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집을 떠날 때, 아오미네는 다시 내일 밤 여덟 시라고 시간을 못 박았고 남자는 피식 웃으면서도 거절하지 않았다. 남자의 얼굴을 아주 잠시간 스쳐간 실소였는데도 그 웃음에 마음이 들썩였다. 제가 집에 들어가는 걸 지켜봐 주지는 않아도, 자신이 들어갈 때에도 집 밖에 서서 담배를 피워 무는 남자의 옆얼굴이 근사했다.
애써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현관문을 닫았다. 지겹게 따라붙어 보라던 키세의 말은 지킨 셈이었지만, 아오미네는 혼란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제 바지 주머니 속의, 몰래 가져온 남자의 어린 시절 사진이 뜨거웠다. 사진에 무슨 온도가 있을 리 만무한데도 뜨끔뜨끔 제 존재를 알려오는 사진의 느낌에 제 심장이 욱씬욱씬 쑤셔온다는 건, 아오미네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감정이었다. 남자에게 신경을 끄면 되는데. 잘 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면 아파트 앞에서 마주친 남자를 툭툭 건드리고 있었고 남자의 표정이 좋지 않은 날이면 뱃속 어딘가가 쓰려오곤 했다. 아오미네는 남자의 방에서 가져온 사진을 제 지갑 안쪽에 끼워 두었다. 이름도 모르는 남자와의 거리가 조금은 가까워 진 것 같아서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도 남자의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남자가 웃던 모습, 자연스레 제게 말을 걸어오던 모습.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와 물이 푹 젖어 있던 모습. 자신보다 조금 작을까, 싶은 비슷한 키에 말랐지만 근육이 제대로 잡힌 몸. 물을 똑똑 떨어뜨리던 약간은 긴, 한쪽 눈을 가리며 내려오는 머리칼. 섹시했는데, 젠장… 나른하게 제 것을 쥐었다. 마이짱도 또래의 여자아이의 상상도 아닌데 쉽게 흥분했다. 아오미네는 굳이 그 행위의 당위성을 세우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수음하는 손이 빨라지며 머릿속에 남자를 그린다. 담배를 피워 물던 입가, 제 셔츠를 붙잡아 오던 서늘한 손가락, 찡그리는 눈매, 힘없이 웃던 목소리…….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까? 누구를 떠올리며 외로운 밤을 달래고 누구의 곁에서 행복해할까.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이전처럼 우연히 남자를 마주치길 바랐지만 그런 행운은 없었다. 수업 내내 남자의 생각을 했다. 남자는 몇 살쯤 되었을까. 카가미와 친구였던 것 같으니 스물네 살? 스물다섯 살? 자신이랑은 열 살 가까이 차이가 난다. 그 차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종종 대학생으로 오해받는 편이고 남자는 나이 들어 보이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상관은 없을 거야. 고전 국어니 영어니 하는 수업 내용들을 한 귀로 흘리면서, 아오미네는 속으로 생각했다. 빨리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뭘 먹고 사는지 생활감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는 그 집과 그 얼굴에 하다못해 컵라면이라도 쥐여 주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아오미네는 책상에 고개를 파묻었다. 감정 자체가 아주 낯설었다. 지금 느끼고 있는 것들에 이름을 붙이기에 그는 영락없는 운동계 남학생이었고 이런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감정을 만지고 다듬는 취미가 없었다. 온통 농구와, 농구와 그리고 농구밖에 없던 짧은 인생에 불쑥 비집고 들어온 타인에 대한 관심은 어마어마한 크기로 그의 일상을 잠식 중이었다.
가랑비에 옷을 적시듯, 자꾸만 시야에 걸리던 남자에게 저만 홀로 젖어드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흘러넘치는 생각은 막을 수가 없었고 습관적으로 남자를 찾는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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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 엄청나네.
히무로는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며 생각했다. 이 녀석이 왜 이렇게나 엄청난 얼굴로 자길 쳐다보는지 알 듯 말 듯 했지만 부러 의식의 확장을 멈췄다. 알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만으로도 충분히 벅찼다. 이 아무런 악의도 없는 사회성 별로인 어린 녀석과 관련되고 싶지 않았다. 히무로는 말없이 식탁에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함께하는 녀석을 자신의 바운더리에 포함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너라고 부르면 금방 더러운 표정을 짓는 아오미네와는 저녁이면 종종 만났다. 하는 일이라고는 같이 밥을 먹거나, 관심도 없는 TV를 보거나 그것도 아니면 각자 책을 읽는 등 굉장히 별것도 아닌 것들뿐이었다. 녀석은 숙제가 있으면 종종 그것을 이곳에 가져와서 했고 히무로는 쉬운 한자까지 여지없이 틀려먹는 녀석을 소파에 늘어져서 지적해주곤 했다. 가끔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아오미네는 집에 가기 전엔 늘 문단속하고 자라며 깨우곤 했다. 훔쳐갈 것도 없다며 어이없어 하든 말든 언제나 집에 가는 저를 현관까지 배웅하고, 문을 잠그게끔 하는 게 녀석의 마지막 인사였다. 정말 알 수 없는 부분에서 세심한 녀석이었다.
“표정 더럽다.”
지적하자 녀석은 인상을 조금 찌푸리더니 미간을 엄지로 꾹꾹 눌렀다.
“사람 얼굴에 대고 더럽다니. 그쪽은 말버릇이 더럽잖아.”
“난 괜찮아. 남들 앞에선 이러지 않거든. 그런데 너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종종 그럴 것 같단 말이지.”
“여러모로 봐도 내 쪽이 일관성 있고 진실하네 뭐.”
아오미네는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며 말했다. 자신의 저녁이 될 예정이었던 편의점표 샌드위치였다. 비슷한 수준의 편의점 도시락이면서도 아오미네는 부득불 그것을 제 것과 바꾸어 먹기를 종용했다. 대체 이딴 것만 먹고서 어떻게 사느냐며 투덜거린 아오미네는 맛없는 표정으로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씹었다. 양상추가 시든 것만 빼면 영양소가 고루 들어간 썩 나쁘지 않은 조합이라고 일러주려다 포기했다.
히무로는 마지막 숟갈을 뜨고서 평소보다 배부르게 먹은 도시락 뚜껑을 덮었다. 운동을 할 때에 비해서는 터무니없이 적은 양이었지만 이젠 그때처럼 활동량이 많은 게 아니어서 이 이상 먹어봤자 밤에 소화제를 찾게 될 게 뻔했다. 매일같이 달리고 넘어지고 뛰어오르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 몸은 금방 바뀐 환경에 적응해버렸다.
“일관성 있게 어디 가서 인상 좋단 소린 못 들을 얼굴이지.”
온화하게 웃으며 말하자 녀석은 움찔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는 거긴 인상이 그렇게 좋아서 행실이 단정치 못하신가.”
아픈 구석을 건드리면 발끈하는 점이 어렸다. 어렸지만 귀엽지 않은 어린이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생각하며 히무로는 식탁위로 턱을 괴었다.
“행실까지 단정하면, 사는 게 재미없어지는 인생이라.”
애써 편 보람도 없이 금방 구겨지는 녀석의 미간에 히무로는 옅게 웃었다. 자신이 먼저 건드려놓고서 이쪽에서 조금만 세게 나가면 불편한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게 웃겼다. 척 봐도 노멀 같은 녀석이 왜 그렇게 자신의 옆자리로 밀고 들어오는지 히무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이해하려 어떻게든 노력은 해볼 수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녀석은 녀석대로 방황하게 내버려둘 따름이었다. 히무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기들을 정리했다.
