설마 이 탄광 망한 건 아니겠지. 아주 신빙성 있는 의심이 들었지만, 여기까지 온 게 너무 아까워서 차마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키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구를 만나야 꼬시고 말고를 할 것이 아닌가. 아무도 없는 이 건물은 귀신이라도 나와서 인사를 건내주면 다행이지 싶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생각으로 발을 괴롭히던 킬힐을 벗었다. 이걸 끝끝내 신고 등산까지 하다니 스스로가 기특하다. 그리고 십 센티는 허공에 떠 있던 발이 겨우 지면에 닿았을 때, 키세는 이대로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 같은 해방감마저 느꼈다. 하필 그 때,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말쑥한 성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누구시죠? 어떻게 오셨어요?”
오호라, 안내원이구나! 키세는 이 우중충한 분위기의 탄광에 와서 처음 만난 남자가 너무 반가워서 화보 찍을 때나 보여주는 사진용 미소를 만면에 띄우며, 최대한 스커트가 예쁘게 퍼지도록 빙글 돌았다. 목소리부터 남다르다 했더니 과연, 훤칠한 남자는 깔끔하게 다림질된 새하얀 셔츠를 차려입은 훈남이 아닌가. 공략 대상은 아니더라도, 미남은 전 세계의 기쁨이다. 키세는 활짝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광고 모델 지원하러 왔는데요! 회장님 어디 계시죠?”
“광고 모델이요?”
“네, 광고 모델이요. 회사 홍보하려고 사진도 찍고, CF도 찍는 모델이에요.”
의아한 듯 되묻는 남자에게 키세는 친절하게 광고 모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까지 했다. 잘 생기긴 했어도 이런 깡촌에서 탄광일이나 하고 지낸다니 머리가 무지하게 나빴던 모양이다. 얼굴이 아까웠다. 그래, 내내 이런 문명과 담을 쌓은 곳에서 일을 했다면 광고 모델이 뭔지 모를 수도 있겠지. 뭐 저 정도 얼굴이면 머리 좀 나쁜 거 흠이라고 할 수도 없다. 키세는 너그러운 마음이 되어 조금 더 설명했다.
“이 탄광 회사에서 홍보, 아차, 회사 이름을 사람들한테 알리기 위해서 광고- 그러니까 뭐라고 하지, 티비나 책 같은 데 사진을 싣는 걸 하려고 사람을 찾는다고 들었어요. 회장님께 무슨 말씀 못 들으셨나요? 제가 연락 드렸었는데.”
“회장님은 지금 바쁘십니다. 그쪽이 정말 광고 모델이라고요?”
아, 이런 깡촌에 너무 이쁜 여자가 와서 놀랐구나. 키세는 으스대며 말했다. 프로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네, 프로 광고 모델입니다. 프로페셔널하게 프로 모델로 활동한지 십 년 조금 넘은 프로 중의 프로에요.”
남자의 표정은 대략 얜 뭐지 정도였지만 스스로의 스마트함에 도취된 키세는 알아채지 못했다. 키세가 물었다.
“그래서, 면접은 몇 시에 어디서 보게 될까요?”
“면접은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이 앞에 사무실 안에서 면접 볼 거고요.”
남자가 말끝을 흐린다. 후후, 연예인 처음 보지? 긴장되나 보다. 좀 귀여운데? 키세는 눈웃음을 흘리며 냉큼 말했다. 오호호 하는 텐션 높은 가장된 웃음소리까지 덧붙여 가면서.
“쿠로콧치, 아 죄송해요. 제가 개인적으로 회장님이랑 좀 친분이 있어서. 회장님은 면접 보시는 분하고 같이 들어오시나요? 면접관은 누구시죠?”
남자는 영 미심쩍다는 얼굴로 키세를 보고 있었지만 키세는 뻔뻔한 웃음을 지으며 마주 바라봐 주었다. 화장품 광고를 위해 연습했던 상큼발랄백치미 가득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띄운 채 말이다. 남자의 어정쩡한 시선이 아래 쪽, 그러니까 키세의 하반신을 향했다. 훗 역시. 남자들 다 똑같지. 짧은 치마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군 싶어 키세는 일부러 살짝 허리를 굽혀 스커트가 조금 더 말려 올라오도록 했다. 공략 대상은 아니지만, 잘 생겼으니 조금 가지고 놀아 볼까. 키세가 요염하게 다리를 모았다. 리즈 시절, 여기서 살짝 각선미를 보여주고 살짝 어깨를 만져 주면 엔간한 남자들은 다 넘어오곤 했었다. 키세는 필살의 애교 표정을 발사하며 단단한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남자의 시선이 단숨에 키세의 얼굴로 올라온다. 키세는 우~ 하는 표정으로 윙크까지 했다. 자 어떠냐. 뭐라고 말 좀 해 보시지.
