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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쿠로바스

[청빙(아오히무)] 청빙을 연애시키고 싶습니다 3

 

 

피곤해.”

낮잠을 네 시간이나 자놓고서? 아무리 주말이라지만 좀 심하잖아.”

히무로는 반쯤 감긴 눈을 억지로 뜨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식탁에 머리를 괴고서 아직 남은 약기운 속을 헤치며 아오미네에게 혼자 놀라며 저만치 손짓했다. 초인종소리에 잠에서 깨는 건 아마 약을 먹는 순간에도 예상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딱히 놀라진 않았더랬다. 맞은편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수면제 먹었어.”

무의식중에 얌전하게 대답하며 그는 기어코 눈을 완전히 감아버렸다.

그런 걸 왜 먹는데.”

시큰둥한 목소리는 그리 멀지 않은데서 들려왔다. 등 뒤로 녀석의 외투가 둘러졌다. 밖을 실컷 돌아다니다 왔는지 바짝 마른 햇볕의 냄새가 났다. 히무로는 소매를 가져다가 숨을 흠뻑 들이마셨다. 좋은 냄새. 다시 잠들까 생각을 하다 녀석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냥. 자고 싶어서.”

하여간에 문제 많은 짓은 혼자 다 해 드시네.”

퉁퉁거리는 녀석의 말투가 조금 못마땅한 것처럼 들렸다. 빈정거림 쯤은 가렵지도 않게 넘기며 맞은편에 앉은 녀석에게 커피메이커를 가리켰다.

커피 내릴 줄 알아?”

아니. 본적도 없어.”

옆에 설명서 붙어 있으니까 대충 해봐.”

고개조차 들지 않고 손끝으로 가리키는 걸 보더니 아오미네는 헛웃음을 지었다. 투덜거리며 손님을 부려먹는다느니, 하여튼 카페인 중독이라니 하면서도 녀석은 착실하게 설명서를 숙지했다.

원두 이거 맞아 두 스푼? 저기 물은 어떻게 넣는데? 여과지는 이렇게 접는 거 맞아? 뭐 그냥 넣으라고? 11비율이라고 써져있었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스푼도 이 크기 아닌 것 같아. 나 이거 처음 해보거든? 자세히 좀 말해 봐. 눈대중이나 감 이런 거 없다고.

종알종알 말이 많은 녀석에게 한두 마디씩 대구하다 마지막쯤엔 그냥 느리게 눈을 떠서 녀석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가만히 지켜본 녀석은 나름 신중하게 눈금자와 씨름 중이었다. 남의 말 절대 안들을 것처럼 생겨서는 의외로 고분고분했다. 연장자 대접이냐 하면 그건 아닌 것 같으니 그냥 선천적으로 시키는 건 하고보는 타입 아닐까 싶었다.

대충해. 내 커피도 맛없으니까.”

말하자 녀석은 한쪽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비웃었다.

매일 이거 달고 살더니 실은 맛없는 거였어? 내꺼 마시고 반할지도 모르겠네.”

커피 맛있다고 반하는 거면 난 저기 앞에 카페 사장님이랑 결혼 해야겠네. 항상 내 취향으로 뽑아주시는데.”

……됐어.”

아오미네는 뚜껑을 닫으며 시작버튼을 눌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주전자 안으로 커피가 고여 드는 걸 지켜보았다. 식탁 맞은편에 비슷한 자세로 턱을 괴고 앉은 아오미네와 시간을 죽이며 히무로는 스스로가 간사하다고 새삼 여겼다. 혼자 생각에 잠기고 싶지 않아서 수면제를 먹고, 녀석이 오니 그제야 눈을 비비는 것이 너무나 완벽하게 도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천천히 내려오는 커피의 향이 씁쓸하고 달콤했다.

마셔봐.”

아오미네가 아슬아슬할 정도로 가득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내민다. 컵받침도 없는 뜨거운 컵이 위험천만하게 손가락에 닿아 얼른 내려놓았다. 무식하게 뜨거운 걸 이렇게 가득 담아오나, 싶어 손잡이 끄트머리만 살짝 잡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녀석은 다른 컵에 커피를 따르다 앗 뜨거 혼잣말을 하며 컵에서 손을 뗀다. 아오미네가 데인 엄지손가락을 제 입으로 가져가며 조심조심 본인의 앞에도 내려놓았다.

마시게?”

, 마시면 안 돼?”

안마시게 생겨서.”

어이 그거 편견이야. 지금부터 마실 거거든? 녀석이 발끈하며 말했다. 히무로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한 손으로 녀석이 준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무슨 물 대접 떠오듯 컵에 가득인 커피였지만, 향 자체는 그럴듯했다.

많이 졸리면, 커피 마시지 말고 그냥 자지 그래.”

그러면 너는.”

나야 뭐.”

녀석은 무의식중에 제가 따른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으엑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찌푸리고 혓바닥을 내미는 폼이 우스웠다.

이걸 무슨 맛으로 먹어?”

쓴 맛.”

녀석은 절대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이런 거나 마시니까 자꾸 피곤한 거 아냐? 수명 깎아먹는 맛인데. 아오미네가 투덜댄다. 히무로는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엄청 최악일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그럴듯한 맛이다. 솔직히 자기가 내린 것보다 맛이 나았다.

“19일은 귀가가 늦어. 그 날은 오지 마라.”

어디 가?”

그냥, .”

되게 싫은 건가 봐. 표정이 죽을상이네.”

…….”

싫은 거면 안 가면 되는 거 아닌가?”

…….”

히무로는 말없이 커피만 홀짝였다. 홀로 말하게 둔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녀석은 인상을 쓰며 제가 내린 커피를 후루룩 마셨다. 무슨 저게 스포츠음료 같은 건 줄 아나, 쓰다고 투덜댄 주제에 단 번에 반 이상 잔을 비워버린다.

글쎄가기 싫은 건 아닌데.”

그럼 뭔데?”

그냥그냥 그런 거지.”

그게 뭔데, 물어오는 녀석에게 굳이 대답해주지 않았다. 내내 피해 왔던 것을 지금 와서 기꺼이 떠올릴 수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무료하고 나른하고, 무력했다. 고통스러워 피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멈추지 못하게 된 감정에 지쳐 있는 것이다. 한 발짝도 내밀지 못한 채 그대로 시든 마음을, 버리지 못해서 여태껏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다. 한때는 절박했고 한때는 절실했던 감정이 그 새벽 이후로는 계속 이런 상태였다. 아직까지도.

있잖아.”

멍한 머리로 어? 하고 대답했을 때에는 이미 아오미네의 손에 이끌려 일어섰을 때였다. 녀석은 쿵쾅거리는 발걸음으로 자신을 방의 침대 위로 이끌었다. 거의 밀치다시피 눕힌다. 아까부터 지워질 생각이 없는 것 같은 사나운 인상은 더 심각한 상태였다.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아오미네가 말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하고, 힘들면 좀 쉬어. 피곤하면 그냥 누워서 눈이라도 감고 있으라고. 바보야?”

어차피 누워 있어도 잠 안 와.”

상관없어, 그냥 누워 있어. 쓸데없이 기운 빼지 말고.”

내 커피 줘.”

싫어. 다음에 마셔.”

주라니까. 그것 때문에 잠 못 자는 거 아냐.”

, 진짜 좀!”

…….”

가만히 눈 좀 감고 있어, 정신 사나워! 그냥 눈 감고 누워 있으라고 좀! 나도 여기 앉아서 눈 좀 붙일 테니까, 그냥 제발 좀 자!”

아오미네는 거의 던지듯이 이불을 건네고는 제 침대 발치에 기대어 앉는다. 침대에 누운 채로 보이는 거라곤 녀석의 옆얼굴 정도다. 그러고는 정말 자신도 잔다는 듯 눈을 감아 버린다. 연기인가 했는데 채 오 분도 안 되어서 녀석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했다. 히무로는 어이가 없어 하 하고 헛웃음을 짓다가, 결국 녀석에게 밀쳐진 그대로 아무렇게나 누워 눈을 감는다. 잠이 올 리는 없겠지만 포근한 이불의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똑딱거리는 초침소리에 맞춰 의식이 이리저리 물결쳤다.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 멎어 있는지도 모를 만큼 고요한 흐름 속에서 녀석의 고른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섞여들었다. 생각이 없어지는 나른한 감각에 취해서 그렇게 한참을 눈을 감고 있던 히무로는 약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쥐어짜내는 것 같던 통증이 어느새 사라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몸이 편하다는 걸 자각하니 불필요하게 들어있던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수마에 젖어가던 몸은 이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어졌다. 의식은 깨어있는데 육체만 잠들었다고 느끼는 건 굉장히 생소한 기분이었다. 창문 밖의 빗소리가 들려왔다. 맑았던 하늘에 갑작스럽게 내리는 소나기인 모양이었다. 빗소리는 싫어하지 않았다. 듣고 있으면 마음을 차분하게 해줬다. 늘 소란스럽던 상념들이 빗줄기에 씻겨 내려가는 게 때론 고맙기도 했다.

언젠가 조금 더 생생하게 빗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에 집을 박차고 나갔던 적이 있었다. 우산을 쓰고 빗물이 세차게 떨어지는 아파트 입구에 멍하니 앉았더랬다. 아마도 담배를 막 배우던 때였다. 어깨에는 부자연스럽게 우산을 끼우고 담배를 꺼내 물던 차에 몹시 익숙한 느낌이 났다.

농구공이 바운드 되는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 날씨에 그럴 리가 없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조금 내밀자 거짓말처럼 누군가가 농구공을 던지고 있었다. 집 앞에 설치된 야외 코트에서 가림막하나 없이 온 몸으로 비를 맞고 있는 사람이었다. 빗줄기가 아프지도 않은지 후드를 뒤집어 쓴 사람은 신나게 공을 잡고 달리고 있었다.

비에 미끄러져 공이 잘 튀지도 않는데 그는 개의치 않고 크게 걸음을 떼 레이업을 올렸다. 타이밍이 조금 나빴지만 손목을 꺾으며 기어이 공을 밀어 넣은 남자는, 대신에 미끄러지며 바닥을 굴렀다. 아스팔트에 무릎이 시원하게 갈려나가는 게 먼발치에서도 보였더랬다. 그러고도 신명나게 웃는 웃음소리가 조금 미친 사람 같다고 아마 생각했었다.

저는 막 다리를 다친 직후였기 때문에 발목에는 석고붕대가 거추장스럽게 달려있었고 폐활량 때문에 절대 손대지 않던 담배까지 배운 참이었다. 어깨에 걸치고 있던 우산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빗속에서도 공을 움켜쥔 남자와 저의 간극이 뼈아팠다. 쓰디쓴 담배를 조금씩, 조금씩 태우며 누군지도 모를 남자를 굉장히 오래 지켜보던 날이었다.

