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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쿠로바스

[화빙(카가히무)] You can keep me

 

그 날 경기가 끝나고 카가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껏 저를 찾아와서 한다는 일이, 제 손을 꽉 잡았다가 놓는 것뿐이었다. 그것뿐인데 얻어맞아 화끈한 얼굴이 달아올랐다. 히무로는 한참을 그냥 가만히 잡혀 있었다. 뜨겁고 커다란 손이었다. 너무 뜨거워서 화상을 입을 것만 같았다. 억센 힘에 손가락이 저릿했다.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갈 즈음, 히무로가 말했다. 너는 나한테 참 농구 같았어. 갑작스럽게 나타나선 단숨에 내 시선을 마음을 인생을 가져가. 카가미는 대꾸하지 않았다. 히무로는 되짚듯이 반복했다. …나한테 너는 그랬어.

 

 

 

 

화빙으로 메리 화이트데이

You can keep me

W. 플루핑

 

 

 

 

살면서 단 한 순간만 바꾸어놓을 수 있다면 무엇을 바꿀까. 슬펐던 기억이나 기분 나빴던 시간을 바꾸고 싶을까. 아니면 아쉽게 놓친 행운에 다시 도전해 볼까. 밤마다 후회하고 후회하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면서, 히무로는 생각했다. 만약 내 인생에서 단 한 가지 소거할 수 있다면 카가미와 마주쳤던 그 순간을 지워 없애고야 말리라고.

 

 

저녁부터 시작한 비가 새벽 내내 내렸다. 히무로는 한 숨도 잠들지 못한 채 거실 소파에 기대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온통 젖어서는 절 찾아왔던 남자가 누워 있을 침실 쪽에서는 비 냄새가 난다. 부러 그 쪽으로는 조금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열없이 뜨끈함이 남아있는 것만 같은 손등을 매만졌다. 그 손의 온기를 기억한다. 그건 뭐랄까 어떤 낙인 같았다. 창가를 때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스스로를 다스리듯이, 혹은 스스로를 체벌하듯이 마시기 시작한 커피가 다섯 잔을 넘어가고 있었다.

 

시합에서 지고 나서 히무로는 차라리 마음이 시원했다. 응당 그래야 했던 대로 돌아간 것 이다. 모두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카가미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제 다 그만 둘 거야. 농구도, 너도. 카가미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손을 으스러뜨리기라도 할 듯이 사나운 힘이었다. 히무로는 차라리 그 힘이 저를 모조리 부수어 주었으면 하고 바랐었다. 게임을 다시 시작하듯이 모든 것을 갈아엎어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이후 이따금 카가미는 제 집까지 찾아와 서성이다 돌아가곤 했다. 히무로는 대체로 제 집 근처를 방황하는 카가미의 긴 그림자를 창가에 붙어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저를 불러내지도 못하고 남자가, 발길을 돌려 돌아갈 때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겨우 담벼락 하나 만큼의 거리였는데 히무로도 카가미도 그 거리를 뛰어넘질 못했다. 늘 그런 관계다. 지금 선 자리에서 조금만 움직이면 해방될 수 있을 줄을 알면서도 서로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 딱 한 번, 히무로가 집 밖에 선 카가미에게 전화를 했다. 돌아가. 남자의 나직한 숨소리에도 목이 콱 막히는 것처럼 금방 힘이 들었다. 끊을게, 하고 전화를 내려놓으려던 히무로에게 카가미가 말을 했다. …타츠야. 나는 노력하고 싶어. 노력하고 싶어 난.

 

저 방 끝에서, 남자의 뒤척임이 들린다. 히무로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비척비척 걸었다. 겨우 대여섯 걸음 떼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무거웠다. 문을 밀쳐 열었다. 천천히 남자가 누운 쪽으로 다가가 침대 가에 풀썩 주저앉았다. 미적지근해진 물수건을 치워 주고 이마를 짚었다. 온도를 가늠하고 떼어내는 히무로의 팔을 카가미의 손이 잡는다. 그 때처럼, 화상을 입을 듯이 뜨거운 손.

 

“…일어난 줄 몰랐네. 열 많이 내렸다.”

 

“…타츠야.”

 

“더 자. 아직 새벽이야.”

 

히무로는 단호한 힘으로 카가미의 손을 떼어 낸다. 밤새 앓은 남자의 얼굴이 해쓱했다.

 

간밤에 제 집 문 앞에 비에 푹 젖은 꼴을 한 카가미를 발견했다. 아무리 저라도 과연 돌아가라고 그 꼬락서니를 내몰 만큼 냉정하지는 못했다. 별 수 없이 카가미를 집에 들여 수건을 건넸다. 갈아입을 옷을 내어주고 나니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꾸만 회의감만 커졌다. 대체 뭘 하려고. 다 끝났다고 말해 두고선 대체, 뭘 하려고.