“다른 좋아하는 건 없어? 아니면 뭐, 이거저거 싹싹 긁어다가 원래 자기 몫이 아니었다는 합리화에 죄다 포함시켜 버리기라도 했나?”
툭 하고 등 뒤로 아오미네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아 이 망할 어린자식.
히무로는 생각하며 싱크대에 수저를 넣었다. 대답 없이 플라스틱 통을 분리수거함에 넣는 뒷모습을 좇으며 아오미네는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대체 뭘 좋아하면서 살고 있는 거야. 원나잇 같은 거 말고.”
“아오미네.”
이 이상은 넘어오지 말라는 선을 그으며 히무로는 시선을 마주했다. 의외로 녀석은 조금도 웃지 않고 있었다.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웃음기대신 생각에 깊이 잠긴 기묘한 소용돌이만이 가득했다.
“당신 진짜 치사한 거 알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렇게 세상 대충 사는 것처럼 굴 거면 그런 표정 그만 두는 게 어때.”
“…아오미네. 그만 해.”
“싫어. 이것부터 물어보자. 왜 그렇게 세상 재미없다는 듯이 살아?”
“재미없으니까. 어때 만족할 만한 답이 됐어?”
“아니. 전혀 안 됐어.”
“무슨 답을 원하는데?”
“몰라.”
“지금 말씨름 하고 싶은 거야?”
“아냐.”
“그럼 시비 거는 건가?”
“아니.”
“너 유치해. 어려.”
“아니. 유치한 건 그 쪽이야.”
아오미네는 거의 그르렁 거리듯이 사납게 말했다. 히무로는 왜 녀석이 이렇게 갑작스레 성을 내는지 이유도 알 수가 없었을 뿐더러 관심도 없었다. 평상시에는 대하기가 그다지 껄끄럽지 않은데 이럴 때의 녀석은 참 다루기 힘든 폭탄 같다. 다른 사람 대하듯이 웃어넘기려고 하는데 아오미네는 그게 참 안 되는 상대였다. 자신이 화낸다고 해서 쫄 녀석도 아니고 저도 딱히 자제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히무로는 밀려드는 피로감에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그만하자. 안 피곤해?”
히무로는 녀석의 말을 죄 무시할 작정으로 수돗물을 틀었고 쏴아아 하는 물소리가 한바탕 말다툼이 휩쓸고 지나간 거실과, 그와 연결된 부엌을 가득 채웠다. 어찌되었든 녀석보다는 자신이 어른이다. 어른의 도리고 뭐고 따질 생각은 없지만 자신까지 저 페이스에 말려들어 버리면 답도 없이 유치하고 소득 없는 말싸움만 이어질 뿐이다. 히무로는 정말 자신답지 않게도 타이르듯이 말을 걸었다.
“…아오미네.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그 고민은 타인에게 공감 받을 수가 없게 되어 있어. 원래 그래. 지금 네가 나한테 내 고민을 털어놓으라고 하는 거, 그거.”
히무로는 물을 껐다.
“폭력이야. 알아들어?”
아오미네는 불만에 가득 찬 사람처럼 표정이 굳어서는 히무로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히무로는 한숨을 푹 쉬며 잠깐 눈을 감는다. 뻐근하게 감겨오는 눈이 피곤했다. 갑자기 제 일상을 침범하기 시작한 저 어린아이를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지, 저 애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혼란스러웠다. 홀로 식사하는 것도 홀로 남은 집도 어려울 것은 없었지만, 저 애가 들어와서 종알거리는 것도 솔직히 나쁘지는 않았다. 혼자 있을 때 제 생활 전반을 지배하던 기분 나쁜 상념들을 저 아이가 종알종알, 제 생활이며 시간에 멋대로 침범해 와서 떠들고 있으면, 어찌되었든 아주 조금은 녀석에게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제 머릿속에서 미뤄둘 수가 있었다. 나쁘지 않아서 그냥 두었다. 그러나 그 생각에 이런 귀찮은 셈까지는 해보지 않았었다. 녀석이 선을 넘어오려 할 거라는 생각. 역시 아주 작은 부분이라고 해도 쉽게 내어주었던 것부터가 잘못되었던 걸까.
“이대로도 괜찮다는 생각 안 해? 굳이 복잡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 있어?”
녀석은 그 말에 울컥 치받는지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고 매운 소리를 뱉을 것 같던 녀석이 잠자코 어금니를 깨무는 모습이 보였다. 히무로는 이를 까드득 가는 아오미네를 바라보며 괜히 난처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파트를 역시 새로 구해야 하는 걸까. 여기서 더 소란을 일으키면 눈총이 따가워서라도 이사를 가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여기를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미련이 슬그머니 발목을 잡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 좋다는 걸 알면서도 남자들을 집으로 끌어들였던 것과 비슷한 이유였다. 이 곳, 이 집에는 버릴 수 없는 한때나마 자신의 전부였던 기억들이 잠들어 있었다. 하수구에 들러붙은 찌꺼기들처럼 더덕더덕 자신의 감정이 눌어붙은 곳을 쉽게 떠나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모습이 꽤나 우스웠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나도 알아.”
생각하는 와중에 아오미네의 목소리가 상념을 깨고 귓가에 쳐들어왔다. 잔뜩 억눌린 목소리의 뿌리에는 침착한 울분이 잠들어 있었다.
“그 정도는 안다고. 그쪽은 날 뭐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애쯤으로 생각하고 있나본데. 나도 눈치란 게 있고. 시발, 타인의 개인적인 공간을 배려하는 방법 정돈 배웠거든?”
“…….”
사람 하나 잡아 죽일 것 같은 강렬한 눈빛과, 낮은 목소리에서 나오는 박력이 온통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꾹꾹 감정을 누르려 노력하는 게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전혀 제어하지 못한 채로 온 몸을 부딪치는 녀석 역시 그 자리에 존재했다.
“…거기가 딱히 나에 대해 별 생각 없다는 것도, 그냥 귀찮으니까 받아주는 것도 알아. 말하는 거 하나, 행동하는 거 하나에서 전부 느껴진다고. 별로 열심히 숨기지도 않았잖아.”
“그래…. 알고 있었으면 이제 와서 배신감 느낄 건 없잖아.”
히무로는 그렇게 말하며 아오미네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았다. 저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는 녀석은 비굴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조금도 비굴하지 않았다. 다만 담담하게 직시한 관계가 분하다고 하는 얼굴이이서 그는 조금 마음이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나는…. 솔직히 눈치 채지 않았어? 모르는 척 하는 거던가, 아니면 생각자체를 안했던가.”
“잠시만.”
“난 그쪽이랑 자고 싶어. 대주니까 한다 그런 거 말고…. 그냥 같이 밥 먹고. 손잡고, 만났을 때 웃는 사이가 되고 싶다고.”
“아오미네.”
억지로 멈춘 의식의 확장을 난폭하게 휘젓는 손길이었다. 히무로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닫아두었던 문이 막무가내로 들이받는 녀석의 폭격에 흔들거렸다. 싫다는 생각이 든 순간 그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상관도 없는 사람 인생 오지랖 넓게 들쑤시고 다닐 만큼 할 일 없는 놈 아냐. 당연히 그쪽이랑 뭔가 하고 싶으니까 건드리는 거라고.”
“뭔가 하고 싶으니까 건드린다….”