 

.

눈을 뜨자 어느새 아오미네는 자신의 옆에 누워있었다. 잠결에 침대로 기어들어 왔는지 이불까지 덮어쓴 녀석은 목을 조금 움츠리고 있었다. 밀어내려 했는데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왜 여기 있는 거야.”

히무로는 간신히 입을 열어 잠겨있던 말을 내뱉었다. 들릴까 싶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녀석은 용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더니 두어 번 깜빡였다. 잠에 잔뜩 잠긴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얼굴 근육은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그 순간 녀석이 웃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더 자. 괜찮아.”

천천히 녀석의 손이 이불 속에서 쑥 뻗어와 등을 끌어안았다. 억센 악력이 몸을 가볍게 끌어와서 어깨에 뉘였다. 크게 자신을 끌어안으며 팔베개를 해준 아오미네의 손바닥이 등을 아주 약하게 도닥였다.

조금만 더.”

느리게 끌리는 목소리는 기어이 말끝을 맺지 못하고 끊어져버렸다. 히무로는 아오미네에게 반쯤 안긴 채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만 말을 걸었다. 그거 너였지.

비오던 날. 공터에서 농구하던 사람. 농구 너무 재밌어서 죽겠다는 표정으로 웃던 거. 너였던 거구나. 생각하며 히무로는 주문처럼 그의 말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마지막으로 사람의 체온을 느꼈던 것이 언제였더라. 히무로는 아침 해가 제 눈에 행사하는 폭력에 견디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 생각했다. 아오미네 녀석은 아침 해가 떴건 어쨌건 간에 본격 취침 중이신지 꿈쩍도 않는다. 반쯤 겹친 몸에서 전해지는 타인의 체온이 낯설고, 이상하고, 그리고 조금 따뜻하다는 생각.

날이 매우 맑았다. 한동안 푹푹 찌던 폭염도 꽤 잦아들었고 햇빛은 강렬했지만 따가울 만큼은 아니다. 농구하기 참 좋은 날이겠다 까지 생각하고 히무로는 별수 없구나 하고 제 팔로 제 눈을 가린다. 미련은 종종 예상치도 못한 곳까지 남아 있어서, 생각지 못한 곳에서 마주할 때마다 이렇게 또 우스워지고는 만다. 허탈하다는 듯이 웃어넘긴 히무로는 천천히 엉겨 붙은 녀석의 몸을 떼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묵직한 몸이 온화하지 못한 행동에 턱 소리를 내며 침대에 부딪혔지만, 녀석은 눈을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루가 또 와 버렸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간다는 게 끔찍했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 봐야 시간은 흐를 것이고, 남자를 봐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거였다. 이쯤 되니 그 때 당연히 가야지 대답했던 자신이 우습다. 무슨 자만이었을까 싶었다. 남자를 마주할 것이 두려워 약을 먹고 녀석과의 시간을 기다렸던 주제에 무슨 오만으로 남자에게 선뜻 가겠다고 말했던 것일까. 어쩌면 그것조차 미련의 편린이 아닐까 싶어 히무로는 솔직히 무섭기조차 했다. 강제로 도려내도 도저히 그 잔뿌리마저 오롯이 적출해버릴 수가 없는 상대와 감정을 히무로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른다. 십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남자를 버린 것은 제 쪽이다.

평생을 되씹어 후회할 그 새벽, 연민에 취해 있던 남자에게 제가 떠벌린 것은 독약 같은 이야기였다. 그 말을 꺼내놓는 자신도 그것을 말없이 들었던 남자도, 충분히 그것을 깨닫고 있었다. 남자는 그 말을 그냥 흘려들을 만큼 잔인하질 못했다. 그리고 그 말에 기꺼이 대답해줄 수 있을 만큼 쉽지도 못했다. 생각해보면 자신만큼이나 바보 같은 남자였다. 감당 못할 죄책감을 이유 없이 혼자 끌어안았다. 미련하게 떠맡은 책임감에 스스로가 바짝 말라가는 꼴을 알면서도 그만두질 못했다. 꼭 저만큼 멍청했다. 그 멍청함을 사랑했다.

남자가 어떤 의도로 제 집을 찾아왔는지, 어떤 생각으로 자신을 챙기는지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심중만 외면하고 보면 남자의 행동이란 퍽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히무로는 그래서 남자의 속마음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 매우 편했다. 그리고 행복했다. 남자는 꼭 자신이 오랫동안 사랑해 온 상냥하고 자상한 연인의 꼴을 하고 제 곁을 지켰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남자가 제게 주는 상냥함을 내 것이라 스스로를 속였다. 당연한 것처럼 제게 주어지는 남자의 배려가 너무 좋고 행복해서 놓치고 싶지 않았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남자를 향했던 부정할수록 배제되지 않았던 감정이, 남자의 속내에서 눈을 돌리는 것만으로 폭발하는 듯했다. 마음껏 사랑했고 마음껏 억지를 썼다. 마음껏 집착했다. 남자는 한없이 주었다.

그 새벽 이후로도 히무로는 남자와 자신이 어떻게든 세간의 연인관계라는 것에 가까워지기를 시도했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이에서 필수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제가 남자를 원하는 것만큼 남자도 자신을 원해준다는, 그저 그런 형식적인 확인 절차가 필요했을 따름이다. 그것만 있다면 자신이 지금껏 보고 싶지 않은 것에서 눈을 돌려왔을 뿐이 아니라 자신이 믿어왔던 그것이 완벽한 진실이라고 확인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들의 관계가 단순히 동정심의 발로이거나 책임감의 연장선이 아니라, 평범하게 사랑하는 연인들의 그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히무로는 때로 간청하고 애원하고, 또 그보다도 더 성을 내고 원망하였으나, 카가미는 그것만은 주지를 못했다. 카가미는 늘 말했다. 미안해. 히무로는 그 말이 그렇게 화가 났었다. 그래? 뭐가 그렇게 미안한데?

테이블에 멍하니 앉아 히무로는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와 마치 사랑을 했던 것 같이 보였던 시간이었지만 실체를 까보면 실은 아무것도 시작된 건 없었다. 관계는 기형적이었다. 결심이라는 걸 하기까지 아주, 굉장히 길고긴 시간이 필요했다. 손에 쥔 것을 놓기 힘들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던 빈손을 직시하기가 어려웠다는 게, 보다 정확한 이유였다.

울어?”

커다란 손바닥이 뺨을 감싸 들어올렸다. 언제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얼굴을 한 아오미네가 억지로 고개를 틀어 눈을 맞춰왔다. 안 울어. 건조해서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아오미네는 이번엔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원래 아침이면 목소리가 그래?”

염려스럽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던 녀석은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그대로 자신에게 건네주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자 못 연다고 생각을 했던 건지 친절하게 뚜껑까지 열어주며 눈짓을 해왔다. 따라 마실 컵 없이 달랑 페트병 째로 디밀어진 1리터 생수를 히무로는 가만히 쥐었다. 잠자코 맞은편 의자를 빼서 앉는 아오미네를 보며 그는 느리게 물병을 들어 마셨다.

다 마신 물통을 식탁위로 내려놓자 녀석은 이번엔 자신이 가져가 꿀꺽꿀꺽 받아마셨다. 천천히 울리는 목울대를 보며 히무로는 문득 말을 꺼냈다. 여전히 쇳조각을 긁는 것처럼 깊이 잠긴 목소리였다.

그때도 이렇게 마주보고 앉아서 얘기를 했었어. 이제 그만 하자고.”

맥락 없이 툭 튀어나온 이야기에 아오미네는 테이블에 기댄 채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줄곧 입단 테스트를 권유받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거든. 그게 아마 결정적 계기였던 것 같아.”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잘 이해가 가질 않는지 녀석은 소매로 입가를 문질렀다. 조심스럽게 의자를 자신 쪽으로 가까이 당기는 아오미네의 얼굴엔 이런저런 감정들이 섞여서 흔들리고 있었다. 히무로는 손가락을 무의식중에 만지작거리며 테이블 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제 그만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자고 말했어. 생각보다 너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가 나와서 내심 놀랐는데. 어쩌면 난 줄곧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라.”

……지금 그거 연애 얘기야? 그만두니 뭐니.”

그렇게 말하는 아오미네는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종류의 얼굴을 했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나 혼자 좋아했던 이야기.”

히무로는 담담하게 대답하였다. 스스로의 말에 어딘가를 다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

내 인생에 그렇게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 없었어. 내 안에 있는 모든 방에 전부 그 사람만 담았어. 온전히 사랑하기만 했냐하면, 그렇다곤 말 못하겠지만미워하면서도, 질투하면서도, 분명 사랑하기도 했었으니까. 그래 아마 사랑이겠지. 가진 건 뭐든지 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그런데 왜 그만 뒀어.”

…….”

차가운 표면과 만난 공기가 응집되어 방울방울 물병의 표면에 맺히고 있었다. 테이블위로 천천히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쳐다보고 있기는 했지만 사실은 그냥 시선을 아무 곳에나 두고 있는 것이었다. 입 밖으로 꺼내어진 지난 이야기는 생각만큼 복잡하지도 않았다.

그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날 성애의 대상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어서그래서 그만 뒀어.”

차라리 성별의 문제였다면 더 포기가 쉬웠을까. 애석하게도 그는 자신이 남자라서 안되는 게 아니었다. 그냥 내가 나이기 때문에. 이미 너무 오래 형제로써 사랑해왔기 때문에그 벽을 넘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그와 헤어졌다.

사실관계만 놓고 보면 이렇게 간단한 일이 왜 감정과 섞이면서부터는 그렇게까지 질척거리게 되는 걸까. 넝쿨처럼 옭아맨 자신의 추잡스러운 감정들이 부끄러워 히무로는 고개를 숙였다.

더는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모든 마음을 가져다 부었는데도결국은 실패했어. 시간 같은 거 흐르는지도 몰랐었는데 정신이 드니까 십년이 지났더라. 그렇게 오래도록 한 사람만을 지켜봤는데도 아닌 거라면, 정말로 안 되는 거겠지. 포기한 걸 후회하진 않아. 이제 더는 뭘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으니까.”

…….”

다만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란 게 정해져있다면, 이미 내 마음은 그때 바닥나서 끝이 난 거라고 생각해.”