 

불행했느냐, 라고 물으면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다. 제 삶에서 카가미만한 빛을, 기적을 만난 일은 다시는 없었다. 제 속에서 가장 보석 같은 시간이 카가미와 함께 했던 시간에 있었다. 카가미는 존재 자체로 제 기적이었고 누구보다 빛나는 제 자랑. 그래서 지우고 싶었다. 기적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나 기적이다. 제 안에 그토록 저열하고 비겁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 카가미는 자꾸만 그것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가끔 화가 난다. 나는 이렇게 꼬인 인간이 되어버렸는데 왜 너는 아직도 혼자 그렇게 곧은 예전의 모습 그대로인지.

 

“목마르지. 물이라도 마셔.”

 

“타츠야.”

 

“누워 있어. 아직 열나더라.”

 

“나는,”

 

설핏 웃으며 재빨리 자리를 뜨려는 히무로를 카가미의 목소리가 붙잡는다.

 

“그저 알겠다고 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나?”

 

기적과 마주치지 말아야 했다. 그토록 무너질 것을 알았다면 처음부터 카가미를 불러 세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매일 꿈속을 헤매며 히무로가 후회를 반복하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그 때, 그 순간에, 너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히무로의 웃는 낯이 아주 잠시 무너졌다가 금세 녹아내리듯 돌아온다. 히무로는 옛날처럼 웃었다.

 

“…없어.”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부엌엘 나왔다. 익숙하게 찬장을 열어 주전자를 꺼냈다. 불 위에 물주전자를 올리고 천천히 물이 끓는 양을 지켜보았다. 망연히 주전자가 치익 하는 소리를 내며 수증기를 피워 올리는 모습을 응시했다. 문득 어지럽다. 싱크대를 짚었다. 무릎이 꺾일 것 같은 아득함이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이어졌다. 힘에 겨워 고개를 숙였다. 카가미가 쥐었던 손과 손목에 뜨끈한 감각이 사라지질 않았다. 토할 것 같았다.

 

마음에는 방이 여러 개 있다. 어떤 방에서는 카가미를 저주하고 어떤 방에서는 카가미를 그리워했다. 어떤 방에서는 카가미를 사랑하고 어떤 방에서는 카가미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 수십 개의 방을 돌며 문을 여는 과정의 반복을 지치도 않고 되풀이했다. 설마 사랑이었을까? 털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조금도 털어내지 못했고 지워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손의 온기조차 잊을 수가 없었다. 카가미를 대하는 자신은 정말이지 언제나 엉망이다. 너무 엉망이라 차라리 지워버리고 싶었다. 히무로는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신음 한 번 없이 홀로 고통스러운 감각을 감내한다. 눈을 감고 천천히, 아주 느리게 막 태어난 아기가 세상에 익숙해져 가는 과정처럼 조심스럽게.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올려드는 히무로의 어깨에 뜨끈한 감각이 실렸다. 그리고는 묵직한 감각이 기대어 온다. 침입자처럼 제 위로 올라온 팔이 무언가를 건넨다. 혀에 닿아오는 달콤한 감각. 사탕이었다.

 

“…그냥, 챙겨주고 싶더라.”

 

남자는 제 어깨에 이마를 댄다. 남자의 머리카락이 제 목 언저리를 간질였다. 남자가 숨을 쉴 때마다 말을 할 때마다 그 진동이 저한테까지 옮아오는 것처럼 히무로는 조금 떨었다. 잘라낼 수 있을까. 내가, 이 남자를 정말 잘라낼 수 있을까. 남자가 살짝 웃었다. 안 챙길 것도 알고 챙길 만큼 대단한 날도 아닌 거 아는데 그냥 챙겨주고 싶었어. 제 어깨를 붙잡은 남자의 손이 뜨거웠다. 히무로는 손을 떼어놓을 때처럼 단호해지지 못했다. 남자가 말했다. 잔뜩 잠기고도 전혀 뭉그러지지 않은 그 목소리로.

 

“나한테 와.”

 

남자에게 화상을 입었다. 남자는 저를 죄 태우는 불꽃이었다. 불구덩이에 내던져진 것처럼 내내 아팠다. 화끈한 통증이 견디기 힘들어 도망치고 싶었다. 남자를 부정하고 감정을 잘라내어 없던 일로 돌려놓고 싶었다.

 

“후회 안하게 할게. 절대 후회할 일 없게 할게.”

 

카가미가 팔을 뻗어 히무로의 목을 끌어안는다. 이제 어깨 뿐 아니라 온 몸이 온통 남자로 달아올랐다. 남자가 제 목에 입술을 묻는다. 뜨거운 남자의 입술이, 꾹 눌러 찍는 것처럼 히무로의 목에 뜨거운 화상을 입힌다.

 

“다시 시작하자 우리”

 

다시 낙인을 새긴다. 그 남자의 온도로, 그 남자의 감각으로 제 어깨에 지워지지 않을 선뜻한 화상을 새기는 것이다. 스스로 흉터를 헤집는 것. 사랑은 그런 과정이다. 혀에 와 닿는 사탕이 너무나 달콤해서, 단 감각에 목이 메어서 히무로는 겨우 대답했다. 응. 이번엔 그 많은 방들이 남자의 사탕처럼 달콤할 수도 있으리라. 온 몸에 열상이 새겨지는 지금의 통증조차 달콤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