히무로는 낮게 웃었다. 부러 말꼬리를 끈다. 녀석의 이마가 특유의 표정으로 사납게 굳는다. 저 표정을 알고 있다. 선이 굵고 피부가 까무잡잡해서 거칠게 보이지만 저건 생각하는 표정이다. 모르는 한자를 마주할 때, 제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많이 보였던 얼굴이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설마 녀석이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할 것도 없었다. 더 이상 제 속을 파고들려고 하는 시도 같은 걸 받아줄 만큼 히무로는 무른 사람이 아니었다. 히무로는 아주 화사하게 웃었다. 속삭이듯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표정과는 아주 정반대의 말을.
“불쾌해.”
녀석의 눈동자가 커진다. 이 뒷 수순 같은 건 이제 빤하다. 녀석은 상처 받은 얼굴로 이 집을 나갈 거고 다시는 저에게 상관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한 번 상처받은 인간은 그 상처를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상처받지 않으려고 자신을 감싸게 되기 마련이니까. 앞뒤 돌보지 않는 그 무모한 치받음은, 아오미네가 아직 어리고 다쳐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는 자신의 집에 오지 않을 것이고 자신은 다시 혼자가 되겠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정말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전혀 다른데도 왜인지 카가미의 기억이 났다. 그 날 밤의 그의 얼굴이 녀석의 얼굴 위로 겹친다. 특유의 그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며 난 너를 알고 싶어. 말해 오던 그 얼굴이.
“같이 자고 싶은 거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너는 몸도 꽤 괜찮은 편이니 즐기기엔 나쁘지 않은 상대 같은데. 그렇지만 그 이상은 아냐. 밥 먹고 손잡고 웃을 수 있는 상대, 학교에서 찾아. 잘못 골랐어.”
새파랗게 달아오른 녀석의 눈동자가 매서웠다. 히무로는 제가 할 말은 다 쏟아 놓고 담담하게 마주 봐 주었다. 제법 좋은 눈빛이다. 어리다고 마냥 무시하기에는 지나치게 강렬한. 히무로는 자연스레 시선을 돌리며 돌아 섰다. 녀석이 제 등 뒤에 앉아 인상을 쓰고 있는 걸 알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무시했다. 한동안 달그락거리며 그릇을 정리하는 소리만 이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오미네가 의자를 끌며 일어나 신발을 신는 소리가 들려 왔다. 히무로는 부러 배웅하지 않는다. 달칵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아오미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여덟시에 또 올게.”
“…….”
“피한답시고 외박하지 마. 문 앞에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릴 거니까.”
천천히, 문이 느린 소리를 내며 닫혔다. 히무로는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두꺼운 문이 닫히고 나서야 온전하게 느껴지는 정적이 다시 찾아왔다. 숨이 막히면서도 안정감 있는 고요함이었다. 고개를 몇 번 흔들어 뺨에 붙어있던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히무로는 손에 묻어있던 물기를 핸드 타월에 닦았다. 그리고선 다시 식탁에 앉았다. 하루 중 굉장히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곳이었다. 습관적으로 턱을 괴고 앉아서 멍하니 벽을 바라보던 히무로는 정지된 그림처럼 오랜 시간 그곳에 앉아있었다. 머릿속에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성 없는 다양한 상념들이 뛰어 다녔다.
커피 마시고 싶네. 개중 가장 직관적이고 의미 없는 생각을 잡아채며 그는 커피메이커의 전원을 올렸다.
이미 포만감이 충분히 느껴져서 더 이상 밀어 넣으면 안 될 것 같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뭔가 먹고 싶었다. 맛을 음미하지 못할 상황인 것과는 관계없는 단순한 혀의 욕망일 뿐이었다. 여과지를 깔고서 분쇄된 원두를 눈대중으로 대충 부으며 히무로는 혹시나 하며 기회를 보고 있던 한숨을 밀어 넣었다.
또 오겠다니. 튼튼하기도 하지.
녀석의 맷집을 잠시 떠올리다가 그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왔다. 막 냉장고에서 꺼내 차가운 물을 역시나 대강 비슷 하려나 싶은 수준으로 부었다. ‘미식가처럼 생겨놓고서 타츠야 커피는 맛없어.’ 남자는 어이없는 얼굴로 웃으며 그렇게 말했더랬다. 이렇게 비율을 안 맞추니까 그런 거 아냐. 그리고 원두 높이도 평평하지 않으면 물줄기가 내려오면서 물길이 흐트러진다고.
잔소리가 생각나서 히무로는 그나마 여과지를 탁탁 털어서 수평을 만들어주었다. 생긴 것만 봐서는 원두 산지나 로스팅 기간 같은걸 따져대며 마실 얼굴이라고 지적하던 남자는 퍽 섬세한 편이었다. 누가 누구더러 생긴 것과 다르다고 말하는지 모를 만큼.
대신에 남자가 내린 커피는 확실히 맛있었다. 같은 제품으로 만들어낸 것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향이 좋아서 히무로는 가급적이면 남자에게 커피내리기를 종용했었다.
물이 끓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그는 마시고 싶었던 게, 단순히 커피가 아닌 남자가 내린, 향이 그윽하던 커피였다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떠올려냈다. 이미 아침부터 내리 다섯 잔째였다. 더 마시고 싶을 이유가 없었다.
히무로는 커피메이커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인상을 굳혔다. 어둡고 파랗던 녀석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빛도 잘 들지 않는 몇 백 미터 아래의 심해 같았다.
“…아 정말이지.”
나지막하게 짜증이 흘러나왔다. 머리칼을 무의식적으로 쓸어 올리며 천천히 주전자에 떨어지는 까만 물을 응시했다. 자꾸만 남자와 녀석의 기억이 번갈아가며 머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마구잡이로 순서 없이 뒤섞여 튀어나왔다. 이쯤 되면 녀석에게 남자의 기억을 꺼내는 뭔가가 있긴 있는 것 같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많아봐야 열다섯. 만났을 때부터 존댓말은 이미 관뒀고, 허구한 날 그쪽 혹은 거기라고 지칭하는 것을 포함해 시건방지기가 이루 말할 데 없는 녀석이었다.
“열다섯… 열다섯. 좋아한다는 게 뭔지나 아느냔 말이지.”
부글부글 물이 떨어지는 소리와 추출된 커피가 주전자 위로 차오르는 소리가 부엌에 가득했다. 말로 뱉어놓고 새삼 스스로의 열다섯을 되뇌어 보는 건 막을 길이 없었다.
자신의 열다섯엔 무엇이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역시 농구뿐이었다. 공을 뺏기지 않는 드리블. 가드를 뚫을 수 있는 드라이브 인. 슛을 더 정확하게 성공시키는 자세라던가. 가장 집요하게 따라붙을 수 있는 포지션 같은 것들이 그때의 최대 관심사였다. 농구시합을 녹화해서 주구장창 돌려보고, 농구잡지를 친구들과 종류별로 나눠서 구입하고, 용돈을 전부 농구용품에 쏟아 붓던 나날들이었다. 그 시절 농구를 제외하면 저에게 남는 거라고는….
떠올리자 순간 목이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농구를 빼지 않아도 있었지만, 농구를 빼고서도 홀로 존재하던 카가미의 웃는 얼굴이 총탄처럼 뇌리에 처박혔다.
중학교에 진학해 마치 막상막하처럼 한번 걸러 한번 씩 승리를 떠내던 와중에도 히무로는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카가미는 금방 자신을 뛰어넘는다는 걸. 그리고 그건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닌 타고난 순간부터 정해진 재능의 차이라는 걸.
그땐 그걸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어처구니없을 오기를 부린 것도 그래서였다. 마치 떼쓰듯이 억지를 부렸다. 어려서 몰랐지만 그건 네가 부럽다고, 네가 질투 나서 죽겠다는 몸부림이었다.