아오미네는 말이 없었다. 히무로는 고개를 들어 녀석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역시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 말고는 명확하게 어떤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처음엔 표정이 고스란히 다 드러나는 어린애였는데 녀석도 그간 많이 자란 모양이었다. 너를 키운 건 무엇일까. 좋은 건 아무것도 주질 못했는데, 미운 모양으로 자라지 않았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얼굴로 녀석은 말했다.

어쩐 일로 자기 얘기를 다 꺼내나 했더니만, 역시나 결론은 나 저리 떨어지란 소리네. 하여간 지겹지도 않나.”

그냥. 갑자기 나한테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미안해져서. 적어도 이유는 알아야 네가 덜 억울할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

째깍째깍 초침소리만이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려진 것처럼 오랫동안 가만히 멈춰있던 와중에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나한테 미안할 일이 아니라 그쪽이 아쉬워할 일이지. 더는 누굴 좋아하지도 못 할 만큼 지쳤다는데.”

토해지는 변명을 그대로 감싸 안으며 아오미네는 무던하게 말했다.

그래. 고맙네.”

히무로는 짧게 말하며 웃어 보였다. 담담한 목소리가 흔들림도 없이 흘러 나왔다. 그토록 보길 원하던 그 웃는 얼굴이었는데도 아오미네는 입맛이 썼다. 제 아무리 눈치가 없다지만 이제 더는 오지 마라 하는 소리인 줄 모를 리가 없다.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도 막 배우기 시작한 아오미네에게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좋은 말 한 마디라도 해주고 싶어 고민하다가,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아 그만두었다.

아오미네는 제 물건만 대충 챙겨 히무로에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현관을 나서고, 히무로의 집을 나서는 것은 짧은 거리인데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 등 뒤로 남자네 집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이는 소리 정도의 아주 작은 소리였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덜컹였다. 대여섯 걸음 걸어가 제 집 문고리를 잡는데, 그제야 남자에게 완전히 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게, 잘라내어진 것이다. 남자가 선을 긋는 것 자체는 드문 일도 아니었지만 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처음이다. 늘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남자를 알고 싶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 소망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남자는, 오로지, 자신을 포기시키기 위해 제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다시는 자신을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그 말을 하기 위해 떠올리기도 싫어 엎어 놓던 제 과거를 털어 놓았다. 그 사실에 아오미네는 상처받아 슬프고,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다는 것에 괴롭고, 그리고 안쓰러워 아프다. 당장이라도 뒤집힐 것 같이 심장께가 뻐근했다.

사실 귀찮은 중학생 같은 거 떼어놓는 일 어려울 것도 없었다. 겨우 이웃사촌, 요즘 시대에는 얼굴도 보기 힘든 사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다. 처음부터 자신이 멋대로 잡은 약속이니 남자가 거기에 맞춰줘야 할 이유는 없는 거였다. 그런데도 늘 제가 오는 시간엔 집을 지켰고 제 약속에 늦었다는 이유로 뛰었다. 어떤 감정에서였건 자신이 제 영역을 침범하고 끼어들어 오는 것을 묵인해 주었다. 상냥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야쿠자니 범죄자니 하다못해 호스트라는 소문까지 돌만한 사람도 전혀 아니었다. 아오미네는, 남자가 세상과 이토록 단절되어 있다는 것이 안타까웠고 받은 상처를 치료받지도 못한 채 곪아가도록 버려져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쓸데없는 오지랖인줄 알면서도 그 손목을 잡아끌고, 말하고 싶을 만큼 말하고 화를 내고 싶으면 세상이라는 놈의 멱살이라도 잡아 흔들라고 성질이라도 내고 싶었었다.

잡았던 문고리를 놓고 돌아 섰다. 그대로 미끄러지듯이 주저앉았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저 집에 지금 혼자 남아 있을 남자가 너무 신경이 쓰여서 미칠 것 같았다. 자신에게 제 과거를 털어놓던 때의 발갛던 남자의 눈가가 떠올랐다. 혼자 울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곁에 있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 카가미여도 좋으니까 남자가 울고 싶을 만치 슬플 때 혼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히무로는 아오미네가 나간 부엌에 혼자 앉아 있었다. 끝이다. 눈을 감았다. 아오미네가 제 옷가지며 물건들을 챙기는 소리가 부스럭대며 들려오고 있었다. 녀석의 발소리가 가까워지나 싶더니 잘 있어, 하는 작별 인사와 함께 현관문이 끼익 하고 열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녀석의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이 찾아온다. 히무로는 그 모든 소리가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제 끝이다. 이게 옳은 거다, 잘 한 거다 자신을 다독이면서.

열어둔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문을 닫아야지 하고 일어섰다가 히무로는 우두커니 멈추어 선다. 잠시 멈추어 섰다가 녀석이 내려 준 커피에 눈길이 간다. 머그컵에 커피를 습관적으로 따랐다. 커피를 홀짝이다가, 아 나 뭐 하려고 일어섰지 생각할 즈음에는 다시 원래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두어 모금 커피를 더 마셨다. 문득 녀석이 마셨던 생수병에 시선이 닿는다. 별 생각 없이 물 식으니까 다시 냉장고에 넣어 둬야지 하고 생수병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냉장고를 열다가 또, 멈칫한다. 그리고는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와서 생수병을 식탁 위에 그대로 올려놓는다. 도저히 커피가 들이켜 지지가 않아서 싱크대에 남은 것을 버렸다. 설거지를 할 요량으로 물을 틀다가, 또 멈춰 선다. 수도꼭지를 돌려 잠근다. 그리고 조금 젖은 손을 탁탁 털고, 다시 그 의자에 턱을 괴고 앉았다. 잘 안 되네 하고 무엇을 향한 것인지 모를 혼잣말을 중얼댔다. 그제야 처음에 창문을 닫으려던 것을 떠올리고 일어선다. 그리고 겨우 부엌을 벗어난 자리에 망연히 멈추어 섰다. 당혹스러웠다. 왜 이렇게 집이 넓어 보이고 왜 이렇게 집이 조용한 것 같은지. 왜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지.

히무로는 무슨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거친 발걸음으로 TV가 놓인 나지막한 탁자를 향한다. 엎어져 있는 카가미의 사진들을 하나하나 다시 바로 세웠다. 어린 시절의 카가미의 모습, 고등학교 시절의 카가미의 모습, 농구 코트에서 활약하고 있는 모습. 농구코트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뛰고 있는 남자의 사진에 손을 뻗었다. 사진을 품에 안아 웅크렸다가, 그 액자에 이마를 댄다. 이유 없이 손이 조금 떨었다. 히무로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올라 울고 싶은 기분이 된다. 히무로는 애써 이유를 찾듯이, 아 이건 비가 오기 때문이야 하고 되뇐다. 그래 이건 다 빌어먹을 비 때문이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도, 기분이 안 좋은 것도, 울고 싶은 것도, 다 비 때문이다.

카가미를 보낼 때도 비가 왔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다친 지 지금보다도 오래지 않았을 적이라 비가 오는 날이면 상태가 극히 나빴다. 아침부터 줄곧 제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카가미는 당연하다는 듯이 제 침대 옆에 주저앉아 요리책 따위를 읽고 있었고. 오랫동안 빗소리와 남자가 책장 넘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남자의 숨소리에 녹아들고 싶은, 그런 맥없는 기분.

그만할까, 우리.’

……그런 소리 함부로 하는 거 아냐.’

…….’

…….’

'있잖아.'

'.'

지친다는 생각 들지 않아?’

, 하고 남자가 책을 덮는 소리가 들렸다. 히무로는 부러 그쪽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않았었다. 침대가 조금 눌리는가 싶더니 카가미가 제 침대 위로 올라와 앉았다. 남자가 말했다.

앉아, 앉아서 제대로 이야기 하자.’

카가미가 내려준 커피를 나란히 마시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정적이 흘렀다. 그의 커피를 마시는 건 이게 마지막 이겠구나 생각하며 끝을 준비했다. 생각보다 떨리지는 않았다. 오래 묵은 방을 정리하듯이 마음 한구석을 비우는 것이었다. 아무리 정이 들었어도 그곳은 제 집이 아니었다.

탓하려는 게 아냐. 다만잘 안됐을 뿐이지. 더 늦어버리기 전에 어렵더라도 인정하자.’

…….’

노력해봤지만, 잘 안됐어 우린.’

카가미는 대답이 없었다. 창밖으로는 세찬 빗소리가 계속해서 들리고 있었다. 우리라고는 말하고 있지만 히무로는 어디까지나 스스로가 인정해야 하는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헤어짐을 이야기하는 건 기실 자신을 타이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처음부터 서로에게 주어진 자리가 아니었던 거야. 네 잘못이 아닌 만큼 나도 스스로를 탓하고 싶진 않으니까, 사과하지 말아줘.’

타츠야 왜.’

카가미는 여러 번 무언가 말하려 노력했지만 역시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겠는지 아무런 얘기도 잇지 못했다. 상상했던 그대로 그는 저에게 미안하고, 자신은 그가 눈물 나게 아쉬웠다. 그래서 우리가 안 되는 거겠지.

히무로는 씁쓸하게 웃으며 양손으로 머그컵을 꽉 쥐었다. 하얗게 질린 손마디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게끔 안쪽으로 감추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들어질 뿐이야.’

지쳤어?’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렇게 묻는 카가미의 눈빛만큼은 야단맞은 아이처럼 애처로웠다. 사람을 절망하게 만드는 건 너무 멀어 끄트머리조차 보여주지 않는 행복이 아니었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가질 수 있을 듯 손에 들어오지 않는, 손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빠져나가는 소망이 몇 배나 더 저를 괴롭혔다.

놓쳐버린 자신의 바람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본다는 건, 알지 못하는 새에 스스로를 좀먹어갔다. 발밑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밑동을 전부 갉아먹은 고목처럼. 넘어지기 직전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그만 너도, 그리고 나도 행복해져야지.’

그럴 수 있는 마음 같은 건 이미 바닥난 지 오래라고 생각하면서도 히무로는 뻔뻔하게 말했다. 수도 없이 그와 헤어지는 상상을 했기 때문에 현실감이 없었다. 어쩌면 꿈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마지막으로 마음으로만 속삭였다.

나를 사랑할 수 없는 너를 아주 오래도록 사랑해왔노라고.

무슨 말 해야 할지 모르겠어.’

잘 살라고 해줘.’

타츠야는 아닌 척 하면서 아픈 걸 혼자만 품고 있어서, 늘 걱정이야.’

그냥잘 살라고 말하라니까.’

얼핏 웃는 척하며 히무로는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추었다.

잘 살 거야?’