“면접은 제가 봅니다. 신발은 신고 들어오세요.”
그리고 그 남자는... 버그캐였다.
*
카사마츠 유키오는 입사 이 년 차의, 주식회사 탄광 유일의 화이트칼라다.
그럭저럭 괜찮은 국립대를 나온 후, 경영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미국물까지 먹은 엘리트 카사마츠는 학업을 마치기 딱 석 달 전에 영세 탄광을 운영하던 자신의 외숙부 쿠로코 마사유키 씨의 부고를 듣고 급히 귀국했다. 몇 년 만에 돌아온 고국을 반가워할 틈도 없이, 쿠로코의 권유로 ‘탄광 쿠로코’ 회사의 장부를 살펴보게 되었는데, 아무리 봐도 이 회사는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면 망할 것 같았다. 학업이 석 달 남짓 남은 아까운 시점이었지만 특유의 집착에 가까운 책임감은 카사마츠로 하여금 도저히 이 망조가 깊이 든 회사를 내팽개치고 미국으로 떠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길로 회사에 출근을 했다. 한 달 가까이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회사를 회생시킬 방법에 골몰했다. 다행히 카사마츠는 일을 참 잘 했다. 엘리트는 달라도 어딘가 다르긴 했던 것이다. 마이너스 성장을 연속극 찍듯 기록하던 회사가 조금씩 회생하기 시작하더니 그동안 쌓여 있던 부채며 종잇장이 되었던 주식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직함 하나 없이, 그저 사촌의 사업을 어떻게든 살려놓겠다 하는 의료진의 마음으로 시작했던 것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이미 회사에 눌러앉아 있었고 학위는 물 건너 간지 오래였다.
그때까지도 카사마츠는 아무런 직함이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오지라퍼 정도의 위치였던 셈이다. 사실 회사라고 해 봐야 직원이라고는 회장 쿠로코, 오지라퍼 카사마츠, 그리고 취업사기 피해자 카가미 그 외 부정기적으로 오는 탄광 알바 몇이 다인 영세 사업장이다. 오지라퍼 경력 일 년 차를 찍었을 때, 카사마츠는 그제야 제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이러려고 유학까지 한 건 아닐 것 같았다. 그 날 밤, 카사마츠는 회장 쿠로코를 찾아갔다. 아무래도 나는 다시 공부를 하러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진지하게 말해 오는 카사마츠에게 쿠로코는 역시 형도 무리겠죠 하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보내드리겠습니다. 당분간은 다시 얼굴 보기 힘들겠군요. 훈훈하고 깔끔한 마무리였다. 이제 회사도 어느 정도 살아나고 있으니, 자신이 없어도 괜찮을 거라고 카사마츠는 쿠로코를 다독였다. 쿠로코는 고맙다고 말하며 마지막 고별주를 건넸다.
그게 화근이었다. 쿠로코는 사실 신이 내린 말술이다. 가문에 내려오는 알콜 대처 유전자란 유전자는 쿠로코가 모두 몰빵해서 가져간 것에 가까운 레벨이다. 그 말은, 카사마츠에게는 알콜 대처 유전자라고는 터럭만큼도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공부만 한 엘리트 도련님 카사마츠는 자신이 술을 못 먹는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술이라는 건 실로 악마의 음료다. 딱 한 잔, 우정의 표시로 나눈 고운 빛깔의 ‘Sex on the beach' 칵테일 한 잔에 카사마츠는 그대로 무너졌고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기억나지 않은 간밤의 자신이 종신 계약서를 작성한 후였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쿠로코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해장국과 종신 계약서를 나란히 카사마츠의 눈앞에다 대령해 주었다. 카사마츠는 일어났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맹렬한 숙취를 뒤늦게 느끼며 화장실로 뛰어가 이틀 동안 먹은 것을 전부 게웠다.
뭐 결국 그 모든 것이 옛날이야기다. 결국 학업을 마치지는 못했지만, 그 종신 계약서 덕에 카사마츠는 상무라는 직함을 달았고 지금은 훌륭한 ㈜탄광 쿠로코의 중역이 되어 있었다. 여전히 화이트칼라는 카사마츠뿐인데다, 상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잡일 담당에 가깝지만 나름대로 비서도 생겼다. 광부 지원자 카가미를 위시해 직원들도 수십 명으로 늘었다. 쿠로코의 알 수 없는 경영 방침 때문에 이 모든 직원이 죄다 남자였지만, 상관은 없었다. 이미 그 다 무너져 가던 회사를 제 손으로 살려내고 키워가는 데에 카사마츠는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직원이 적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많았고 회사가 잘 되는 건 자신의 능력이 발휘된 결과다. 카사마츠는 이제 몸도 마음도 ㈜탄광 쿠로코의 일원이 되었다.