다음 시합 때 링을 걸라고 말한 건 스스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내질렀던 아집이었다. 관계를 담보로 협박을 한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당시에는 그게 정당하다고 느껴졌다. 네가 이기면 우린 형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네가 져주는 건 허락하지 않겠다.
유치했지만 그만큼 절박하기도 했다. 저를 좌절시키는 재능에 대한 나름대로의 반항이었지만, 날 끝이 카가미에게 향하는 건 잘못된 짓이었다.
그래서 대가로 카가미를 처음 잃었어야했다.
그게 열다섯인가…. 그래 아마도 열다섯 살 이었던 것 같았다. 카가미가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학교를 박차고 나가 그의 집으로 달렸더랬다. 이유를 꼽아볼 새도 없이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의 움직임이었다. 달리는 내내 대체 왜? 라는 생각을 계속해서 해야 했다. 대체 넌 어딜 향하고 있느냐고. 사실은 바랐던 게 아니었냐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다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텅 비어버린 집 앞에 다가가서도, 울리지 않는 초인종을 몇 번이나 누르면서도, 대답 없는 문을 계속해서 두드리면서도, 설마 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물음표로 가득한 머리로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줄곧 방해물처럼 여겨지던 돌멩이가 빠지면서 마음을 막아두고 있던 둑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기껏 지켜내던 방어선이 붕괴되자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바짝바짝 가물어 흙먼지가 일던 자리에 애틋한 감정들이 엄습해왔다. 오기와 열등감에 가려서 차마 보이지 않던 저의 마음이 다 무너진 지금에서야 생생하게 드러났다.
카가미를 좋아한다고 그 순간 처음으로 인정했다. 살아가던 중에 손꼽을 만큼 지독한 기분이었다.
“……아.”
히무로는 뒤늦게 주전자를 들었다. 이미 알맞은 추출시점은 지난 지 오래였다. 중간에 적당히 꺼내지 못한 커피는 좋지 않은 맛이 섞여서 씁쓸했다. 물끄러미 주전자를 바라보다 히무로는 그냥 머그컵에 커피를 가득 따랐다. 어차피 제대로 했어도 자신이 원하는 커피는 만들지 못했을 것이었다.
뜨거운 김이 나는 머그잔을 들고서 천천히 거실을 빙글빙글 돌았다.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가 머리를 두어 번 쓸어내리다가 그는 커피를 조금 마셨다. 그렇게 한참을 돌다가 다시 한 모금을 마시고 한참을 서성대다 또 다시 한 모금을 마시던 머그잔이 반쯤 비었을 때, 히무로는 배회하던 걸음을 멈추고 현관 옆 인터폰박스로 향했다. 향도 맛도 그리 좋지 못한 커피를 입안에 머금으며 화면표시 버튼을 눌렀다.
인터폰박스의 조그만 화면 속에는 길 잃은 아오미네의 등이 보였다. 현관문을 등지고 서있는 모습이었다. 꽉 말아 쥔 주먹과 수만 가지 이야기를 전하는 너른 등을 보며 히무로는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벽에 이마가 툭, 하고 부딪혔다.
화면 너머로 보이는 녀석의 등에 십여 년 전 자신의 뒷모습이 겹쳐졌다. 히무로도 같은 짓을 했었다. 미아처럼 우두커니 남의 집 앞에 서서 오래오래 기다리는 일을.
아직까지도 기억이 남아있었다. 이름이 다 지워진 우편함 앞에서 해가 질 때까지 멍하니 서있던 당시의 처량 맞은 기분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다시 한 번 화면속의 아오미네 뒷모습을 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쉬이 짐작이 갔다.
우문이었다. 아무리 어려도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적어도 자신은 그러했다. 사는 이 없는 집 앞에서 해가 지는지도 모르고 땅거미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던 열다섯 히무로는 분명 알고 있었다. 누군가 그의 마음을 진실하지 못하다고 말했으면 정말로 상처받았을 것이었다. 망부석처럼 그렇게 한참이나, 여기서 뭐하고 있냐며 자신을 찾아올 카가미를 기다리던 마음이 거짓일리 없었다.
끝내 나타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기다릴 수밖에 없던 그 연심이 착각일리 없듯이 너 역시 그렇겠지. 그래….
너 역시 그런 거겠지….
히무로는 화면으로 보이는 아오미네의 등을 손가락을 꾹 누르며 말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렇지만 기다리지 말고 이제 그만 가.
등을 떠미는 것처럼 그는 화면이 꺼질 때까지 손가락으로 녀석의 등을 누르고 있었다. 파란 불이 깜빡깜빡 거린 후 인터폰 화면은 점멸했다.
-
히무로의 집을 박차다시피 나와서, 아오미네는 오랫동안 남자의 현관문 앞에 기대어 있었다. 먼저 찾아온 건 민망함이었다. 나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생각보다 행동부터 앞서는 이 버릇 진짜 어떻게든 고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건 분명 고백이었다. 열 받은 김에 그 따위로 고백이라니. 폼이 안 나는 정도가 아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밤바람이 시뻘건 얼굴에 닿아 화끈화끈했다. 아오미네는 잠시, 어지러운 속내를 달래며 남자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제 말을 곱씹어 본다. 난 그쪽이랑 자고 싶어. 대주니까 한다, 그런 거 말고… 그냥 같이 밥 먹고. 손잡고, 만났을 때 웃는 사이가 되고 싶어. 그쪽이랑 뭔가 하고 싶으니까 건드리는 거야.
팔에 얼굴을 묻었다. 어쩐지 얼굴뿐 아니라 마음까지 따끔따끔했다. 남자가 뭐라고 했더라.
섭섭했다. 남자와 자신은 애당초 아무 관계도 아닌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면서 이유도 없이 섭섭했다. 짜증이 났다. 자신과 어떻게든 거리를 좁혀 줄 생각이라고는 절대로 하지 않을 남자가 짜증이 났고 남자에게 더 다가갈 수 없는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슬펐다. 남자에게 아무것도 아닌 자신이. 그저 시끄럽고 거추장스러운 타인일 수밖에 없는 자신이. 불안했다. 남자가 다시는, 다시는 나를 보지 않으면 어떡하지?
순간 아오미네는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감정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가슴께가 뻐근했다. 울컥 하고 뱉으면 지금껏 모르고 있던 제 마음이 툭,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오미네는 비척이며 집으로 걸었다. 겨우 열 걸음 남짓한 거리인데도 금방이라도 무릎이 무너질 것처럼 후들거렸다. 왜 이렇게 늦게 다니냐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적당히 흘려들으면서, 농구공을 들고 그대로 집을 나섰다. 손에 쥐이는 익숙한 질감과 무게에 안정감이 들었다.
아오미네가 사는 아파트 바로 앞 공터에는 농구 코트가 마련되어 있었다. 아오미네는 사용시간은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열 시 까지라는 경고문을 가볍게 무시하며 코트의 문을 열었다. 가볍게 튕긴 공이, 사뿐하게 제 손으로 돌아오는 양에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다. 적당히 손을 뻗어 공을 던졌다. 당연하다는 듯이 깔끔하게 림을 통과한 공이 툭, 코트 바닥으로 떨어진다. 사랑이라던 키세의 말을 떠올렸다. 어쩐지 마음이 저려오는 것 같았다. 남자의 방에 있던 카가미의 사진과 카가미를 보고 있던 남자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남자의 포기라는 말과 욕심이라는 말도 떠올랐다. 너는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말도.