.’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기록적인 폭우였다고 늦은 저녁 뉴스에서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날 밤은 TV 볼륨을 가장 크게 틀어놓고 집의 모든 불을 꺼놓은 채 거실에서 잠을 청했다. 두 사람 모두 영상매체에 취미가 없어서 함께 사는 동안 가장 시간을 덜 할애한 곳이었다. 지독하던 짝사랑이 끝나자 이제 정말로 텅 비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

 

히무로는 거울 앞에 서서 챙이 넓은 야구 모자를 푹 눌러 썼다. 카가미의 경기를 보러 가는 날이다. 설마 아직까지도 그럴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찌되었건 귀찮은 일은 질색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얼굴을 가리도록 신경은 썼다. 절 기억할 사람은 극히 드물었지만 자신을 알아 본 기자든 뭐든 간에 붙잡혀서 맘에도 없는 인터뷰 따위를 하는 것은 질색이다. 히무로는 준비해 두었던 가짜 안경을 썼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픽 웃어 버렸다. ‘그렇게까지 하고서도 가야 하는 거야?’ 문득 녀석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 뒤를 돌았다가 열없이 다시 거울을 향했다. 안경을 내려놓았다. 얼마나 되었다고, 사람이 참 간사하다 싶었다.

그 이후로 사나흘이 흐르도록 아오미네는 제 앞에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이 종용한 것이기도 했고, 이전부터 바라왔던 것이기도 했다. 누가 되었건, 그것이 아오미네든 카가미든 간에 제 속을 파고들어 온다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제 가장 저열한 밑바닥을 보이는 일은 카가미에게 한 것으로 족했다. 더는 그토록 졸렬해지고 싶지 않았고 비겁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을 받아주지 못하는 사람에게 외치는 일방적인 사랑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아주 잘 안다. 그래서 더는 녀석에게 못할 짓이지 싶었다. 결국 아무것도 주지 못할 거면서, 노력하지도 않을 거면서 녀석에게 여지를 주는 일 따위는.

녀석을 보낸 이후의 사나흘 동안, 히무로는 카가미의 경기 생각을 더 많이 했는지 아니면 상처받았을 녀석의 생각을 더 많이 했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굉장히 많은 생각을 했던 것도 같고 아니면 굉장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막을 수도 없이 밀려드는 상념의 바다 속에서, 히무로는 식사도 잘 하지 않고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가을장마인지 밖은 내내 비가 내리고 있었고, 흔한 노래하나 틀어놓지 않은 방 안은 빗소리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줄곧 녀석이 무식하게 많이 내려 둔 커피만 마셨다. 커피가 다 떨어졌던 이틀 째 되던 날, 무슨 생각이었던지 밖엘 나갔었다. 녀석이 그토록 즐거운 듯이 농구를 하던 집 앞 농구 코트에.

보고 싶었다던가 하는 달콤한 이유는 아니다. 다만 가야 할 것 같았고 가서 녀석의 웃는 꼴을, 미친놈처럼 웃으면서 농구를 하는 꼴을 보고 나면 안심이 될 것 같기도 했다. 해서 우산을 받쳐 들고 나간 코트가 빈 것을 보고 한편으로 실망했고 한편으로 안도했다. 녀석을 다시 보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빈 코트에 서서 오래도록 담배를 피웠다. 남자의 경기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 도피하듯 약을 먹던 그 때처럼.

경기장은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퍽 먼 거리여서, 히무로에게는 다행히도 남자를 마주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연습할 시간은 충분했다. 우유 한 잔으로 때운 속이 따끔따끔 쓰려왔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 바보야?!’ 문득 녀석의 환청을 듣는다. 히무로는 아닌 줄 알면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쓴웃음이 나왔다.

체육관 앞에 서던 때에도, 그리고 티켓을 끊으면서도 히무로는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관중석에 앉아서 멍하니 코트를 내려 보던 순간조차도 꿈이라도 꾸는 양 현실감이 없었다. 내가 지금 농구 경기를 보러왔구나, 머리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는데 손끝까지 와 닿지 않는 것이었다. 경기 직전의 웅성거림과, 좀처럼 차분해질 수 없는 들뜬 분위기까지 제가 여태 겪어오던 것과 아무것도 다르지 않았지만 어쩐지 생소하기만 했다. 분명 자신도 저기 안에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분명 그랬던 적이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냥 다른 세계의 일처럼 느껴졌다. 네가 이곳의 구성원인 적이 있긴 있었느냐며, 코트는 차갑게 그를 배제시켰다.

마지막으로 농구를 보러 왔던 게 언제였더라. 경기가 마지막이었는지 관전이 마지막이었는지도 희미했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하루하루 앞으로 감아나갔지만 좀처럼 농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에 남자들과 뒹굴던 기억 같은 것들만 튀어나왔다.

그리고 카가미에게 울며 비밀을 토해내던 기억이라던가. 그의 손에 이끌려 병원을 찾아다니던 기억. 상담을 권하던 의사의 표정. 집까지 찾아와 난동을 부리던 하룻밤 상대. 발목이 아파 잠들지 못하던 새벽.

그런 것들을 떠올리며 히무로는 새삼 왜 코트가 이렇게나 낯설어보였는지 깨달았다. 그의 삶에서 농구가 정말로 한 발 물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지금에 와서야, 바로 눈앞에 들이밀어져 피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와서야 피부에 와 닿았다.

히무로는 천천히 난간에 턱을 괴고서 코트를 내려다보았다. 저마다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선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매끄러운 바닥에 농구화를 긁어대는 발놀림. 소리도 나지 않는 점프를 두세 번 반복하는 사람. 사방에서 튀어 다니며 좋은 마찰음을 내는 농구공. 그 한쪽 구석에서는 어느새 대학 유니폼을 입고 몸을 풀던 자신의 환영이보였다. 어깨를 돌리며 팀원들과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는 히무로는 환상 속에서나마 웃고 있었다.

이상했다.

버릴 수 있을 거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 둘씩 자신의 삶을 떠나고 있었다. 매일같이 울면서 연습을 하던 때에도 감히 버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루하루 벌어지는 간극에 절망을 토해내며 새벽까지 혼자서 몰래 연습을 하던 어린 자신은, 그래도 농구를 끼고서 아등바등 버텨내고 있었는데.

그 불쌍한 녀석을 배신하다니.

그래놓고도 삶은 살아진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오래도록 난간에 기대어 있던 히무로는 문득 관중석을 돌아보던 카가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표정위로 일순간 어색함이 흘렸다. 조금 머쓱한 얼굴을 하던 카가미는 그래도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색해 하면서도 반갑다고 말해주는 남자의 다정함에 히무로는 숨이 막혔다. 시합 잘 해. 차마 소리는 낼 수 없을 것 같아 입모양으로만 말하자 그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휘슬 소리가 울리고 양 팀의 정렬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의자에 앉고 싶지 않아 그는 사람이 없는 입구근처 벽에 기대어 섰다. 선수명단이 올라오는 전광판으로 카가미의 이름이 보였다. 타이가. 입속에서만 맴돌다가 꺼져버리는 그 이름 역시 설마 자신의 손으로 밀어낼 줄은 상상도 못했던 사람이었다.

카가미가 그렇게 떠나버린 집에서도 생활은 계속되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어떤 의욕조차 생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밥은 먹어야 했고, 몸은 씻어야 했고, 병원은 다녀야했다. 텅 비어 버린 채로 살고 있음에도 여전히 쓰레기가 생겼고 주기적으로 장을 봐야 했으며 분리수거를 하지 않은 날에는 벌금도 물어야 했다. 슬픔에 잠겨 허우적거리던 시간들보다, 구질구질한 생활의 일부를 처리하고 있을 때가 더 쓸쓸하고 죽을 듯이 외로웠다.

점수판에 타이머가 돌아감과 동시에 시합이 시작되었다. 통통, 농구공이 튀는 소리가 경쾌했다. 농구화의 삑삑거리는 마찰소리가 귓가를 괴롭혔다. 선수들이 정신없이 달렸다. 공이 빠르게 회전하며 손에 손을 거치다 끝내 카가미에게 돌아갔다. 충분히 사정거리 내에 있었지만 그는 슛을 쏘는 대신 낮은 드리블로 수비수를 파고들었다.

첫 골엔 미들 슛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건 아마 본인 말고는 히무로만 알고 있을 징크스였다. 매끄럽게 뚫린 코스를 밟는 모습을 보며 히무로는 스텝을 셌다. 하나 둘 셋 점프. 중얼거리는 타이밍과 동시에 남자는 뛰었고, 앞자리의 사람들에게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히무로는 팽팽하던 균형이 깨지는 순간의 전광판을 보았다.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선취점이 들어가는 순간.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자르르한 쾌감이 한바탕 흐르며, 흥분이 몸을 적당하게 데우는 농구의 시작이었다. 제로의 램프위로 숫자가 새겨지는 장면을 보며 저도 모르게 흐릿하게 웃었다. 통통통. 바닥을 구르는 농구공소리가 뒤늦게 귓가에 어른거렸다. 미소는 생겨난 것보다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히무로는 순간적인 통증에 놀라 쥐어뜯듯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간신히 떼어냈던 미련이 막을 틈도 없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그늘에서 아주 오래도록, 힘겹게 말려놓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소금물에 젖어갔다. 구토감이 치밀었다.

자신이 버린, 버릴 수밖에 없던 것들이 이 자리에 오롯이 모여 있었다.

스스로를 갉아먹을 만큼 너무나 좋아하던 사람도. 도저히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단 하나뿐이던 꿈도. 마치 형태를 이루고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을 다그치는 기분이었다. 네가 포기한 것들을 보라며.

고통이 서서히 온 몸을 집어삼켰다. 어떻게 들어도 웃음 같지 않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히무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웃었다.

주제도 모른 채 꿈이라도 꾸는 게 차라리 행복했을까.

사람들의 응원소리와 달리는 바닥의 마찰소리 그리고 선수들의 기합소리가 가득한 체육관 한가운데서 히무로는 천천히 주저앉았다.

언젠가 다시 농구할 수 있을까? 내가?