그 카사마츠를 몇 달 전부터 괴롭히기 시작한 막무가내의 여자 분이 계셨다.
면접관이 바로 다름 아닌 카사마츠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후, 경련이 일어나는 얼굴로 다시 킬힐을 장착한 키세는 제 앞에 앉은 카사마츠를 보지도 않은 채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다. 잠시 보여준 상큼발랄백치미 미소는 방영중단 된 지 오래였다.
“묵비권을 행사하겠어요. 회장님 불러주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카사마츠의 상식으로는 이 여자는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것 같았다. 면접 보러 와서 묵비권을 행사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황당함을 감춘 카사마츠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답했다.
“회장님 바쁘십니다. 일단 제 면접 통과하시면 회장님 면접도 보실 거예요.”
“당신 뭐야? 당신 뭔데 사람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내가 누군지 알아?”
“상무입니다. 그쪽은 프로 모델이라고 하셨고요.”
카사마츠는 미리 만들어 둔 광고 모델 면접 질문 매뉴얼을 팔랑팔랑 넘기며 사무적으로 답했다. 예상 질문과 예상답안에는 ‘우리 회사를 선택한 이유’ 라던가 ‘우리 회사에서 보여줘야 할 이미지’ 따위가 있었지만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았다. 카사마츠는 탁 소리 나게 매뉴얼을 덮었다. 자신이 현실을 몰랐던 것일까. 모델이라는 직업군이 다들 저렇게 개성적이라면, 몇 번을 살펴봐도 이 서류로 모델을 발탁한다는 것은 탁상공론의 바이블밖엔 안 되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탄광이라는 건 일반인의 눈으로 봤을 땐 극한알바 예능 프로에서나 나올 법한 비현실적인 세계일 것이다. 카사마츠는 매뉴얼을 포기하고 다른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이 회사 뭐 하는 곳인 줄은 알아요?”
“…땅 파기…?”
“…….”
“…….”
“그럼 우리가 왜 광고를 하려고 하는지는 압니까?”
“…어…”
키세는 조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앞의 질문에 이상한 대답을 한 것 정도야 뭐 이해해줄 수 있는 범위의 실수다. 면접이니 긴장이 되기도 하겠지. 게다가 이 깡촌까지 굳이 찾아 온 광고 모델 지망생은 키세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카사마츠는 키세의 좋은 점을 봐 주고 싶었다.
“대박나려고?”
갸웃, 하고 고개를 기울이며 키세가 예의 상큼발랄백치미 넘치는 눈웃음을 보인다. 단정하게 앉아 있던 카사마츠의 어깨가 오른쪽으로 크게 휘청였다.
애당초 카사마츠가 공고를 낸 광고 모델은 구인구직 광고 포스터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포스터라도 깔끔하면 사람 구하는 게 조금은 더 쉬울 것 같았다. 지난 반년 간 자발적으로 회사에 취업을 하러 온 사람은 카가미뿐이었기 때문에 주식회사 탄광 쿠로코는 심각한 인력난을 겪었다. 카사마츠는 억대연봉자라는 자랑스러운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건 단순히 기본수당보다 오버타임 수당이 더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말을 잃은 카사마츠의 당혹스러운 얼굴에는 어떻게 이 여자를 쫓아내야 여자가 덜 상처받을 것인가에 대한 오만가지 상념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래 보여도 여자 대하기 어려워하는 좋은 집 도련님 카사마츠는 그때까지만 해도 키세를 매너 돋게 보내주려고 했다. 헤헤 하는 의심 만땅의 웃음까지 흘리며 키세가 카사마츠에게 이렇게 말해오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저기, 그 쪽 솔직히 면접관 아니죠? 알아요, 이해해요. 나 이런 일 많이 겪어 봤거든요. 근데 나도 좀 바쁘고, 어쨌든 쿠로콧치를 만나서 긴히 옛 정을 좀 풀고 싶거든요? 아시겠지만 여기 교통도 좋지 않고… 차도 금방 끊기던데 결혼도 안 한 처자가 남의 집에서 자고 갈 순 없잖아요. 번호 줄 테니까 이제 회장님한테 안내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위험했다. 여자한테 인터뷰 질문 매뉴얼을 던져버릴 뻔 했다. 만약 눈 앞에 있는 게 시커먼 남자였으면 매뉴얼을 던질 것도 없이 카가미를 불러 내쫓았을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키세가 블링블링한 명품 클러치에서 무엇인가를 꺼낸다. 서양 궁정암투극에서나 보았을 법한 깃털부채였다. 부채가 펴지는 소리가 좌르륵, 하고 아주 청명하게 사무실을 채웠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일인데도 영화라도 보는 것처럼 - 그것도 어처구니없는 삼류 판타지 영화 같았다 - 현실감이 없다. 카사마츠는 키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제 책상 위로 걸어오는 모습을 얼이 빠진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키세의 다른 쪽 손에는 조그마한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여자들의 무기 같은 그 조그맣고 강렬하고 도발적인 그거 말이다.