카가미는 남자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번에는 온 몸을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프다. 너무 아파서 아오미네는 잠시 습관적으로 하고 있던 드라이브 인이나 드리블, 슛 따위를 멈추어야만 했다. 남자의 말은 옳다. 자신은 남자를 잘 모르고 남자가 무엇을 포기했는지, 남자가 무엇을 욕심냈는지 알지 못했다. 남자가 무얼 꿈꾸고 무얼 실망하고 무엇에 일상적으로 좌절해 왔는지도. 쯧, 하고 혀를 찬 아오미네가 다소 거칠게 드리블한 공을 잡아 그대로 점프해 내다 꽂는다. 최근 연습하기 시작한 덩크였다. 시원하게 내리꽂은 농구공이 탕, 탕 하고 코트를 울린다. 아오미네는 공이 들어가고 나자 털썩 주저앉는 것처럼 벌렁 드러누웠다. 남자를 이해하고 싶었다. 남자를 더 알고 싶었다. 사랑하고 있었다.
아오미네는 그 농구 코트에서 밤을 샜다. 딱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가장 자신에게 안정감을 주는 곳에 있었을 뿐이다. 차분하게 생각을 해 보려고 노력했다. 남자가 자신을 밀어내는 건 너무 당연하다는 사실, 남자에게 더 다가가는 것이 남자에게 불쾌한 일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 이해했고 인정했다. 그러나 더 하고 싶었다. 남자를 알고 싶었고 남자에게 상관하고 싶었다. 막을 수 있는 감정도 아니었고, 막을 생각도 없었다. 이른 아침에 남자가 아파트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아오미네는 자연스럽게 일어섰다. 농구공을 든 채 남자에게 다가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가볍게 말을 걸었다. 언제나 까칠한 남자에게 제가 먼저 말을 걸었었던 것처럼.
“생각보다 부지런하네?”
“너….”
남자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아오미네는 모른 척 남자에게 농구공을 던졌다. 엉겁결에 받는 폼이 매우 자연스럽고 익숙했다. 예상했던 바다. 아오미네는 산뜻하게 웃으며 아무것도 모른 척 말을 걸었다.
“농구 해 본 적 정도는 있지?”
일단은. 남자가 조금 인상을 썼다. 아오미네는 그것도 적당히 무시하면서, 남자의 앞을 막아서며 팔을 벌렸다. 한 손은 허리를 짚고 한 손으로 농구공을 든 채의 남자가 슬쩍 고개를 기울인다. 탕, 탕 가볍게 코트를 울리는 소리.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아주 정석적인 자세로 튀어 오르는 공을 잡아채는 남자의 손. 아오미네가 남자에게 달라붙어 남자의 공격을 막아서며 말했다.
“나 그쪽한테 관심 있는 것 같아.”
“어제도 말했지만 어중간한 말로 사람-”
“나는,”
아오미네는 히무로의 말을 끊으며 힘주어 말했다. 얼핏 짜증스럽다는 표정의 남자가 제 마크에서 조금 물러나나 싶더니 그대로 점프해 오르며 공을 들고 팔꿈치를 조인다. 남자의 손에서 떠나간 공이 힘껏 점프한 아오미네의 손끝을 스치며 날아가고, 요란하게 림을 구르다 밖으로 툭 떨어진다. 골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고 안전하게 지면에 착지한 아오미네가 말을 잇는다.
“나는 당신을 알고 싶어. 당신 인생에 상관하고 싶어.”
아오미네는 두어 걸음 다가갔다.
“날 당신 인생에 넣어줘.”
히무로는 그대로 멈춘 듯이 서 있었다. 아오미네는 매우 곧은 시선으로 남자의 눈을 보고 있었다. 시선이 오래도록 맞부딪혔다. 남자는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오미네는 나직하게 덧붙였다.
“있다 밤에 갈게.”
-
초인종을 누르는 손끝이 조금 따끔거린다고 느꼈다. 아오미네는 단조로운 차임벨 소리를 들으며 조심스럽게 현관에 몸을 기대었다. 묵묵부답. 굳게 닫힌 문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벌써 백 번은 더 누른 것 같았다. 아마도 제가 못 읽은 그 감정이 진절머리 난다던가 귀찮아 죽겠다, 하는 종류였나 보다. 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랜 시간 공을 만져오던 손이었으니 제법 단단한 편이었다. 고작 벨 조금 누른 것 가지고 피부가 벗겨지거나 다칠 리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아오미네는 손가락이 아프다고 생각했다. 자꾸만 따끔따끔한 느낌이 손가락을 타고 마음언저리로 향했다. 다시 한 번 그는 초인종을 꾹 눌렀다. 새삼 홀로 서있어야 하는 복도가 추웠다. 손목시계를 보니 바늘은 벌써 약속시간을 세 시간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열한시 십칠 분. 초침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답답함이 스며들었다. 주머니에 손을 꼽아 넣고서 아오미네는 목을 조금 움츠렸다.
남자가 하던 것처럼 담배라도 입에 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실상 피워본 적도 없었지만 적어도 그런 것들이 자기주장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내가 당신의 거절에 상처받고 있다고. 포기할 생각이 없어서 이곳에 여전히 서있는 거지만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라고.
아오미네는 한숨을 내쉬었다.
주머니 속에서 지갑이 꿈지럭거렸다. 조심스럽게 꺼내 지갑을 열자 멋대로 가져온 그의 사진이 보였다. 지금의 자신보다도 어린 남자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당신이 십년만 더 늦게 태어났어도.”
아마 자신도 이 남자 옆에 설 수 있지 않았을까. 헛된 생각을 하며 그는 카가미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해보았다. 같이 학교를 다니고, 함께 농구를 하고, 고민을 털어놓고, 서로의 인생에 깊숙하게 관여된 그런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 부질없는 상상에 아오미네는 피식 쓴 웃음을 지었다.
저기 말이야, 나는 이제 안타깝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아.
후드를 뒤집어쓴 채 벽을 타고 주르륵 주저앉은 아오미네는 소매에 고개를 파묻었다.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문을 흔들며 난동이라도 부려볼까. 그럼 경찰이 또 오게 되려나. 생각하며 그는 킥킥 웃었다.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그건 역시 안 되겠다고 결론내리는 스스로가 웃겼다. 아줌마들 또 신나게 떠들면서 이 사람 씹어댈 텐데. 견디다 못해서 이사라도 가버리겠다고 하면 누구 좋으라고. 다신 우연히 마주치지도 못할 텐데.
아오미네는 자신의 뒷머리를 푹 눌렀다. 어쩌면 이렇게 약해빠진 관계가 다 있을까. 새삼 자신과 그의 거리감에 슬펐다. 당장 그들을 이어주고 있는 건 아파트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만날 수 있다는 물리적 위치뿐이었다. 남자의 결정 하나로 끊어질 수 있는 가볍디가벼운 관계.
고요한 하늘에 낮게 나는 잠자리의 날개 짓 소리가 났다. 초인종 누르는 짓을 멈추었더니 남는 건 주변의 사소한 소음들뿐이었다. 주차장에서 나는 자동차의 경적소리와 고장 난 가로등이 1초에 한 번 씩 깜빡이는 소리. 꼭대기 층에서 멈춰서는 엘리베이터 소리. 공원을 향해 달려가는 길고양이들의 발소리.
그 모든 것들에 섞여서 아주 작게 계단을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간에 한 번 멈췄던 걸음은 이윽고 점점 속도를 늦추며 가까워왔다. 소리가 커지면서 느려졌다. 그렇게 굉장히 느린 속도로 되감기던 계단 밟는 소리는 어느새 멎어있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힘겨운 숨소리.