히무로는 수도 없이 자문해왔다. 어떤 형태로든 내가 다시 농구를 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올까 하고. 굳이 농구를 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농구를 즐길 방법은 어디에든 있었다. 하다못해 공원의 코트만 해도 주말이면 사람이 북적였고 동네에는 농구를 즐기는 꼬마들로 그득했다. 아마추어 농구 클럽 따위에 지원한다면 어렵지 않게 농구를 즐기며 살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시선 같은 것에 딱히 상처받은 적이 없으니 뒤에서 누가 수군거린다 한들 즐겁게 농구만 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선수 은퇴와 함께 농구와 그에 관련된 모든 것을 버린 것은 일종의 도피 같은 거였다. 언제부터인가 농구가 버거워지기 시작했으므로. 좋아하는 만큼 행복해질 거라 믿었는데 좋아하는 만큼 점점 더 견디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농구 위에 얹힌 것이 너무 많았다. 지나치게. 그저 농구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어린 시절, 그런 걸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가 없었다. 치열했던 시절과 도저히 쫓을 수가 없어 아득했던 순간과 제 시력을 살해해 버릴 것 같던 남자의 반짝이던 모습 같은 것들이 농구 위로 켜켜이 쌓여 코트에 설 때면 언제부턴가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했지만, 농구를 빼면 제 인생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때때로 도망치고 싶었다. 이따금 홀로 남아 연습하던 빈 코트가 너무 넓어 아득해지던 순간들. 제 손만큼이나 익숙할 농구공이 너무 무거워 팔이 저릿해지던 감각들. 카가미를 안 뒤로 히무로는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농구를 향한 열정 사이에서 줄곧 비틀거려 왔다. 놓을 수는 없었는데 놓지 않고는 도저히 행복해질 것 같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았다. 때문에 부상을 당했을 때, 어쩌면 안도했다. 나는 지금 도망가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농구를 놓는 것이라고.

함성소리가 휘슬이 울리고 카가미의 팀을 호명하는 심판의 목소리에 어지럽게 섞였다. 히무로는 얼굴을 묻었던 손을 떼어 냈다. 자유투를 선고받은 카가미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까의 실소와 고통스러운 얼굴이 거짓이었다는 듯이 히무로의 얼굴은 담담하게 변해 있었다. 퍽 냉정한 눈으로 농구공을 잡고 슛을 시도하는 카가미의 모습을 응시했다. 단단한 팔, 농구에 최적화되었을 훌륭한 어깨. 그리고 모두가 칭송하는 그 다리며 무릎이며 발목 같은 것들이 움직이는 양을 슬로우 모션이라도 보는 듯이 찬찬히 뜯어보았다. 어렵지 않게 자유투를 성공하고 팔을 치켜들며 좋아하는 얼굴이 빙그르르 돌아 히무로를 찾는다. 히무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조금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순간 그 안심한 낯빛이라니.

카가미는 아직도 자신이 무엇에 실망하고 무엇에 좌절했는지를 모른다. 그래서 저렇게 친우다운 얼굴을 하고 친구다운 걱정을 하며 다정하게 굴 수 있는 것이다. 히무로는 카가미의 무지를 굳이 공들여 깨우쳐 줄 생각이 없다. 어쩌면 카가미와의 관계에서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히무로 쪽일지도 모를 일이다. 혹시나 둘 사이에 성적인 무언가가 가능했다고 해도, 지금과 다른 관계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히무로는 흘끔 전광판을 보았다. 4코트 전 휴식 시간, 점수 차는 25. 승패가 달라질 일은 없으리라. 특히 저 카가미가 있는 한은. 농구가 잔혹한 경기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히무로는 경기를 끝까지 지켜보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리를 떴다. 먹먹한 발목을 조금 끌면서.

지하철을 탈 때부터 비가 왔다. 예보에 없던 비였던 터라 편의점과 가게에서는 다투어 우산을 내놓았지만 히무로는 사지 않았다. 지쳤다는 생각만 들었다. 피곤하고 머리가 아팠고. 잔상처럼 제 집처럼 드나들던 경기 코트와 익숙한 농구공의 질감과 바닥을 구르는 농구공의 통통거리는 소리가 생각의 끝을 꼬리표처럼 붙잡았다.

역을 나와 걷는 내내 비를 맞았다. 가랑비처럼 시작했던 비가 시간이 흐를수록 굵어지고 있었고, 가을로 달려가는 계절에 내리는 비는 굉장히 차서 깨질 듯이 아프던 머리가 식는 것 같았다.

얼른 집에 가야지,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렸을 땐 집 앞 농구코트 근처 벤치를 붙잡고 주저앉아 있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우욱 하고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아까부터 먹먹하던 명치가 이제는 아주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히무로는 한참 동안이나 벤치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어이없게도 고통에 눈물이 올라왔다. 벤치를 붙잡은 손 위로 빗방울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뚝뚝 떨어졌다. 벤치도 히무로도 온통 젖었다. 젖은 머리칼을 타고 얼굴로 빗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발목에서 익숙한 통증이 올라왔다. 자신이 버려 왔던 것들과 제 선택들이 뒤섞여서 기분이 엿 같았다. 역시 가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과 남자를 위해 자신이 해 줘야 했던 일이라는 생각이, 그리고 부상을 당했던 순간과 엉망으로 살았던 시절 같은 것들이 애써 눌러놓아도 자꾸자꾸 떠올라 힘들다는 기분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잊고 싶다고, 잊으면 안 되냐고 신이라는 작자에게 따지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 순간 녀석이 나타난 것은 참 유용한 일이다.

고개를 숙이고 하염없이 비를 맞는 히무로의 발치에 익숙한 녀석의 두 다리가 섰다. 등으로 머리 위로 아프게 자신을 때리던 빗방울들이 녀석이 쥔 우산에 가로막혀 멈추었다. 덩치가 산만한 남자 둘이라, 둘이 함께 들어가기에는 지나치게 작은 크기의 우산이다. 히무로가 비를 맞지 않는다는 것은 녀석이 대신 비를 맞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녀석이 손에 쥔 우산을 내밀었지만 히무로는 등 돌려 받아들지 않았다. 어련히 돌아서겠거니 싶었는데, 녀석은 도리어 우산을 접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벤치 근처에 던져둔 채 제 옆에 와 앉았다. 배를 감싼 채 주저앉은 히무로의 곁에서,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래 비를 맞았다. 집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바싹 말라 있던 녀석의 옷이 한 톤 어두운 색으로 점점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번에 먼저 손을 내민 것은 히무로였다. 히무로는 녀석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는 비에 푹 절어 있는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엉망일 것이 분명할 얼굴로 애써 웃었다. 추워 덜덜 떨리는 입술로 속삭였다.

우리 집 갈래?”

…….”

나 지금 너무 추워.”

녀석은 말없이 저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애써서 지어보인 웃음이 씻겨 나갈 만큼 긴 시간동안 아오미네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묵묵한 시선과 눈동자가 오히려 날을 세운 비난보다 예리하게 마음을 찔러왔다. 왈칵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얼씨구나 받아들이지도 않는 아오미네 때문에 히무로는 다시금 비참한 기분이 되었다. 녀석의 팔을 붙잡은 손이 어느새 볼품없이 경련하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매달릴 곳이 필요했다. 뭐든 좋으니 이 생각을 멈추게 할 만 한 강한 자극이 필요했다. 머리에 총이라도 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을 만큼 힘겨웠다. 구멍 난 마음속에서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줄줄 새어나오고 있었다. 녀석의 무표정한 얼굴에 자신의 꼴이 고스란히 반사되어 비쳤다.

함께 바닥을 굴러달라고 말하는 경멸스런 모습이었다.

그러던가.”

아오미네는 잡힌 팔을 떨쳐내지 않고 그대로 일어났다. 히무로의 팔이 어정쩡하게 딸려 올라왔다. 아오미네는 그를 어렵지 않게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악 다문 잇새로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필요하면 줄게. 고작 그따위 위로가 필요한 거라면 못 줄 것도 없지.”

들어본 중 가장 고요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마치 끔찍한 것을 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오미네가 지금 자신을 싸구려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언젠가 그렇게 말했던 것처럼. 싸구려 취급 하지 말라고 화내던 아이에게 그게 바로 나라고 진작 말해줬어야 했다는 후회가 스치듯이 지나갔다.

아오미네는 팔을 붙잡고 아파트 입구 쪽으로 히무로를 끌어당겼다. 쏟아지는 빗줄기도, 세게 붙잡힌 팔뚝도 아팠지만 그래도 지금 녀석의 싸늘한 눈초리보단 아프지 않을 것이었다. 성난 얼굴을 하고서 그르렁거리는 녀석이 사납게 내뱉었다.

못 줄 것도 없는데 말이야. 대신 그 이후에 내가 어떻게 나올지는 그쪽도 각오해야 할 거야.”

입구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선 녀석이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했다. 분에 이기지 못한 주먹이 벽을 쾅 내려쳤다. 벌겋게 묻어나오는 핏자국을 보며 히무로는 내장이 다 토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난 어차피 어린애라서 산뜻하고 깔끔한 육체관계 같은 거 몰라. 굉장히 지저분하고 구질구질하게 굴 거라고. 알아들어?”

…….”

사사건건 전부 간섭할거고. 당신 인생에 내 마음대로 들어갈 거야. 그런 것까지 다 감안하고 있으면 어디 다시 한 번 지껄여봐.”

변변치 못한 인간이란, 주변까지 이렇게 더러운 것으로 오염시키는 것인지도 몰랐다.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고 지저분한 감정들을 뒤집어쓰고 저를 내려다보는 아오미네가 보였다. 괴로웠다. 머리가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더 이상 가려줄 빗방울도 없는데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해보라고. ? 못해?”

녀석은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상처받고 있었다.

새빨개진 아오미네의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처럼 차오르는 걸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너는 날 경멸하지도 못하고 상처받고 있구나.

머리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지는 것 같았다. 당신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주던 상대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지저분한 배신이었다. 추잡한 자기연민에 빠져 수치고 뭐고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내가 너무 아프니까. 내가 너무 괴로우니까. 내가 너무 힘드니까. 목을 조를 기세로 남에게 매달렸다. 카가미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같은 상흔을 남긴다. 몇 번이나 실패해야 더는 그만할 수 있을까.

줄곧 숨기려 노력했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감추지 못한 이기심이 발톱을 드러내고 녀석을 할퀴었다. 좋아한다고, 고백하던 녀석의 말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주제에.

너를 위하고자 하는 마음은 이렇게나 허울뿐인, 저의 아픔 앞에서는 먼지처럼 흩어져버릴 간사한 위선이었다. 스스로가 너무 초라하고 역겨워서 차마 미안해 할 수조차 없었다. 히무로는 나사 하나 빠진 얼굴을 한 채 붙들린 손과 아오미네의 표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팔을 잡고 있는 녀석의 주먹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알림 창에 1층 표시가 뜨며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자 억지로 히무로를 밀어 넣은 아오미네는 말없이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이 스르륵 닫혔다.