‘010.****.****, 료콧치, 다른 사람에게 번호 주면 싫어잉♡’
빠알갛고 진한 레드 립스틱으로 카사마츠의 사무용 책상에 제 연락처와 싸인을 남긴 키세가, 화사한 눈웃음을 흘리며 카사마츠를 바라보고 있었다.
*
이건 도저히 내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카사마츠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식은땀이라는 걸 흘리고 있었다. 미국에서 난폭한 양키즈와 스트리트 농구를 했을 때에도 식은땀이 나지는 않았다. 영어고 뭐고 한 마디도 못 하던 벙어리 시절 금발의 글래머 미인이 말을 걸어 왔을 때도 이렇게까지 당황스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든 저 여자 보통내기가 아니다. 카사마츠는 외나무다리에서 반대 문파의 무림고수를 만난 떠돌이 칼잡이가 된 기분으로 제 앞에 서 있는 키세를 바라보았다. 저 여자를 내보내려면 앰뷸런스가 나을지 패트롤카가 나을지를 고민하면서 말이다.
“이제 만족해요? 남자가 되어선 패기도 없기는. 이제 쿠로콧치한테 안내 좀 해줘요. 나 진짜 쿠로콧치랑 깊은 관계거든요.”
키세는 꽤 으스대며 말했고 카사마츠는 짧은 고민을 마친 후 이 정신나간 여자를 자칭 ‘깊은 관계’ 라는 쿠로코에게 토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자가 쿠로코를 만나서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모르지만, 단 하나 확실한 건 쿠로코와 이 여자가 소위 ‘깊은 관계’일 리는 없다는 거였다. 그건 눈치라고는 갱도 저 아래에 두고 온 것 같은 카사마츠로서도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왜냐하면.
“뭐, 뭐, 뭐, 뭐, 뭐, 뭐라고오오오오오오오!!!!!!”
적막한 탄광에 키세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울렸다. 소원대로 쿠로코에게 안내받게 된 키세는 한 시간 넘게 화장을 고쳐야겠다며 카사마츠의 앞에서 팩트며 뷰러, 쉐도우 파레트, 마스카라, 컨실러, 립밤, 틴트 따위를 늘어놓는 기행을 저질렀다. 여자의 파우치란 저런 것이군. 꺼내도 꺼내도 뭔가 나오는 마법의 주머니 같은 것이군. 카사마츠는 멍하니 생각하며 키세가 얼굴을 재창조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확실히 굳이 저렇게 화장을 공들여 하지 않아도 예쁜 여자다. 카사마츠는 그것만은 인정했다. 얼굴이 아깝군.
카사마츠가 키세를 안내한 곳은 회장실도 아니요, 회의실도 아닌 갱도 근처의 광부 휴게실이었다. 키세는 대체 왜 회장님이 몸으로 뛴단 말인가 하는 의심 가득한 표정을 하고서 카사마츠의 뒤를 따랐다. 오래된 문이 불길한 비지엠처럼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키세는 그 안에서, 그토록 애타게 만나고 싶어 산을 넘고 강을 건넜던 미래의 남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남편 분은 건장한 체구의 남자를 벽에 밀어붙인 채 본격 키스 중이셨다.
그랬다. 쿠로코 회장은 호(게)모(이)였던 것이다. 그것도 진성. 머리털 나던 순간부터 야한 비디오를 찾던 순간에도 여자를 찾은 적은 없었다. 첫사랑 대상도 첫 연애도 그리고 첫 키스며 첫 청소년관람불가도 여자가 아닌 남자랑 했다. 그리고 지금은 탄광 쿠로코에 입사한지 막 일 년이 된 광부 카가미 타이가와 절찬 연애 중이셨던 것이다.
저 남자를 후리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긴 페로몬 풀풀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스커트를 조신하게 잡고 휴게실에 들어선 키세의 손에서 고이 잡고 있던 깃털 부채가 툭 하고 떨어졌다. 카사마츠가 끝났군. 하는 표정으로 키세를 돌아보았고, 이 엄청난 상황을 채 받아들이지 못한 키세가 잠시 ‘키세 얼음’의 상태가 된다. 해동에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정확히 삼 초 후, 키세의 처절한 비명이 갱도 안에서 호모라니…호모라니…호모라니… 라는 애처로운 코러스를 만들어내며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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