아오미네는 고개를 돌렸다. 소매로 입가를 가리고 가쁜 숨을 색색 몰아쉬는 남자가 마지막 층계 위에 서있었다.
눈이 마주쳤지만 두 사람 모두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오미네는 욱신거리며 조이는 심장이 제 속도로 뛰게 되기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간 이 지저분한 감정을 다 토해내게 될까봐 그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서운함과 안타까움과 기쁨이 엉망으로 뒤엉켜 자신도 모르는 모양으로 정체를 달리했다.
“오는 길에… 지하철이… 사고가….”
남자는 여전히 숨이 가쁜지 몇 번이나 말이 끊겼다.
“운행을 안 해서…”
남자는 헉헉대며 제 무릎을 짚고 웅크린다. 혼란 속에서, 아오미네는 남자가 손을 뻗어 제 팔을 잡아 오는 양에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큼,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는 소리. 늘 다른 사람들보다 3도는 낮을 것 같던 서늘한 남자에게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숨을 고르는 남자에게서 열기가 옮겨 붙는 것 같았다. 남자는 변명을 계속했다.
“버스… 계속 안 오고….”
“응.”
“택시를 탔더니… 주말이라… 막혀서….”
“응.”
“중간쯤… 내려서 뛰었는데….”
“응.”
남자는 할 필요도 없을 말들을 다급하게 쏟아냈고 아오미네는 이상하게 눈가가 뜨끈해지는 기분을 맛봤다. 이전에는 분명 몰랐던 감정이다. 자신이 남자를 기다리며 떠올렸던 못난 구상들이 너무 못생겨서 변명하는 남자에게 아오미네는 한 마디도 꺼내놓을 수가 없었다. 아오미네는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숨을 고르고 난 남자가 멈칫, 두서없이 늘어놓던 변명을 멈춘다. 천천히 아오미네의 팔을 잡은 채 허리를 펴고 몸을 일으킨 남자가 민망한지 아오미네를 잡았던 손을 툭 놓았다. 아오미네는 그 손목을 잡아채며 딴에는 아무렇지 않은 양 말했다.
“뭐해. 들어가자.”
남자는 당혹스러운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 표정이 조금 귀엽다는 생각에 머쓱해진다. 아오미네는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남자는 아오미네가 하는 양을 보고는 픽 웃으며 아주 나직하게, 그래 하고 대답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남자는 샤워를 한다며 화장실로 들어가 버린다. 아오미네는 다시 남자의 거실에 홀로 남겨졌다. 그동안 제 집처럼 드나든 곳이다. 처음 왔던 때와는 달리 도리어 안정감까지 느껴졌다. 아까 문 밖에서 했던 오만가지의 바보 같은 생각들이 다 날아가고 있었다. 시끄럽게 살지 않을 것만 같은 남자의 깔끔한 방.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 샤워하는 남자의 물소리. 평온해 진다. 제 방에 혼자 있을 때의 심심함과는 전혀 다른.
히무로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아오미네는 거실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녀석이다. 목적의식을 상실한 건지 아니면 생각이 없는 건지. 다른 걸 재지 않을 만큼 용감하다고 해야 하나 무식하다고 해야 하나. 히무로는 힐끗 시계를 본다. 벌써 두 시가 다 되었다. 대충 다섯 시간을 좀 넘게 기다린 모양이다. 집에 갔다가 다시 나온다 할 깜냥은 안 되는 줄 익히 알고 있다. 계속 거기 바보같이 서서 기다렸을 것이다. 자신이 집에 있는지 없는지, 문을 열어줄지 열어주지 않을 지와는 상관이 없이. 마치 볼 수 없을 줄 알면서도 카가미의 집 앞에 서 있던 자신처럼.
“이렇게 계속 받아주면 안 되는데….”
적당히 받아주는 것, 결국 아무것도 주지 못할 거면서 여지를 주는 것이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지금 이대로 끊어내는 게 녀석에게 가장 좋은 일이라는 것도. 무엇보다 자신은 스스로 관심두지 않는 사람에게 그다지 다정한 사람도 못 된다. 녀석에게 아무 감정 없으니 녀석을 떨쳐 내는 일은 어렵지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지금껏 누구에게도 상냥했던 역사가 없다. 그런데도 자꾸 이 녀석을 보고 있으면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났다. 때로는 카가미가. 때로는 카가미를 사랑했던 자신이. 도무지 마지막 한 걸음까지 매몰차 질 수가 없었다. 받아주지는 않겠지만 상처주고 싶지는 않다. 이 무슨 비현실적인 발상인지.
“…나왔어?”
“…어.”
“잠깐만.”
“어?”
제 인기척에 깼는지 부스스 일어난 녀석이 제 호주머니를 뒤진다. 제 복잡한 심정 따위는 눈곱만치도 생각 못할 천하 태평한 모습이다. 녀석이 주머니를 뒤져 꺼내 놓은 것은, 이전에도 본 일이 있던 발목 보호대였다.
“아침에도 조금 뛰었고… 집 오면서도 많이 뛰었잖아.”
“보호대를 몇 개씩 사재기라도 하는 거야? 저번에 쓴 것도 아직 안 돌려줬는데….”
“항상 들고 다녀. 당신 쫓아다니려면 한 궤짝은 있어야겠다 싶어서.”
“…….”
“오래 사용하면 근육 약해지니까 오늘처럼 많이 걸을 때, 아니면 빨리 걸어야 하는 때만 하고 다녀.”
“…그래.”
“달리기는 하지 말고.”
히무로는 그렇게 말하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아오미네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아예 편한 자세로 엎드려 누운 녀석은 피로한지 팔에 머리를 기대었다. 나른한 눈이 느리게 끔벅끔벅 움직였다.
플랫폼에서 열차 운행중단 방송을 듣고 있던 순간만 해도 히무로는 딱히 아오미네를 떠올리지 않았었다. 역사에 가득 들어찬 사람들이 썰물처럼 우수수 계단을 통해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지금은 많이 붐비니까 기다려야겠다며 의자에 앉아 대충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더랬다. 역무원들만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한산한 그곳에서 히무로는 조금 오래 시간을 때웠다. 지하철 계단을 오르는 걸음도 바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사람처럼 여유로웠고, 기껏 지상으로 나와서도 사람들에게 치이고 싶지 않아 버스정류장 근처 벤치에서 앉아 포켓북이나 넘겨보고 있었다. 무료하다면 했지 결코 초조하진 않았었다.
그만큼 히무로는 예정 없는 일상에 익숙해져 있었다. 시간을 버리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에 서둘러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틈에서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불운에 대해서 딱히 불평할만한 의지도 없었다. 어차피 집에서도 딱히 해야 할 일 같은 건 없었으니까. 아마 그날 몸 상태가 여느 때와 같았다면 귀가는 보다 훨씬 늦어졌을 수도 있었다.
처음엔 습관적으로 자꾸만 다리를 주무르는 게 좀 의아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상하게 발목이 평소보다 많이 아파서 곤란하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기억나버렸던 것이다. 아침에 농구공을 던졌던 녀석과의 일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연쇄적으로 녀석이 했던 이야기들이 줄줄이 꿰어져서 그의 앞으로 던져졌다. 저녁에 보자며. 마치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려 드는 녀석의 말투와, 밤새 잠 한숨 안 잤는지 빨갛게 충혈 된 흰자위와, 왠지 조금 더 깊어진 표정 같은… 그런 것들. 멀어지는 저의 등 뒤로 농구공을 또 다시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깨달은 순간부터 참을 수 없이 초조해졌다.