그리고 입술이 맞닿은 건 아직 닫히지 않은 문틈이 한 뼘이나 남을 만큼 급했다. 엉망으로 얼룩진 뺨을 붙잡은 손이 젖어있었다. 젖은 얼굴을 맞대고 빗물이 아직 남은 입술을 빨면서 아오미네는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혀가 얽혀들며 질척한 소리를 냈다. 뜨거운 걸 삼키는 것처럼 입 안이 데일 듯 아팠다. 입천장을 혀끝으로 긁으며 그는 남은 한 손으로 히무로의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얽어 넣으며 더는 가까워질 수 없을 만큼 세게 머리통을 끌어당겼다.

도착을 알리는 벨이 울림과 동시에 아오미네는 손을 놓았다. 마주친 얼굴에는 정말 여태껏 본적 없는 괴로움이 묻어있었다. 패배감과 허탈함과 그 밖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녀석의 입속에 쑤셔 넣은 게 바로 자신이었다. 얼룩진 눈이 원망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히무로는 그제야 소리 내어 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애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음을 토해내고 싶었다. 짐승처럼 짖어대고 싶었다.

아오미네.”

이름을 부르자 그가 움직였다. 천천히 손을 잡고 집 앞으로 이끈 녀석은 말없이 히무로의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꺼냈다. 부들거리는 손은 열쇠구멍을 세 번쯤 빗겨가고 나서야 간신히 문을 열 수 있었다. 그가 짚은 자리마다 빗물자국이 남았다. 발걸음대로 흔적을 남기던 푹 절은 신발을 벗고 뒤를 돌아본 아오미네는 가만히 현관에 서있는 히무로쪽으로 허리를 굽혔다. 손가락을 걸어 신고 있던 신발도 대신 벗겨주고 나서 손을 이끌고 그들은 욕실로 향했다.

억지로 끌려 들어온 히무로를 욕조 안에 넣어놓고서 아오미네는 샤워기를 틀어 더운물을 맞췄다. 찡그린 미간에 골이 깊게 파였다. 적당한 온도가 되자 그는 가차 없이 히무로의 머리 위로 샤워기를 가져다 댔다. 뜨거운 물이 뺨을 타고 어깨를 적셨다. 파랗게 질린 입술이 본래의 색으로 돌아올 때까지 녀석은 잠자코 더운 물을 머리위로 붓고만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하려 시도할 때마다 입으로 물이 들어왔다. 숨 쉴 틈도 없이 쏟아 붓는 물줄기에 눈을 뜰 수가 없던 히무로는 어둠속에서 가만히 녀석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오미네가 그 자리에 있다는 증거였다. 오르락내리락 불규칙하던 숨은 느리게 본래의 소리를 되찾아갔다. 따뜻한 물을 줄곧 맞고 있던 몸은 어느새 경련이 멈춰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만큼 흐른 뒤에야 아오미네는 작게 중얼거렸다. 조용하게 내려앉은 목소리는 숨겨지지 않을 만큼 착잡해하고 있었다.

어딘가 미친 것 같아.”

아주 느리고 대단히 지친 목소리였다. 히무로는 숨을 참았다.

나도 내가 이해가 안 가. 정말로이랬던 적이 없는데.”

…….”

이런 취급까지 받았는데, 내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게 이렇게나 비참한데. 당장이라도 안 보고 싶어야 하는 게 정상이잖아.”

…….”

그런데도그래도, 여전히 좋아. 당신을 많이 좋아해.”

우두커니 서서 그렇게 말하는 아오미네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당신도 이랬어? 그 사람이랑 헤어질 때, 이런 기분이었어?”

바깥에서 들리는 빗소리가 그날 내리던 기록적인 폭우와 겹쳐서 섞여들었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거실 구석에 구겨진 채 잠들지 못하던 길었던 새벽을 떠올리자 한 대 맞은 것처럼 히무로는 황망해졌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사과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미안해.”

아오미네는 듣는 순간 헛웃음을 뱉었다. 그리고는 지어보이는 애처로운 표정은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다정한, 눈이 녹을 것처럼 몹시 다정한 연민이었다.

이제는 당신을 조금 이해할 것 같아. 그래. 이런 사랑이 끝이 났는데 어떻게 감히 다른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겠어.”

…….”

대체 어떻게 버텼어? 이런 마음을 안고 있어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거야? 좋아하는 것도 없이. 누구도 들이지 못하고.”

녀석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찌르고 난도질했다. 슬픔에 사람이 깔리면 질식할 수 있을까. 히무로는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그리고 순간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이 떨어졌다. 잔뜩 젖은 머리를 쓰다듬을 듯 말 듯 애매하게 매만지며 아오미네는 속삭였다.

어쩐지 볼 때마다 울 것 같은 얼굴이더라.”

머리칼 위로 얹어진 손이 아직 너무나 차가운 상태라서 히무로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하면 또 다시 실수할 것 같아 아무것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만 갈게.”

손이 떨어져 나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든 히무로는 자신도 모르게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 어디를?”

손은 녀석의 옷자락을 잡아버린 상태였다. 머리보다 몸이 더 빠르게 움직여 반쯤 일어선 녀석의 소맷부리에 매달렸다. 아오미네의 손길이 흘끗 잡힌 옷자락을 향하다 망설임 없이 그걸 털어냈다.

당신 얼굴 안 보이는 곳. 계속 보고 있다가는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미련 없이 사라지는 녀석을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무슨 정신인지 히무로는 비척비척 일어섰다. 현관을 나서려는 녀석을 향해 조종당하는 사람처럼 걸음을 옮겼다. 문이 세차게 닫혔다. 거의 달리듯이 히무로는 현관을 따라 나섰지만, 이미 아오미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갔을까? 집으로 갔겠지?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천천히 맞은편 집 문 앞으로 히무로는 걸어갔다. 맨발이 차디찬 대리석에 직접 닿고 있었지만 냉기 따위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걸어온 자리마다 뚝뚝 물이 흘러내리며 웅덩이를 만들었다. 문 앞에 서자 바닥에 고이는 물은 반경을 넓히며 천천히 흘러갔다. 그리고 히무로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상처주고 밀어내고 거부하고 도망치는 것밖엔 몰랐다.

다신 보지 못하겠지. 당연한 일 아닌가. 그 정도 대가도 안 받을 거면 대체 인과응보는 왜 있단 말인가. 어차피 녀석은어차피 아무것도 없는 사이였다. 녀석과 함께하는 미래 같은 건 없었다. 더 이상 갈 곳도, 가고 싶은 곳도 없는 사람에게 발목 잡히기엔 어렸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면서.”

생각하며 히무로는 천천히 현관에 손을 뻗었다. 열쇠구멍 밑을 조심스럽게 만지며 그는 초인종을 누르기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했다.

나는 왜.”

말하는 입술 끝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나는 왜.”

눈물이 툭툭 바닥으로 한 두 방울씩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호흡이 흐트러졌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머리로 무슨 이야기인지 모를 것들을 뱉어냈다. 꽉 잠겨버린 목으로 흘러나오는 건, 울음이었다.

.”

 

 

남자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멀리 벤치에 남자가 웅크려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절로 욕지기가 나왔다. 인생이라는 녀석은 이토록 융통성이라는 걸 몰라서 꼭 피하고 싶은 것만을 골라 제 눈앞에 가져다 놓는다. 가까워지자 한참 비를 맞았는지 남자의 옷가지가 푹 젖어 있는 것을 곁눈질로 보았다. 모른 척, 지나치려고 생각했다. 아오미네는 남자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린 채, 한 손을 바지에 꽂고 자연스레 걸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보폭으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아오미네는 주먹을 아플 정도로 꾹 쥐었다. 수도 없이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삐걱대며 걸었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것처럼 본래 어떻게 걸었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겨우 열댓 걸음 걷고 나서, 아오미네는 결국 멈춰서고 말았다. 돌아서는 것은 계속 걷는 것에 비하면 우스울 만큼 쉬웠다. 성큼성큼 걸어 남자의 앞에 섰다. 그저 하염없이 비를 맞고 있는 그 등, 그 등이 너무 신경이 쓰였다. 애써 잘라내던 마음의 단면이 쓰라렸다.

막연히 생각해왔던 좋아한다는 감정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상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상대를 마주하면 바보처럼 실실 웃게 되는 것. 상대와 함께하면 그 아무리 시시한 것이라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처럼 느껴지고 상대와 손만 잡고 걸어도 너무 좋아서 날아갈 것 같은 기분.

언젠가 사츠키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테츠야를 좋아하면서 왜 고백은 하지 않느냐고. 차일까봐 무섭냐고 놀렸더랬다. 그 때 사츠키가 말했었다. 좋아하는 감정일 때에는 마냥 행복하고 즐겁지만, 그게 사랑이 되면 괴롭고 아프고 울고 싶은 거라고.

눈치 채기 전이 좋았다. 그저 호의이고 관심이었을 때에는 남자를 보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즐거웠는데 눈치를 챈 후에는 사랑이 되어, 남자를 볼 때면 습관처럼 뱃속 어딘가가 알싸하게 쓰려 왔다. 화가 났고 짜증이 났고 빌어먹게도 아팠다. 남자 때문에.

아오미네는 히무로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애써 부정하기로 했다. 매우 괴로운 작업이었다. 그토록 애가 타는 감정을 이제 와 같잖은 동정심의 발로였을 뿐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처음에는 시시각각 남자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떠올라 밥을 먹다가도 수저를 놓아야 했다. 집 앞 농구 코트 근처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아파트 현관에서, 혹은 남자를 만날만한 곳 어디라도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남자는 한 번도 아오미네의 앞에 나타나 주지 않았다.

남자라는 존재가 제 인생에 개입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학교를 갔고 밥을 먹었고 농구를 했다. 아오미넷치가 웬일임까? 갑작스레 늘어난 1on1에 키세가 기뻐 들뜬 투로 물었다.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고 시간을 죽였다. 천천히 남자를 잊어가는 연습을 했다. 침대에 누워 잠드는 시간이나 남자가 말했던 근처 카페 앞을 지나는 순간, 테츠야의 스크랩북에서 발견하는 카가미의 이름 같은 것들에 의미를 지워가는 노력 같은 것들. 그러자 정말 거짓말처럼 남자 생각이 나질 않았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오미네는 조금, 무료해졌다.

카가미 타이가의 농구 경기를 보았다.

농구는 보는 것보다 하는 것이 훨씬 즐거워서 아오미네는 사실 요즈음의 농구 세계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따위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부원들이 좋아라 하는 NBA의 누구라던가 잘 나가는 농구선수 누구라던가 하는 정도는 이름만 겨우 가물가물 들어본 적 있을 뿐이다. 어떤 팀은 무슨 스킬이 강하고 어떤 팀은 팀 단합이 참 잘 되고 따위의 이야기를 꿰고 있는 것은 테츠야나 키세 정도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부실 안 자유 시간, 농구를 하는 것보다 보는 데 익숙한 사츠키와 테츠야, 키세가 조잘조잘 수다를 떨고 있었고 아오미네는 부실에 누워 하릴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생각을 깊게 하는 편이 아닌데 요즘 들어 잡생각이 늘었다. 아오미네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자고 싶어 무진 애를 썼다. 한창 신이 나 떠드는 키세의 목소리가 거슬렸다.

한참 요즘 잘 나가는 선수들의 이름을 조목조목 짚어 가며 이 사람은 어떻고 저 사람은 어떻고 하고 수다를 떨더니 테츠야가, 아 경기 녹화 영상 있는데 볼래요? 하는 목소리가 들렸었다. 부스럭거리며 테이프를 찾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프로젝터를 찾아 연결시킨 모양이었다. 와아아 하는 함성 소리와 각 선수들을 소개하는 사회자의 멘트 중에, 카가미 타이가라는 이름이 귀에 박힐 것처럼 들어왔다.

그건 순간의 변덕 같은 거였다. 아오미네는 감았던 눈을 뜨고 놀란 사람처럼 벌떡 일어섰다. 훤칠한 키에 다부진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가 약간 긴장한 듯이 관중석의 어딘가를 보고 있는 모습이 화면에 찍혀 나왔다. 아오미네는, 스스로의 답지 않은 행동에 이유도 붙이지 못한 채 정신없이 남자의 얼굴이며 행동 따위를 새길 듯이 보았다. 복잡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보다도 호기심이 먼저였다. 그가 그렇게 마음을 다 주고 사랑했다는 카가미라는 남자는 어떤 인간일까.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농구를 할까. 남자의 어떤 것이 그렇게 그를 홀리게 했을까.

미국 팀에 스카우트되었다는 카가미 타이가의 마지막 일본 경기였던 모양이다. 사회자는 수도 없이 카가미에 대한 찬양이며 칭찬들을 제 아들마냥 자랑스러워하며 늘어놓았고 아오미네에게는 그 모든 설명들이 웅얼대는 것처럼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다른 것에는 신경도 못 쓰고 카가미의 농구를 보았다. 깔끔한 드리블과 파워풀한 블로킹, 경이로운 수준의 점프력과 박력 넘치는 메테오 잼.

그것은 기묘한 기분이었다. 같은 상대에게 계속해서 패배감을 선사받는 기분은.

아오미네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서툰 컴퓨터 실력으로 카가미의 경기를 죄 검색해 보았다. 기록이 남아 있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경기를 모두 다. 밤을 새서 경기를 보았고 학교에 가면 테츠야의 콜렉션을 빌려 시간이 날 때마다 틀었다. 네가 남의 경기 구경을 하다니 별 일도 다 있네요, 하고 신기해하는 테츠야나 다이쨩 어디 아파? 하는 사츠키의 말도 모두 귓등으로 들었다. 대체 어떤 남자인지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카가미 타이가라는 남자는 진짜로 빛으로 이루어진 사람 같았다. 그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이름 정도가 전부인 아오미네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절대 읽지 않던 인터뷰도 카가미의 것은 훑어보았다. 순수하게 대단하다는 생각부터 이런 인간이 있어도 되는 거야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모니터를 응시하면서, 아오미네는 혀를 찼다.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아오미네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아오미네로서는 처음 겪는 열등감이었다. 읽고 있던 남자의 인터뷰에서 손을 놓고 모니터를 껐다. 그동안의 기이한 열정이 무엇이었냐는 듯 늘어졌다.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

 

그러고 보니 아오미넷치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요?”

아오미네는 책상위에 늘어져 키세 돈으로 사온 하드를 깨물며 대답했다.

누구?”

유부녀도 아니고, 어린애도 아니고, 뭐 이름은 모르는 그 사람 있잖아요.”

그 말에 관심 없는 척 하는 미도리마와 같은 표정의 쿠로코가 그들을 쳐다보았지만 아오미네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책상위에 가디건을 대충 뭉갠 채로 엎드려 있던 그는 대답대신 하드를 한 입 더 깨물었다.

설마, 잡혀갈만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미도리마의 의심스러운 목소리가 말꼬리를 흐렸다. 아오미네는 남아있던 아이스크림을 입으로 전부 밀어 넣었다.

너는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말이 나왔다.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목이 막혀버릴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평범한 어조로 평범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참았어요? 그럼 역시 사랑?”

아오미네군 의외네요. 역시 짝사랑이었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대체 너흰 날 어떻게 보고 있었던 거냐고.”

뭐긴. 아오미넷치는 농구를 잘하죠.”

키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입에 문채로 녀석은 책상에 뒤로 기대어 말을 이었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책상이 뒤로 조금 밀리며 작은 소음을 냈다.

대신 그만큼 농구밖에 모르니까. 또래들보다 감정의 폭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좁은 건 당연하지 않겠슴까. 여자애 쫓아다닐 시간을 죄 농구에 부었는데 심지어 재능도 있어. 하여간 그래서 아오미넷치는 노력해도 안 되는 일에 대한 이해가 현저히 부족하다구요.”

생각보다 타당한 이야기를 하며 키세는 발끝을 까딱거렸다. 의미 없는 버릇이었다. 남자에게도 이야기를 길게 할 때는 물끄러미 손가락을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는데.

연애에선 그게 맹점이죠.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데. 이건 차이면서 배우는 거 말고는 해결 못해요.”

그 얘기를 니가 하니까 신빙성이 별로 없는데.”

물론 저도 거절 같은 걸 당해본 기억은 그다지 없지만.”

키세군 재수 없습니다.”

재수 없군.”

내말 좀 끝까지 들어볼래요?! 여자들한테 차인 기억은 없지만 그래도 전 나름 사교활동도 많이 하고 다녔단 말이에요! 여기 농구에게 모든 걸 바친 인간과 달리, 사람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어려운지 몸으로 직접 겪고 경험치도 많이 쌓았거든요!”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요지는 그거죠.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려면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수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한데 아오미넷치는 경험치 자체가 모자라니까 헛발질을 해도 어쩔 수 없다는 나름의 위로였슴다?”

키세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아무 말도 안했는데 이미 제가 누군가를 좋아했다가 차였다는 걸 기정사실화 시킨 녀석들은 짠 눈으로 자신을 위로했다.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들은 정체가 뭔지도 헷갈렸다.

별로. 그런 거 아니니까.”

말해봤자 아무도 믿는 얼굴이 아니었다. 변명을 늘어놓기도 전에 어느새 관심사가 전환되어 저희끼리 도란도란 하드 맛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아오미네는 턱을 괴었다.

썩 틀리지 않은 이야기였다. 남자의 박탈감에 대해서 자신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경험해보지 않은 감정은 몰랐다. 제가 특별히 공감능력이 나빴기 때문인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이 역시 모르는 일이었다.

목 언저리가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쓰디쓴 감정이 한 가운데에 걸려서 내려가질 않았다. 혹시나 저의 무지가 남자에게 무언가를 닦달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돌멩이라도 삼킨 것처럼 도저히 넘어가지 않는 감정을 억지로 들이킨 기분이 들기도 했다.

차가운 복도에서 느꼈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분도. 비를 맞고 있는 남자를 보던 순간 머리가 하얗게 변할 만큼 치솟던 답답함도. 도저히 손에 들어오지 않을 사람을 눈앞에 둔 안타까움과. 자꾸만 카가미에게서 패배감을 느끼는 어리석은 저의 마음 전부가. 남자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이걸 알아야만 당신을 이해할 수 있었던 걸까 생각하면 그의 삶이 문득 슬퍼질 수밖에 없었다. 경험치 같은 게 될 수 있을까.

남자가 저의 무지함을 깨부수는 평범한 과거가 될 수 있을까.

애써 의문에서 고개를 돌렸다.

 

아오미네는 늦게까지 체육관에 남아 혼자 농구 연습을 하고 있었다.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지 않아 시작한 일이라, 저녁 열 시가 넘은 으슥한 시간에야 귀가한다. 어떤 체계적인 연습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농구공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라는 것에 가까웠다.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던 쿠로코도 먼저 돌아가고, 아오미네는 텅 빈 체육관 안에 드리우는 노을 속에서도 줄곧 카가미의 농구를 곱씹으며 남자가 해 내던 점프슛이며 레이업 슛 따위를 시험했다. 미국 진출까지 하는 스타의 고난이도 동작들이다. 쉽게 될 리가 없는 게 당연한데도, 엎어지고 넘어지며 생각만큼 잘 되지 않는 스킬에 오기가 돋았다.

어스름이 지고 땅거미가 내렸다. 으슥해진 하늘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도록 달리고 던져댔다. 결국에는 탈진해, 넘어진 그대로 벌렁 드러눕고 만다. 감감한 체육관의 불빛이 눈을 아프게 찔러 왔다.

시간이 어느새 여름을 넘어서 가을로 달려가고 있었다. 한 번 비를 뿌릴 때마다 날씨는 충실하게 제 온도를 떨어뜨리고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아오미네는 아직도, 아직도 남자에게 처음 말을 걸었던 그 여름에 머물러 있는데 하루가 가고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갔다. 남자와 보냈던 시간도 겨우 한 달 남짓이었을 뿐인데, 이제는 그보다도 더 오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분명 남자를 온전히 제 안에서 소거해내리라 생각했다. 마음을 잘라내고 애정을 조금씩 덜어내며 그렇게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잊어가듯 그렇게 잊고자 했다. 될 것 같았다. 실제로도 부원들과 잡담하는 도중이나 농구 경기를 할 때 같은 순간에는 남자가 생각나지 않았었으니까. 그러다가는 더 시간이 지나자 정말 남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남자가 없이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고 남자와 함께했던 여덟 시가 되어도 허전하지 않았다. 그토록 바라왔던 것이었는데, 남자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아오미네는 무서워졌다. 천천히 남자를 잊어가는 자신이. 자신처럼 저와의 기억을 묻고 있을 남자가.

남자와 보냈던 안온했던 시간이 망연한 과거로, 흐릿한 기억으로 변하고, 무뎌져서 결국은 아무렇지 않게 될 거라는 사실은 이따금 아오미네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아오미네는 이후로 남자를 잊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남자의 집에서 몰래 가져 온 남자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남자를 처음 보았던 그 계단을 몇 번이고 찾아갔고 남자가 홀로 걷던 거리를 그대로 되밟아 보기도 했다. 남자가 하염없이 앉아 맥주를 홀짝이던 농구 코트 근처 벤치에도 오래도록 앉아 보았다. 최근에는, 집에 돌아가기 전에 남자가 일찍이 말했었던 그 카페에서 커피를 사 마시는 습관도 생겼다. 다이쨩이 커피? 정말 안 어울리는데, 하고 모모이는 풉 웃어 버렸지만.