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말했으니까.
말 뿐일 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마음이 술렁거렸다.
초인종 몇 번에 대답이 없다며 포기해버리는 이미지가 잘 그려지지가 않았다. 스스로도 모르게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는 녀석에게 변명처럼 주워 삼긴 그대로였다. 너무나 거짓말처럼 자신을 집으로 보내주지 않는 택시 안에서는 거의 패닉에 가까웠다. 다리가 아프다고 생각했던 것도 잊고 그냥 달렸다.
계단을 오르면서 수 십 번도 넘게 없을 거야, 없겠지, 없을 텐데, 하고 중얼거렸지만 복도에 주저앉아 있던 녀석을 발견하는 순간에는 결국 놀라지 않았다.
예정이 없는 게 당연했던 저녁을 어느새 꿰차고 앉은 녀석은 스스로조차 방치해둔 아픈 구석을 자꾸만 신경 썼다. 학대당하는 망가진 곳을 서툴고 투박하게나마 보듬었다.
히무로는 역시 이 녀석에게 상처주고 싶지 않았다.
“휴대폰 있지? 내놔 봐.”
“…응?”
“얼른.”
겨울 곰처럼 늘어진 녀석은 뒷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손을 대충 뻗어 휴대폰을 내밀었다. 히무로는 녀석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번호를 대강 찍어 통화버튼을 누르자, 식탁 위에서 전화벨소리가 들려왔다.
아오미네는 제가 무얼 하는지 고개를 내밀고 보고 있다가도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없으면, 문 앞에서 기다리지 말고 집에 가.”
“……뭐야 그거?”
“다음에는… 연락 할 테니까.”
히무로는 꾹꾹 자판을 누르고 저장되었다는 메시지까지 확인한 후에 녀석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주소록 창에는 숫자 열 한자리가 적혀 있었다.
“히무로 타츠야…씨?”
“건방져. 내가 너보다 열 살은 더 많아.”
스르륵 녀석의 얼굴위로 미소가 환하게 번졌다. 보던 중 밝게 웃는 얼굴이라 새삼 녀석이 순진해보였다. 다른 것 없이 온전하게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열다섯, 굳이 셈해볼 것도 없이 까마득히 어린 그 나이에 히무로는 풋 웃고 만다. 녀석을 두고 생각했던 온갖 머쓱한 기억과 고민들을 떨치듯, 히무로는 녀석의 머리에 손을 얹고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조금 놀려주려는 생각으로.
“자고 갈 거야?”
-
이후로도 녀석은 자신을 ‘당신’이라고 불렀다. 그야 아무리 그래도 ‘히무로 씨’ 같은 말은 중학생에게는 지나치게 낯간지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자신 또한 녀석을 ‘아오미네군’ 따위로는 부르질 않으니 어떻게 보면 쌤쌤이다. 전화번호를 알려 주기는 했어도, 녀석이 그 번호로 전화나 문자 따위의 살뜰한 짓을 하는 일은 없었다. 일단 그렇게 섬세한 위인이 아니었던 데다 딱히 연락할 상황 같은 것도 벌어진 일이 없었으니까.
어찌되었든 녀석과의 여덟 시 약속은 줄곧 이어지고 있었고, 주말이나 휴일이 있는 경우에는 왕왕 자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한 번 집에서 재워 주니 그 이후로는 아주 자기 집처럼 자려고 해서 어떻게든 주중은 막았다. 그리고 녀석이 자신의 집에서 자는 날이면 자신의 편안한 잠자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 솔직히 녀석에게 지는 일은 없겠지만 그 키와 그 덩치는 역시 버겁다 - 녀석을 거실에서 재우고 자신은 방문을 걸어 잠근 후에 잠들었다. 설마 싶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춘기 남자아이의 관심과 사랑은 무겁다.
오랜만에 카가미에게서 연락이 왔다.
“시합?”
팀 이적 다 되었지만 어쨌든 계약만료는 이번 달까지니까. 일본에서의 마지막 시합일 것 같아. 남자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답지 않게 말투가 정리되어 있었다. 무슨 말을 할지 오랫동안 고민했던 모양이다. 히무로는 잠깐 침묵했다. 그 침묵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가, 결심이라도 한 양 묻는다. 타츠야.
- …혹시 시합에 와 줄 수 있어?
혹시, 아주 혹시, 시간이 되고 괜찮으면 하는 말…이야. 남자가 히무로가 대답하기도 전에 다급하게 덧붙인다. 잔뜩 긴장한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직도 사과하고 싶은 건가 싶어서 입이 썼다. 대체 뭐가 넌 그렇게 미안한데. 내가 너의 무엇에 그토록 절망했는지 너는 전혀 모르잖아. 히무로는 통화라 이쪽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당연히 가야지. 언제랬지?”
- 19일.
“응. 괜찮아 비었어.”
탁상달력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히무로는 한 쪽 눈을 반사적으로 찡그렸다. 위장이 무자비한 손길에 쥐어 짜이는 기분이었다. 한껏 평소대로의 목소리를 만들기 위해 진을 빼야했다. 위 부근을 손으로 꾹 누르며 간신히 통화를 마쳤을 때는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한 방울 흘렀다.
전화를 책상위로 내려두고 그는 달력을 노려봤다. 펜을 들어 표시하거나 하진 않았다. 어차피 일주일 남짓한 남은 시간 내내 그 날짜를 잠시도 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카가미를, 다시 볼 용기가 저에게 과연 남아있을까….
당연하게 널 보러가겠노라며 말했던 입과는 반대로 뇌는 아직도 마지막 한 걸음을 떼지 못하였다. 이해받지 못하는 절망과, 그럼에도 이해받고 싶지 않은 자존심이 꼬르륵 소릴 내며 마음 저 한구석에 가라앉아있었다. 줄곧 카가미에 대한 저의 마음은 그렇게 이율배반적이었다. 모든 감정들이 하나같이 양극단으로 치달아 있었다. 그 부조리함에 깨지고 부딪히던 마음들은 시간과 함께 시들어갔다. 멀쩡하게 살아서 작동하는 것들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은 그렇게 스스로를 녹슬게 했다.
히무로는 눈을 감았다. 어떻게 보면 자학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집착 같기도 했다.
차에서 내려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카가미의 얼굴이 아직까지도 선명했다. 평생해도 모자랄 후회를 담고 있는 새벽이었다. 그의 표정 하나, 몸짓 하나, 아무것도 빼먹지 않고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운이 나빴다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저는 술인지 불행인지 정체모를 것에 취해있었고. 그는 안쓰러움에 취해있었다.
연민과 동정. 뭐 그런 것들을 잔뜩 마신 남자는 집까지 잠자코 자신을 부축해서 올라왔더랬다. 침대에 저를 앉혀놓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궁금한 게 많을 텐데 아무것도 묻지 않고 미지근한 물을 떠다주는 남자는 상냥했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호의는 저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타이가.’
‘응.’
‘나를…. 내가 이상해?’
경멸하느냐 라고는 차마 묻지 못했다. 언제 그의 호의가 거두어져버릴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아마도,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그냥 말끄러미 그의 발끝만을 내려다보던 그 순간의 떨림과 호흡. 그리고 공기의 흐름까지 모든 게 술기운과 섞여서 빙글빙글 머리 위를 맴돌았다.
‘엄청 이상해.’
‘…….’