실상 아오미네는 다시 히무로를 보는 일이 두려웠다.

그것은 그에게 받았던 과거의 상처가 너무나 아팠다던가, 다시 거부당할 것이 두렵다던가 하는 소모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조금 깨달았다는 편이 옳았다. 좌절 같은 것은 전혀 모르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에게는 상처였을 수 있겠구나.

그 날 이후 히무로를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것은 아오미네가 일부러 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오미네는 그에게 다시 한 번 상처를 안길 것이 두려웠다. 자신은 결국 세상이 두렵고 삶이 힘겨운 그 남자의 업일 수밖에 없다는 거, 아오미네에게는 그것이 가장 견디기 힘든 사실이었다. 그래서 피했다. 다시 남자와 마주친다면 남자가 받는 상처 자신이 남자의 고통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런 거 다 떠나서 남자를 껴안고 다시는 놓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울 테니까.

빌어먹을.

아오미네는 팔뚝으로 눈을 가렸다. 몸속을 떠다니던 가장 뜨거운 감정들이 눈 뒤로 몰려든 것처럼 눈가가 뜨거웠다. 낮게 읊조린다. 씨발. 그런데도. 그런데도 지금도 남자가 보고 싶다고, 남자를 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지긋지긋했다. 씨발. 씨발. 둑이 터지듯 한 번 쏟아진 감정은 쉬이 사그라지질 않았다. 아오미네는 오랫동안 제 팔에 눈을 묻고 있었다. 조명이 너무 밝아서, 눈이 너무 아파서, 그래서.

 

-

 

용서를 빌어야 한다, 고 생각했다. 그만 갈게, 하는 그 뒷모습을 붙잡아야 한다고.

그 밤을 히무로는 뜬눈으로 지새웠다. 자신의 저열함이 혐오스럽고 제가 준 상처가 끔찍해서. 녀석을 제 감정의 배출구로 쓰려던 발상이 너무나 비겁했다. 저를 좋아한다는 사람에게, 아니 다 떠나서 한 인간에게 할 짓이 아니었다. 녀석과의 시간들을 되짚었다. 녀석이 했던 말, 녀석이 했던 행동 혹은 녀석이 자신에게 주었던 것들에 대해서.

아오미네 녀석은 큰 키에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퍽 세심하고 자상한 데가 있는, 여태껏 사랑과 동경만을 받으며 살았을 존재였다. 그런데 처음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그 날을 경계로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성가시다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기분 좋았다. 아오미네의 알기 쉬운 성격은 제 치기어린 우월감을 채워 주기에 충분했다. 기분이 좋아서, 계속 사랑받고 싶어서 녀석을 내쳤다가도 받아주고, 다시 내치고 다시 받아주고를 반복했을지도 모르겠다. 더 달라고. 나는 너의 마음에 대답하지도 보답하지도 않을 테지만 더 내놓으라고.

지독한 후회였다. 그 날 이후 히무로는 한동안 아팠다.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고 그것은 녀석에게 사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바로 옮기지 못하는 좋은 핑계거리이기도 했다. 방 안에 숨을 죽이고 누운 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카가미의 경기를 피할 때처럼, 약을 먹고 잠을 자던 그 때처럼 모든 생각을 지워 내려고. 그러나 아무리 비워내 봐도 녀석에의 기억만이 오롯이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이 방과 이 집은 남자와 함께 했던 시간과 기억이 더 길고 많았을 것인데 그 위로 자꾸만 녀석과 보냈던 한 달 여가 겹치는 것이다. 녀석과의 시간이, 남자와의 추억을 몰아내듯 밀어내고 제 색으로 방을 부옇게 채우는 것을 히무로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커피포트를 보고도 남자의 맛있는 커피가 아니라 녀석이 서투른 손으로 만들어 주었던 그 커피가 생각이 났고 침대에서도 남자와 수백 번도 더 함께 잠들었던 밤들이 아니라 녀석이 약에 취한 자신을 눕혀 주던 그 밤의 생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울리지 않는 제 핸드폰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더는 카가미가 아니라, 녀석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눈치 챘을 즈음에는 히무로도 인정해야 했다. 내가 녀석을 어쩌면 꽤 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히무로는 아오미네의 집 앞에 선 자신을 어디다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곱씹고 있었다. 차마 벨을 누르지도, 그렇다고 그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망설이면서. 녀석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고 생각은 했는데, 녀석을 만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신기하리만치 자주 마주치던 이전과 비교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전화를 하자니 아오미네는 히무로의 번호를 알아도 히무로는 녀석의 번호를 모른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 녀석과 자주 마주쳤던 아파트 주변을 여러 번 돌아다니기도 하고 녀석의 학교 앞에서 기다려보기도 했다. 녀석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히무로는 용서를 빈다는 어처구니없는 명분을 대는 자신의 비겁함에 쓰게 웃었다. 사과하고 싶다고? 아니 그저 녀석을 한 번 더 보고 싶을 뿐이겠지. 이럴 때조차 솔직하질 못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해 비참한 기분이 된다. 병신 같아.

어떤 말을 해도 그저 우습기만 할 것 같았다. 히무로는 녀석을 만날 방법과 만나서 할 말의 경우의 수를 굴려 보다가, 무슨 갈래를 선택해도 우습다는 것을 절감하며 벽에 등을 기댔다.

오늘 밤도 허탕인 듯싶었다. 이전에는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녀석이 나타나는 것 같아서 지겹기까지 했는데. 어쩌면 그 때 녀석과의 사이에 존재했던 모든 행운을 다 써버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 마주쳐야 사과든 뭐든 할 것 같은데 만나기부터가 난관이고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 지에 대해서도 오리무중이다. 히무로는 힘없이 고개를 숙인 채 기댔던 벽에서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기다릴 거면 끝까지 기다리고, 갈 거면 처음부터 하질 말지 하다 마는 건 또 뭐야.”

불퉁불퉁한 건, 그토록 기다렸던 녀석의 목소리다. 히무로는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오미네가, 두 손을 바지춤에 꽂은 채 느릿느릿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

뭐 해? 여덟 시잖아.”

? 하고 히무로는 의아한 목소리를 낸다. 어느새 계단을 다 올라온 아오미네가 당연하다는 듯이 히무로의 앞에 섰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나는 이웃사촌간의 돈독한 우정으로 만든 여덟시 약속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라고. 여덟시에 오지 말란 소린 안 했잖아.”

히무로는 얼은 듯이 굳었다. 머쓱하게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던 아오미네가 팔을 내리고, 히무로를 곧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당신이 나랑 많이 다른 사람인 거 알아. 평범하게 사랑만 하는 속 편한 연애 같은 건 할 수가 없었다는 것도. 가까워지는 게 두렵고, 두근거리는 것이 불안하고. 다른 사람들은 당연하게 말하는 사랑한다는 말이 당신에게는 엄청난 각오를 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었을 거고.”

사랑하는 게 상처받는 것과 똑같았겠지. 아오미네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 히무로는 조금 긴장한 채로 아오미네의 말을 들었다. 아오미네는 히무로가 어디론가 가 버릴까 두렵다는 듯이 손을 뻗어 히무로의 팔을 잡았다. 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 있었다.

지금 당신 앞에 서 있는 나라는 인간 자체가 당신에게 얼마나 큰 부담인지 알아. 내가 계속 당신의 옆에 있는 한은 당신은 아무것도 주지 못해서 괴로울 거고. 사실은 내가 당신 앞에 보이지 않는 게 당신에게는 더 편할 일인 건 알고 있어.”

히무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아오미네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가장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도리 없이 마음 한 편이 아릿해졌다.

그러니까.”

아오미네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냥 받기만 해.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받기만 해. 다른 건 아무것도 안 바랄게. 그냥. 내가 당신을 안 보고 살기는 어려울 거 같으니까 얼굴이나 보고 내키면 말도 하고 그러면서. 우리 그냥 그렇게 살자.”

녀석의 마지막 말은 거의 간청하는 것처럼 들렸다. 히무로의 팔을 아프게 잡았던 아오미네의 손에서 힘이 빠지나 싶더니 스르르 떨어져 나간다. 아오미네의 말을 듣는 어느 순간부터, 히무로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히무로는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많이 아플 거야.”

아오미네는 대답했다.

알아.”

자꾸만 마음이 덩어리져서 눈에서부터 흘러나왔다. 어디까지 더 헤퍼질 생각인지 도저히 멈추지 않는 설움이 바닥에 한 두 방울씩 떨어졌다. 뭐가 슬픈 건지 눈물은 하염없이 흘렀고 뭐가 아픈 건지 가슴은 뭔가에 찔린 것처럼 시큰거렸다. 조심스럽게 녀석의 손등이 뺨을 문질렀다.

나는.”

뺨을 쓰다듬는 손길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자 눈물방울들이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마치 잔뜩 곪은 상처에서 진물이 뚝뚝 흘러내리듯, 마음은 그걸 뱉어내는 것밖에 할 줄 몰랐다.

애정을 강요하거나 구걸해본 기억밖에 없어서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두서없는 속죄를 아오미네는 아무런 말도 없이 듣고 있었다.

언제나 마지막엔 뒤틀려버려서그냥 내가 애초부터 잘못된 인간인건지도 몰라.”

토해져 나오는 건 뿌리 깊은 자기불신이었고, 혀끝에 진드기처럼 매달린 건 그로인한 불안감이었다. 늘 망쳐버렸으니까. 어깨가 오싹할 만큼 히무로는 그게 무서웠다.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도 참을 수 없이 비겁해지는 이유였다.

그래도 괜찮아. 마지막엔 놓치게 된다고 해도.”

…….”

내 인생에 당신이 없다는 것보단 그게 좀 더 괜찮을 거 같아.”

아오미네는 어설프게 웃었다. 억지로 지은 얼굴인 게 뻔히 보였지만 그래도 자신을 똑바로 보며 웃는 그 얼굴이 가슴 언저리에 조금씩, 조금씩 쌓였다. 녀석이 웃을 때마다, 화낼 때마다, 다정할 때마다, 무신경할 때마다 줄곧 쌓여오던 것들이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네가 알려준 대로,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내 삶이 그렇게까지 남루했다는 게 아쉽더라고. 너를 이미 모든 걸 태워버린 뒤에 만난 게 슬프다고.

그리고 뺨에 닿은 네 손이 따뜻하다는 생각도 들었다.