‘그렇지만 아마 타츠야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다른 사람의 그 정도까지 되는 사생활을 보통 상상하진 않잖아. 실례기도 하고.’
뺨을 긁적이며 남자는 자신의 발치에 앉아서 시선을 맞춰왔다. 그 무던한 시선이 조금은 어색해 하는 걸 알고 있었다. 뺨을 발등에 부비는 어린 강아지처럼 마치 자신을 위로하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저를 보던 남자에게 느낀 건 여태까지 모른 채 살아오던 정염이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때가 가장 후회스러웠다. 순도 백 프로의 친애의 감정을 그렇게 망가뜨려버린 건 어쩌면 술기운이었으며 혹은 갑작스럽게 내몰린 벼랑 끝에서 지푸라기를 잡는 절박함이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견디다 못해 버리고 싶었던 발악이었다. 혹은 그 모든 것이 섞여버린 끔찍한 괴물이거나.
히무로는 남자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굳게 닫힌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히무로는 남자의 입술을 오래 핥았다. 관리하지 않아 조금 거친 그 느낌이 도리어 그를 열중하게 했다. 무작정 입술을 빨고 비벼 댔다. 조금도 섹시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입술을 뗐다. 남자는 조금,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히무로는 말했었다.
‘알고 있잖아.’
남자는 아무 대답도 없다. 오기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이 이상 저지르지는 말자고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오래된 감정의 둑이 터지듯 한 번 시작한 정염은 갈 곳이 없었다. 지금 남자가 자신을 내치지 않는 것이 단순한 우정이고 연민이고, 어쩌면 동정임을 안다. 하지만 그것에라도 매달려야 할 만큼 히무로는 벼랑 끝에 내몰려 있었다. 누구든 붙잡고 싶었고 외로워 죽을 것 같았다. 눈앞에 있던 첫사랑의 상대에게 그 마음이 옮는 것은, 후회보다도 쉬웠다. 히무로는 남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천천히 남자의 바지 지퍼를 입으로 물어내리며 말했었다. ‘타이가, 별거 아냐. 그냥 즐기자는 거야. 기분 좋은 거.’ 남자가 행여나 거부할까 두렵다는 듯이, 다급하게 완전히 죽어 있던 남자의 것을 물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까.’
정성스럽게 남자의 성기 가장 아래부터 뿌리까지 애무했다. 그만 하라는 남자의 만류는 그대로 무시했다. 자신을 밀어내는 남자의 힘 같은 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다른 건 모르는 천치처럼 남자의 것을 물고 빨았다. 남자가 밀어내면 애원했다. 타이가, 그냥 하게 해 줘. 아무것도 아니잖아. 별 거 아닌 일이잖아. 어쩌면 나락에 떨어진 가운데 내밀어진 동아줄을 잡는 기분과도 비슷했다. 마음이 절박한 만큼 남자의 것이 마치 달콤한 무엇이라도 되는 양 빨아 넘겼다. 문득 오래 전에 스치듯 들었던 수업이 생각이 났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직접 구조하는 게 아니라 다른 잡을 걸 찾아 주어야 한다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다 붙잡히면 그 살아남으려는 지악한 손길에 자신 또한 죽게 되니까. 그래서 나는 지금, 내 엉망진창이 된 인생에 남자를 끌어들이고 싶은 건가? 이 모두가 너의 탓이라고, 왜 나로 하여금 너를 사랑하게 했느냐고 원망하고 싶은 건가?
남자가 히무로의 어깨를 거의 밀다시피 내쳤고 히무로는 이번에는 버티지 않고 물러났다. 전혀 살아나지 않은,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은 남자의 것을 히무로는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타츠야.’ 남자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잘 들리지 않았다. 히무로는 침묵했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울지 마.’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목소리였다. 히무로는 그제야 제 볼을 더듬더듬 만져 보았다. 얼굴이 잔뜩, 젖어 있었다. 눈앞이 흐릿했다. 남자가 손을 뻗어 제 볼의 눈물을 닦아 내렸다. 남자가 다시 말했다.
‘…울지 마, 응?’
제발… 남자는 희미하게 덧붙였고 마지막 말은 거의 울음에 가까워 잘 들리지 않았다. 양 눈두덩이 익을 듯이 뜨거워 히무로는 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숙였다. 뚝뚝 예상치도 못한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타이가. 히무로는 겨우 뱉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 자신이 한 짓에 대한 뒤늦은 죄악감만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나는 있잖아 타이가… 말하는 갈래 갈래가 끊어졌다. 너는 이제 완전히 나를 경멸할까? 히무로는 차마 카가미를 보지도 못했다. 수그린 고개와 떨어진 시선이 갈 곳을 몰라 헤매며 떨었다. 무참히도 눈물이 떨어졌다. 남자의 앞에서는 처음 보인 눈물이었다. 한 번 시작한 울음이 부끄럼도 모르고 멈추질 않았다. 타이가. 히무로는 말을 잇지 못하고 남자의 이름만 되뇌었다. 타이가. 목이 쉬고 입술이 바짝 말라 말이 나오질 않았다. 히무로는 남자에게 밀쳐내어진 모습 그대로,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남자가 들었을지도 확신할 수 없는 작은 목소리였다.
‘…좋아해….’
남자는 마지막까지 그 얘기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얘기해주지 않았으며, 초라하고 볼품없던 고백에 대한 대답 역시 해주지 않았다. 해묵은 저의 마음은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잿더미 위를 굴렀고, 잘근잘근 질투심에 밟히기만 하다 끝끝내 완벽하게 시들지도 못해 앉은자리에서 잠이든 것처럼 사그라졌다. 웃어넘기기도 마땅치 않은 시시한 이야기였다. 제대로 죽지 못한 마음이 잠든 대지 위에서는, 이듬해에도 꽃이 필 수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썩지 없어지지 못한. 악취가 흐르는 마음을 밟고서 그가 할 일이라고는 체념뿐이었다.
히무로는 달력을 뒤집어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부엌으로 향해 서랍장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먹지 않았다고 어떻게 금세 위치를 잊어버렸는지 온갖 서랍들을 다 열어 본 뒤에야 손바닥만 한 약병을 찾을 수 있었다. 한손으로 뚜껑을 열었을 때 무의식중에 남아있는 약 개수를 세었다. 자주 받으러 가면 담당 의사가 굉장히 난처한 얼굴로 다시 한 번 상담을 권할 테니까 요령껏 타내던 수면제였다. 처방전 없이 판매하는 유도제로는 해결할 수 없어진지 오래였다.
어지간하면 빈속에는 먹지 말라던 당부가 떠오른 건 이미 약을 입에 털어 넣은 뒤였다. 물을 꼴깍꼴깍 마시며 제가 오늘 뭘 먹었는지 생각해보았지만 달리 떠오르는 게 없었다.
커피는 아마도 마셨을 텐데 그거로는 어떻게 안 될까, 생각하며 히무로는 천천히 침대위로 기어들어갔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자 그제야 끊임없이 돌아가던 화면이 멈추었다. 남자의 생각을 오래 하고 있으면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넘을 수 없는 막막한 벽이 수십 수백리쯤 펼쳐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벽을 따라 걷기라도 했더라면 그 끝이 과연 있는지 라도 알 수 있을 텐데 히무로는 그조차 하지 못했다.
몸에 힘을 빼고 그는 침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상상을 했다. 흐물흐물 하얀 시트가 폭신하게 녹아서 자신을 깊게 감싸는 상상이었다. 누군가에게 안긴 것처럼 기분이 조금 따뜻해졌다. 꿈은 꾸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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